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이 탐나긴 해도 몬스터들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만족이었다. 이 민들레 포레스트의 왕이나 되는 드라이어드니까 보상은 엄청 좋겠지. 원래 게임에서 왕이 주는 보상이 제일 좋았어. 알아서 잘 챙겨 주실 거야.
얼른 가자고 보채는 날 메스키트가 진정시켰다. 그러면서 저번처럼 다이아로 불의 몸을 불리는 건 자제하자고 했다.
여기 민들레 군락지는 불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입는 곳. 생각을 아예 안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도 혹시나 더 피해를 입히고 싶지는 않았기에 메스키트의 말처럼 자제하기로 결심했다.
불의 위치를 알려 주는 방법은 신기했다. 게임처럼 미니맵이 있고 몬스터의 위치에 핑이 쏙쏙 박혀 있거나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단델리온이 보낸 하얀 꽃씨들을 쫓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사방으로 퍼지는 꽃씨 뭉텅이들의 수는 꽤 되어서, 내가 구태여 몸 불리기 편법을 쓰지 않아도 될 것으로 보였다.
“드루이드님, 괜찮으시다면 이 데이지 묘목 아이와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엥? 데이지는 왜요?”
스태프로 데이지만 콕 집어 가리키는 단델리온에 다들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혹시 작아서 다른 민들레 아이들과 동질감이 느껴졌다거나…. 얘가 작기는 해도 원래는 컸던 앤데. 데이지도 자신을 지목한 단델리온 때문에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저희는 나가 있을까요?”
메스키트가 엘더와 자신을 묶어 물었다. 단델리온은 그렇게 해 주면 많은 배려가 될 것이라고 답했다. 엘더는 불만스러운 표정이 되었지만 메스키트의 눈짓에 군말 없이 군락지의 중심을 나갔다. 저도 나가야 되나요?
“함께 있으셔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편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겠네요.”
큰일이 생길 리는 없지만 데이지가 걱정되어 슬쩍 나가기 싫은 눈치를 했다. 그러자 다행히도 안 쫓겨났다.
데이지는 민들레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메스키트에게 정신이 팔려 졸졸 쫓아가던 아이들도 다시 돌아올 정도였다. “너도 나처럼 작은데 굉장히 강하구나.” 하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말을 들어보면 그 이유가 이해가 되었다.
“혹시 따로 부탁할 일이 있으신가요?”
“그건 아니랍니다. 그저 정말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에요.”
데이지는 단델리온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나는 근처 평평한 바위에 털썩 앉았다. 뭘까? 왜 데이지만 남긴 걸까?
“보통은 성장이 어느 정도 된 상태에서 드루이드님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당신은 우리처럼 야생 출신 드라이어드인가요?”
앗 잠깐! 그건 데이지의 아픈 과거인데!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오다니. 말려야 하나? 황급히 데이지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걱정과 다르게 덤덤해 보였다.
“아뇨! 저는 열매에서 개화한 드라이어드가 맞아요. 개화 후 세계수와 오래 떨어져 있어서 그래요. 힘을 잃고 작아졌거든요!”
아이의 대답은 쾌활했다.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다.
나는 항상 데이지의 과거를 건드릴 만한 이야기가 나오면 혼자 전전긍긍했다. 아이가 아팠던 상처를 떠올리고 시무룩할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지는 여태껏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언제 그런 과거가 있었냐는 듯이 매 순간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를 보였다.
아이는 이미 이겨 낸 후인데 나만 주책없이 끙끙대는 걸까….
“학대를 받은 건가요?”
단델리온의 시선이 슬쩍 내게 향하려던 것을, 데이지가 황급히 소리치며 내 앞을 막아 시선을 차단했다.
“드루이드님은 그런 분이 아니에요! 오히려 제게 은인이세요!”
작은 아이의 필사적인 몸짓에 가슴이 울컥했다. 우리 애가 나를 지켜 주려고….
