전투의 승리는 기뻤다. 힘든 전투일수록 후련한 마음이 컸다. 폭발로 인해 땅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기고 아직도 공장의 매연처럼 까만 연기가 주위에 풀풀 날아다녔지만 어쨌든 불은 해치웠다.
주위가 참혹했지만… 원인을 제거했으니까 됐다….
단델리온에게 호언장담했던 것치고 전투 난이도가 높아서 갑자기 암울한 기분이 되었다.
어떡하지? 진짜 앞서 불을 다 쓸어 갔던 드루이드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우린 이렇게 애먹었는데….
그 드루이드가 미리 수를 줄여 주지 않았다면 큰일 날 수도 있었던 건가? 사냥터 쓸어 갔다고 욕했는데 사실은 좋은 사람이었다든가….
이런 불들에게서 군락지를 사수해 낸 단델리온도 새삼 무척이나 대단한 드라이어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 씨… 빨리 더 강해지든가 해야지.
드라이어드들에게 포션을 주어 외상을 치료하도록 했다. 데이지는 그사이 장갑, 부츠와 깔 맞춤 한 재킷과 하의를 입고 있었다. 그래도 성장했구나.
엘더의 로브도 금장이 더 화려해지고 메스키트의 망토에도 은실로 모체의 꽃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래, 이렇게 계속 다들 성장하면 그 드루이드 못지않은 전투 실력을 보일 수 있을 거야.
“앗! 드루이드님, 저길 좀 보세요!”
포션의 뚜껑을 열던 데이지가 불이 처치된 자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데이지의 시선을 따라간 곳엔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물체가 놓여 있었다.
까맣게 탄 자리 위에 놓여 있어서 눈에 확 튀었다. 그리고 저것은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물건이었다.
다이아가 저기 왜 있지? 전투 중에 내가 흘릴 리는 없고. 내가 던진 거 아닌데. 메스키트가 오해 안 했으면 좋겠다.
“이게 여기 왜 있지? 난 던진 적 없어! 진짜야!”
다이아를 주워 잿가루를 탁탁 털어 냈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다이아가 맞았다.
“내 주인, 제이. 불에게서 나온 것이랍니다.”
“이게 왜 불에서 나와? 그것들이 아이템도 드롭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여태 잡았던 불에선 아무것도 안 나왔잖아.”
“정확히는….”
메스키트의 표정이 다시 매서워졌다.
“정확히는 드라이어드나 세계수의 일부를 삼킨 불이 남기는 결정이에요, 제이. 드라이어드도 세계수의 수액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의 속에서 태워져 마법의 힘으로 응축된 것이랍니다. 겉이 세계수로 가지 못한 드라이어드의 영혼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다이아 자체를 흡수하진 못해요. 제이가 불을 향해 다이아를 직접 던지는 것과는 다른 경우예요.”
이게 드라이어드의 유해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여기 군락지의 민들레 묘목 아이 중 하나를 삼킨 것이 분명해요. 좀 전에 불이 뿜었던 가루는… 민들레 드라이어드의 하얀 꽃씨들이에요.”
힘을 흡수했다는 의미가… 그런 거였어?
이게 군락지를 뛰어놀던 그 작은 민들레 묘목 아이의 유해나 다름없다니.
지금도 노란 옷을 입고 하얀 솜뭉치 스태프를 휘두르며 뛰어다니는 모습이 눈앞에 선한데.
꺄르르 웃으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정말 작아서, 내 드라이어드인 데이지도 어린 묘목의 모습인 만큼 동질감이 느껴져 자꾸 눈이 갔었다.
어쩌다 단델리온의 품에서 멀어져 운이 나쁘게 불에게 잡아먹히게 된 걸까. 안타까움에 가슴이 찌르르 아파 왔다.
이렇게 끔찍한 방법으로도 다이아가 생길 수도 있었구나. 메스키트가 월렛에 다이아가 맺히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도 있다고 했었는데.
그때 묘하게 표정이 좋지 않아 보여서 이야기를 피했던 것이 이런 방법 때문이었다니.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걸, 한숨이 절로 나왔다.
군락지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이 좋겠어. 더 이상 어린 민들레 드라이어드들이 피해를 받지 않게. 내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겠지.
지금 앞서간 드루이드와 나를 비교하며 좌절감을 느낄 때가 아니었다. 그 드루이드는 레벨이 높았나 보지 뭐.
