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604)

정확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기엔 묘했다. 머리가 있고 팔과 다리가 있었다.

눈코입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서 있는 자세도 어정쩡해서 좀… 그래…. 그래! 좀비? 좀비 같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불에 다 녹아 버린, 불에 감싸인 좀비였지만.

휘적휘적 주변을 잿더미로 만들며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게 걷네. 미친, 다윈의 진화설이 불도 적용되나요? 거머리처럼 땅을 기어 다니던 것이 왜 이족보행을 하고 있죠?

“저거 불 맞아? 아니 몸에서 불이 나니까 불이 맞겠지. 그런데 왜 우리처럼 걸어 다녀? 아놔, 생각해 보니 징그럽네. 왜 불이 걸어?”

아니 기분이 나쁘네. 저게 뭔데, 걸어. 님이 뭔데 두 발로 걸어요.

“내 주인, 제이. 세계수의 축복을 받는 테라리움의 근처에선 불의 힘이 억눌러진답니다. 외압 속에서 힘을 유지하기에 가장 최상의 상태를 하는 것이죠. 둥글게 뭉쳐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메스키트가 방패를 들어 올렸고 다들 전투태세를 취했다.

“축복의 힘에서 멀어진 불은 억눌렀던 힘을 마음껏 발산하게 된답니다. 또한 주변의 모든 것을 삼키고 태워서 더 강해지려고 하죠. 더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은 더 강한 것을 모방하려 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해요. 더 강한 것은 으레 주변 생태계의 최강자를 뜻하죠. 이 주변을 다른 드루이드가 정리하고 갔다고 했죠? 운 좋게 살아남은 불 같은데, 저 불이 보기엔 그 드루이드가 더 강한 존재로 보였을 거예요. 그래서 드루이드의 형태를 모방한 거죠.”

징그러워. 설마 그 드루이드가 저렇게 생겼을 리는 없겠지. 따라 한다고 따라 한 게 저런 모습이야? 아주 더 따라 하면 말도 하겠어, 응?

메스키트의 방패에서 흘러나온 모래가 데이지의 발밑으로 흡수됨과 동시에 불이 우리를 발견했다.

허우적거리는 두 팔에서 엄청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주변이 삽시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더운 것 못 참아서 사우나도 못 가는데!

주변이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며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열기가 확 끼쳐 왔다. 숨이 막힐 정도라 겉에 입고 있는 로브라도 벗어 던지고 싶은데 엘더가 막았다. 맨살을 드러내면 화상 입는다고.

어쩔 수 없이 주머니에서 물병을 꺼내 머리 위에 죄다 부었다. 한여름의 땡볕에 장시간 서 있는 기분이었다.

시원한 물이 머리 위부터 흘러내리니 좀 살 만했지만 이것도 잠시였다. 물이 온수처럼 뜨거워졌다…. 시발….

확실히 쪼렙 사냥터에서 만나 왔던 작은 불들과 차원이 달랐다.

메스키트가 괜히 더 멀리 나가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 아니었어. 초반에 다이아를 뿌려 가며 레벨 업 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면 완전 전멸 각이었잖아? 그런데 먼저 와서 저런 놈들을 다 쓸어 간 드루이드는 대체 뭐야?

내 드라이어드들도 어디 가선 꿀리지 않을 텐데 그놈은 대체 어떤 드라이어드들을 데리고 다니는 거야? 아니, 레벨도 나와 몇 배는 차이 나는 것 아냐?

사람 형태의 불은 갑자기 두 팔을 휙휙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저 미친 것이 대체 뭘 하나 엘더의 방어막에 숨어서 지켜보는데, 꼭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검 같은 무기를 휘두르는 느낌 같기도 하고.

문제는 저것이 팔을 휘두를 때마다 엄청난 불길이 휙휙 우리 쪽을 강타해 온다는 것이었다. 아씨, 대체 어디서 저런 걸 보고 따라 하는 거야!

메스키트가 선두에 서서 방패로 한 번 거르고, 반지에서 붉은빛이 흘러나오는 엘더의 방어막이 두 번 거르니까 직접적인 피해는 없는데 너무 더웠다.

미친, 생각해 보니까 열받네? 여긴 겨우 초보자 사냥터를 지나서 마주한 두 번째 사냥터잖아? 쪼렙 사냥터 바로 다음 단계라고! 그런데 난이도가 이렇게 훌쩍 뛰는 법이 어딨냐?