“오해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당신과 드루이드님의 교감은 겉으로 보기에도 아주 좋았어요. 다만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의 관계는 아주 밀접한 것. 원인에 어떻게든 얽혀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와 영혼의 연결을 끊었던 것은 다른 드루이드였어요. 고통 속에서 저를 구해 주신 건 제이 님이에요.”
“그랬군요. 역시 연결이 좋지 못하게 끊겼었군요. 그래서 묘목 상태가 되었다라….”
“지금은 작지만 쑥쑥 자랄 거예요!”
데이지가 당당히 포부를 밝혔다. 그럼, 그럼. 우리 데이지는 앞으로 쑥쑥 클 날만 남았지.
“그럼… 드루이드님과 함께 다니는 다른 두 드라이어드들이 결코 예사로운 자들이 아닌데, 혹시 열등감을 느끼거나 하진 않나요?”
앗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 직설적이신 분이네. 연타로 팩트 폭격을 하시면 데이지가 아니라 제 뼈가 더 아픈데요.
데이지는 등급 우월주의 엘더를 겪고 있으니까 어느 정도 멘탈이 단단하지 않으려나. 그러고 보니 살짝 데이지의 속마음이 궁금하기도 했다.
메스키트는 26번째 테라리움 과수원에서 10년 만에 나왔다는 스페셜 등급이고, 엘더는 등장하자마자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던 유니크 등급이었다.
반면 데이지는 좋지 못한 취급을 받은 노멀 등급.
나는 등급이야 좋으면 좋은 거고 그렇지 못한다면 다이아 길을 깔아서라도 최선을 다해 육성할 생각이었기에 상관없지만, 정작 데이지는 둘을 보고 혹시 열등감 같은 걸 느끼지 않을까?
“전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제 드루이드님의 곁을 강한 드라이어드들이 지키고 있으니 기뻐요. 저도 빨리 더 강해지고 싶을 뿐이에요. 두 분께 배울 점도 많은걸요! 물론 지금은 제가 다른 드라이어드들에 비해 약할지는 몰라요. 하지만 전 아직 다 자라지 않았을 뿐이에요.”
“맞아! 데이지! 더 클 거야!”
야광봉이 있다면 흔들고 싶다. 빨간색으로. 나는 너의 생각을 지지하는 넘버원 팬! 기특한 생각을 하는 마음은 벌써 다 컸네!
데이지의 대답에 단델리온은 화사하게 웃었다. 꽃들이 웃으면 주위에 꽃이 피는 건가. 이것은 환각인가? 가슴이 절절할 정도로 아름다운 웃음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당신도 왕이 될 수 있을 거예요. 포레스트의 왕. 그 마음이면 같은 종의 드라이어드들을 다스리는 우성종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의 강한 마음은 분명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 거랍니다.”
메스키트가 나비를 얻으면 동류의 드라이어드들을 찾아내어 굴복시키고 포레스트를 만들 수 있다고 했지.
물론 데이지에게 우선적으로 나비를 붙여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연 발생 확률도 높고 얼른 강하게 키워 줄 마음으로 가득했으니까.
단델리온의 말에 데이지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제가 당신과 같은 왕이 될 수 있나요?”
나는 단델리온과 같이 포레스트의 왕이 된 데이지를 상상해 보았다. 저렇게 우아하고 강인해 보이는 왕이 된 데이지라…. 작고 귀여운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겠지.
다 자란 자식을 떠올리면 섭섭하지만 그래도 대성한 자식을 보면 흐뭇한 것이… 이것이 부모의 마음인가? 갑자기 눈물이 좀 날 것 같은데.
“저는 처음 태어났을 때 다른 민들레 묘목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답니다. 작고 약했죠. 그저 단 하나 다른 점이, 그릇이 좀 더 컸을 뿐이었답니다. 다른 드라이어드들의 영혼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그릇이 컸을 뿐이에요.”
“당신도 저처럼 작았다고요? 여기 이 드라이어드들처럼요?”