나도 레벨 좀 올리면 무리는 아닐 거야. 나중에 만나게 된다면 사냥법 좀 물어봐야지.
***
이후에 다른 불의 위치를 안내하는 꽃씨들을 따라 사방팔방으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우린 아마 첫판부터 보스를 만났던 것인지, 긴장했던 것에 비해 다른 불들은 수월했다. 레벨이 위로 쑥쑥 뛸수록 점점 처치하는 것에 속도가 붙는 것도 있었다.
또 드라이어드를 삼킨 불을 만날까 봐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대부분의 불은 평범했다. 사람 형태를 하고 있긴 했지만, 테라리움 근처의 불보다 크기가 더 크고 위력이 강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그 드루이드는 얼마나 이 근처를 싸돌아다닌 거야. 불이 죄다 사람 형태를 하고 있잖아?
오랜 시간에 걸쳐 주변을 다 정리할 때쯤, 드라이어드를 삼킨 불을 만났던 곳과 정반대의 곳에서 또다시 그것과 마주하게 되었다.
드라이어드의 힘을 흡수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불. 그것이 분진 폭발을 쓰기 전까진 구분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정말 의외로 다른 불들과 묘하게 다른 점이 존재했다.
아마 다른 이 근처에서 연이어 다른 불을 먼저 만났던 것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기묘함이었다.
불인데, 분명 다 같은 불인데 저건 잘 보면 활기가 돌았다. 정말 광적으로 활활 타올라서 불에 생기가 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나는 불의 사정권에 닿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저거… 맞는 것 같지? 아무래도….”
“제이, 우리가 이곳에서 처음 마주쳤던 그 불과 같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음, 메스키트는 눈치 못 챘어? 아니면 내 착각인가? 저건 좀 다른 것 같아. 착각이면 좋겠지만 드라이어드를 삼킨 것 같아.”
“그럼 나누지 말고 단번에 잡아야겠군요.”
그게 가능할까? 하지만 처음의 그 불은 메스키트의 강력하고 정교한 공격에도 한 번에 죽지 않고 흩어졌잖아. 데이지도 많이 강해졌지만 아직 메스키트만큼의 파워를 내지 못할 것이고.
메스키트가 원 킬을 내지 못하면 데이지는 아무리 공격 특화라고 해도 더 무리가 아닐까? 엘더의 행운 버프를 받아도….
“할 수 있겠어? 음, 물론 메스키트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이전 전투에선 그러지 못했잖아.”
엘더의 루비 반지처럼 메스키트의 파워를 올려줄 장신구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하다못해 정말 게임처럼 상시로 드나들 수 있는 캐시 숍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돈만 있으면 버프도 사고 특수 장비도 사고 그럴 텐데.
내 말에 메스키트는 슬쩍 랜스를 들어 살펴보았다. 그러곤 작게 웃음을 지었다.
“아마 가능할 것 같은걸요?”
뭐가 달라지기라도 한 거야? 내가 보기엔 랜스는 그대론 것 같은데. 내 레벨이 올라서 드라이어드들의 레벨 제한도 뚫리게 되면, 보통 장비가 가장 먼저 변모하여 그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레벨 상승의 속도는 등급에 반비례하는 건지 데이지는 처음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엘더는 얼굴과 더불어 장비도 갈수록 화려해졌고 메스키트는 변화의 정도가 가장 적었다.
“메스키트의 말이 맞을 거야.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의 제한이 좀 더 풀렸어. 너의 영혼의 한계가 커져서 우리도 뿌리를 넓게 펼 수 있게 됐으니까. 더 크고 많은 기술을 쓸 수 있게 된 거야.”
엘더가 자신의 스태프를 한 번 보더니 내게 말했다. 그 소리가 무슨 분갈이라도 한 식물처럼 들리네. 작은 포트에 있던 식물을 넓은 밭에 옮겨 심으면 한없이 커지는 것처럼 말이야.
“저 데이지 꼬맹이는 모르겠지만, 메스키트는 원래 쓸 수 있는 기술이 많아. 다만 제이, 너의 작은 영혼에 맞춰 메스키트도 몸을 작게 움츠리고 있는 것뿐이야. 영혼의 뿌리를 뻗을 수 있는 공간이 작을뿐더러 폭주해서 크게 몸부림을 치게 되면 너의 영혼이 깨질 수도 있으니까.”