이게 게임이었으면 미친 밸런스로 유저들한테 항의 받았다고! 모 게임의 불지옥 난이도가 떠오르는데! 이걸 3일 밤낮을 지새우며 깨야 하나요?

방패와 함께 몸을 뒤로 물렸던 메스키트가 랜스를 앞으로 세우고 별안간 쏘아지듯 뛰쳐나갔다.

부웅, 하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날아오는 불길이 기세에 밀려 양옆으로 갈라졌다. 탄환처럼 날아간 랜스 끝이 사람 형태 불의 복부에 정통으로 꽂히며 불이 터져 버렸다.

펑! 하고 불의 머리와 사지가 다섯 갈래로 튀어 나갔다. 저게 사람이었으면 정말 못 볼 꼴 봤을 거야. 상상하니 끔찍해서 눈을 찡그렸다.

아쉽게도 원 킬은 아니었다. 하지만 깔끔하게 5개로 나눠진 불덩이는 좀 전과 같이 엄청난 기세를 보이기엔 무리가 있을 정도로 작아졌다.

데이지가 재빠르게 마무리를 하러 뛰어나갔고 엘더가 그에 맞춰 버프를 주기 위해 스태프를 휘둘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사실 뭣도 모르는 내가 무언가 이상하단 걸 알아차릴 만큼 기민하진 않다.

이건 감이었다. 정확히는 메스키트와 굳게 연결된 영혼을 통해 느낀 순간적인 감이었다. 데이지가 지금 나서선 안 된다.

“데이지, 돌아와!”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사람이 내 말을 듣고 단번에 멈춰 서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데이지는 순간적으로 팔에서 줄기를 뿜어내 땅에 박았고 드드득, 하고 땅을 긁는 소리를 내며 반동으로 멈춰 섰다.

고무줄처럼 우리 쪽으로 좀 튕겨 오긴 했지만 어쨌든 멈췄다.

그리고 내 감은, 아니 나와 굳게 연결된 메스키트의 직감은 정확했다. 모처럼 쉽게 공략하나 했는데 불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메스키트의 방패가 땅에 꽂히고 정면에 거대한 모래 벽이 생겨남과 동시에, 5개의 불들이 일제히 무언가를 뿜어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가루 같은 것이었다.

봄날의 꽃들이 뿜어내는 꽃가루 같기도 했고, 반짝이 가루를 엎질렀을 때 허공에 흩날리는 기분 나쁜 것들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볼 때가 꼭 이런 느낌이었다.

모래 벽은 견고해 보였지만 네 면이 완전히 둘러싸인 것은 아니라 자칫하다간 메스키트가 저 이상한 공격에 휘말릴 가능성이 컸다.

내 행동은 거의 본능적이었다. 생각을 한 번 거친 것이 아니라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메스키트와 영혼이 단단히 연결되었을 때, 우린 서로의 생각을 거의 동시에 공유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일전에 말했던 나의 뜻이 곧 메인 드라이어드의 뜻, 메인 드라이어드의 뜻이 곧 나의 뜻이란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메스키트와의 연결을 끊고 데이지와 이었다. 준비 단계가 필요 없었다. 그저 내가 하고자 하는 것에 모든 것이 뜻대로 움직였다.

나와 영혼이 연결된 데이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내 생각을 공유한 데이지는 줄기를 뻗어 메스키트의 허리를 감쌌다.

작은 데이지의 힘은 메스키트에게 비할 바 되지 못하지만 팀의 공격력 증가 버프와 눈치 빠르게 땅에서 살짝 도약해 준 메스키트 덕분에 모든 것이 뜻대로 되었다.

데이지가 줄기를 잡아당겼고 메스키트는 거기에 이끌려 빠르게 그곳에서 벗어났다. 엘더가 메스키트의 앞에 방어막을 두르고 내가 다시 메스키트와 연결을 하여 팀의 방어 버프를 받는 그사이, 간발의 차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분진 폭발, 화학 공장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화재에 의한 폭발. 눈앞에서 폭탄이 크게 터진 것처럼 순식간에 검은 연기가 우릴 덮쳤다.

엘더가 큰 손으로 내 코와 입을 막고 황급히 뒤로 몸을 던졌다. 엄청난 소리에 고막이 터지는 줄 알았다.

메스키트의 모래 방어벽은 폭발에 휘말려 큰 파편으로 쪼개져 도리어 우리에게 쏟아졌다. 엘더의 방어막을 맞고 튕겨 나갔지만 사방에서 덮쳐 오는 연기는 막지 못했다.

위태로운 방어막이 붉게 반짝반짝 빛이 났다. 엘더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의 색과 같은 것이었다.

지금의 피해는 엘더가 전투 보너스를 끌어내면서까지 힘을 쓰지 않으면 막지 못할 만큼 강력했던 것이다.

숨도 막히고 뜨겁고, 정말 뒈질 것 같은 순간에 갑자기 가슴속에 상쾌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와중에 멍청한 불 중 하나가 폭발에 휘말린 메스키트의 모래 벽을 맞고 퇴치된 모양이었다. 그래서 레벨 업을 한 것이고.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내가 레벨 업을 하면 내 드라이어드들도 영향을 받는다. 내 피로감이 회복되듯 드라이어드들의 피로도 회복된다.

전투로 인한 외상은 그대로지만, 몸의 기운만큼은 전투 시작 전으로 초기화되었다.

연기 속에서 파티는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엘더와 함께 있었지만 메스키트와 데이지의 위치는 확인할 수 없었다.

검은 연기가 자욱했다. 엘더의 손이 호흡기라도 되는 것처럼 붙들고 매워서 눈물이 펑펑 흐르는 눈을 가늘게 떠서 주변을 살폈다.

때마침 거대한 바람과 함께 랜스가 연기를 갈랐고 그곳에서 인형이 드러났다.

여기저기 그을린 자국이 남은 메스키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방패는 노란빛으로 감싸여 크기가 배는 커져 있었다.

다행히 데이지도 메스키트의 보호 속에 무사해 보였다. 여기저기 타들어 간 안타까운 상처들이 보였지만 지친 기색은 아니었다.

엘더가 스태프를 땅에 꽂자 그 주위로부터 하얀 꽃잎이 휘날리는 원이 파도처럼 크게 퍼져 나갔다.

빛은 소복하게 쌓인 첫눈처럼 드라이어드들에게 닿았다가 금세 녹아내렸다. 매번 단일 힐링만 넣는 걸 봤는데, 전체 힐링은 처음 봤다.

“힘을 흡수했군.”

메스키트가 이를 아득 갈며 불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호박색 눈은 분노로 인해 불보다 더욱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멀리 도깨비불처럼 아롱거리는 4개의 불이 보였다. 하지만 힘을 흡수한 것치곤 크기가 변함없어 보이는데?

“크기가 작아지면 방금과 같은 공격을 또 쓸 수도 있어요. 한 번에 처치할 수 있나요?”

“네!”

메스키트의 말에 데이지가 양손에 단도를 꼭 쥐고 소리쳐 대답했다.

“제가 직선으로 선 둘을 맡겠어요. 나머지 둘을 맡겨도 되겠죠?”

“문제없어요!”

메스키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랜스를 들자 방패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준비 자세를 취한 데이지를 향해 엘더가 스태프를 휘둘렀다.

뿜어져 나가는 빛의 형태와 회오리치는 꽃잎들의 모습은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엘더가 데이지를 찾으려 뿌리를 내리는 메스키트에게 썼던 버프였다. 엘더의 특성을 이용한 행운을 증가해 주는 버프.

“치명타를 노려야 해요. 정중앙. 공격을 받고 바로 사라져 버릴 수 있도록!”

“네!”

두 드라이어드가 불을 향해 무기를 겨눴을 때, 애석하게도 또 한 번 불이 움찔 몸을 털었다.

치사하게 썼던 필살기 또 쓰는 법 있나요? 네놈들은 쿨타임도 없냐? 분진이 뿜어져 나오려 할 때 엘더가 갑자기 손을 뻗었다.

불의 주위에서 엘더 플라워의 모체 꽃가지가 튀어나왔다. 휘날리는 하얀 꽃잎들이 분진들에 달라붙어 덩어리가 되기 시작했다.

“실패하면 내 모체까지 흡수해서 불의 힘이 커질 거야. 분진은 막을 테니 단번에 끝내!”

엘더의 말에 두 드라이어드가 동시에 뛰어나갔다. 총알처럼 쏘아져 나간 메스키트의 랜스가 직선에 선 두 불을 동시에 꿰뚫어 단숨에 터뜨려 버렸다.

엘더의 쿨타임 긴 행운 버프를 받은 데이지는 단도를 던져 정확히 양옆에 있는 불의 중앙에 꽂으며 마지막을 장식했다.

레벨이 단숨에 올랐다. 마을 근처에서 불을 처음 잡았을 때처럼 연이어 상쾌한 기분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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