“그럴 일은 없답니다. 전 절대 나의 주인 제이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아요.”
“말이 그렇단 거지.”
이게 다 못난 내 탓이었다. 못난 내 쪼렙 탓이었다…! 이 못난 주인이 영혼의 크기가 종이컵 따위라서…!
“내 주인, 제이. 너무 우울해하지 말아요.”
차가운 건틀릿이 살풋 볼에 와 닿았다. 그와 반대로 무척이나 따뜻한 메스키트의 눈빛이 내려앉았다.
“제이는 아주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요. 놀라울 만큼.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덕분에 저도 엘더 꼬맹이의 쓸모없는 걱정만큼 한없이 웅크리고만 있지 않답니다. 보여 줄게요. 내 주인이 성장하는 것에 저도 보여드려야죠. 제 날카롭게 모아진 강한 비호의 의지를.”
그녀의 올곧은 눈빛에 홀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찌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보여 주세여!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볼게여!
메스키트는 방패를 등 뒤로 보냈다. 매번 한 손으로 들고 다니던 거대한 랜스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그녀가 저벅저벅 불을 향해 걸어가자 엘더가 스태프를 땅에 꽂았다. 우리가 분진 폭발의 후폭풍에 휘말렸을 때 사용했던, 엘더의 그 광역 힐링이 시전되었다.
스태프를 꽂은 땅을 중심으로 하얀 꽃잎과 흰빛이 넓게 회오리쳤다. 다친 드라이어드도 없는데 빡힐이라니. 기력 낭비하는 것이 아닌가 했는데 우려와 달리 엘더의 표정은 무덤덤해 보였다.
“이게 영혼의 뿌리가 넓어진 내가 사용할 수 있게 된 기술이고.”
메스키트의 스틸 부츠에 닿은 흰 빛은 첫눈이 쌓인 지반의 첫 발자국처럼 뭉쳤다가 부스러져갔다.
불은 메스키트가 사정권에 진입하자마자 그녀를 알아채고 바라보았다.
메스키트가 오른발을 뒤로 빼고 자세를 낮추자 사막의 모래 폭풍 같은 노란빛이 그녀와 그녀의 랜스를 감쌌다. 휘몰아치는 빛의 기세는 매서웠다.
불이 선제공격을 위해 두 팔을 들었다. 동시에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메스키트가 튀어 나갔다.
화살처럼 쏘아진 랜스가 모래 폭풍을 이끌고 불의 정중앙을 꿰뚫었다. 바위에 부딪힌 파도 같은 노란빛이 퍼져 나갔고 불은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저게 영혼의 뿌리가 넓어진 메스키트가 사용할 수 있게 된 기술이야. 방어를 버리고 공격에 집중하기 때문에 보통 때보다 피해를 입을 확률이 높아져.”
몇몇 게임에서 그런 효과를 내는 전사 직업의 스킬을 알고 있다. 미칠 ‘광’ 자를 쓰는 광전사라든가…. 버서커라든가….
체력이 낮아지거나 방어가 약해지는 대신 반비례하여 공격력과 스피드가 엄청나게 상승하는 스킬이었지. 묘하게 메스키트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보면 메스키트와 엘더의 스킬은 참 잘 맞았다. 영혼의 인연 때문에 엘더의 버프가 데이지보다 메스키트에게 더 효과가 있다는 소리는 전에 한 번 들었지만, 이렇게 보니 둘의 스킬은 환상의 페어 버금가잖아?
메스키트가 단번에 꿰뚫어 버린 불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민들레 꽃씨는 없었다. 안내가 끝난 것을 보니 군락지 주변의 불은 전부 해치운 것이다.
“음…. 그럼 저도 저렇게 대단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건가요?”
좀 전의 전투에서 공격의 포지션을 양도한 데이지가 물었다. 메스키트의 기술을 보며 조용하더니 생각이 많아서였나 보다.
헉! 어떻게 대답해 줘야 하지? 솔직히 레벨 업 속도가 나와 거의 동일한 수준인 데이지는, 엘더의 말대로라면 두 드라이어드보다 먼저 새로운 기술을 선보여야 했다.
기술의 양상이 달라진 것은 마을 주변의 불을 처치할 때 외에는 없었지.
도움말 없나요? F1번! 가이드 헬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