데이지가 의아함을 느끼는 것처럼 나도 좀처럼 단델리온의 작은 모습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단델리온은 처음부터 왕이었을 것 같았는데. 처음부터 크고 고고한 모습으로 태어났을 줄 알았는데.
“네, 그렇답니다. 저도 여기 이 아이처럼 작았어요. 사용할 수 있는 힘도 없었지요. 안전하게 군락지의 중심에 머물며 때가 되면 물을 마시고 햇빛을 받고 뛰어노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같은 묘목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모험심을 발휘하여 군락지 밖을 나가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밤이슬을 맞아 몸을 떨며 돌아오고…. 보통의 다른 묘목 드라이어드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어요.”
단델리온은 자신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민들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태어나는 민들레 드라이어드의 수가 많아지고 군락지가 위협을 받게 되며 무리의 중심이 필요하게 되었답니다. 더 이상 평화롭게 하루를 보낼 수가 없게 된 것이지요. 다 같이 작은 드라이어드들 속에서 좀 더 영혼의 그릇이 큰 제가 우성종으로 선정이 되었어요. 영혼을 하나둘 의탁받으니 새로운 힘이 생겼고, 그 힘을 군락지를 지키는 곳에 쓰다 보니 영혼의 그릇이 더 커지게 되었죠.”
단델리온은 자신의 스태프와 등 뒤의 날개, 그리고 머리 위의 화관을 차례차례 우리가 더 잘 볼 수 있도록 했다.
“영혼의 그릇이 커지다 보니 몸이 훌쩍 자라게 되었어요. 힘이 강해지다 보니 제 힘을 수용하기 위한 무기도 더욱 크고 정교해지게 되었습니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화관과 특별함을 상징하는 날개도 돋았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언젠간 이렇게 될 수 있어요.”
데이지에게 꿈이 생긴 것 같았다. 단델리온을 보며 몽롱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왕이 되면 많은 영혼을 의탁받는 것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생기게 된답니다. 영혼을 의탁한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모두 하나의 드라이어드에게 넘겨준다는 뜻이지요. 하나의 민들레 드라이어드는 작고 약하지만 여럿이 모이면 강하고 특별한 힘이 될 수 있답니다. 그렇기에 강해진 몸으로 다른 드라이어드들을 위해 힘을 사용해야 하죠.”
“듣기만 해도 엄청 대단해요…!”
“데이지 종은 우리 민들레와 다를 바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분명 세계수의 축복을 받고 태어나는 드라이어드들이 곳곳에 많이 분포하고 있을 거예요. 금방 포레스트를 만들 수 있을 거랍니다. 당신이 할 일은 자신이 우성종임을 증명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지면 되는 거예요. 여기 민들레 드라이어드들 사이에선 단지 제가 영혼의 그릇이 컸을 뿐이지만, 밖의 데이지 드라이어드들은 사정이 또 다를 수 있으니까요.”
좋은 조언이 되었다. 포레스트에서 왕이 되면 강해지는 것은 알았지만 정확히 다른 드라이어드의 영혼까지 흡수해서 강해지는 것이었구나. 확실히 드라이어드 하나보단 둘이 더 강하겠지.
데이지뿐만 아니라 나도 성장해야만 했다. 여기 민들레들은 야생에 포레스트를 형성했지만, 데이지의 경우엔 내 테라리움 아티팩트 안에 포레스트를 만들어야 하니까.
많은 드라이어드들과 영혼을 연결하려면 그만큼 내 영혼의 한계, 즉 레벨도 높아져야 했다. 레벨 업을 해야 돼!
“이곳을 떠난 후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는, 왕이 된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단델리온은 그렇게 마무리 지으며 이야기를 끝냈다. 데이지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데이지 가자! 얼른 불을 쓸어버리고 경험치를 주워 담아야지!”
데이지의 손을 잡아끌고 군락지의 밖을 향해 나갔다.
물론 올 때처럼 꽃들을 밟지 않게 조심조심. 꽃씨들이 자신들을 따라오라는 듯 내 눈앞에서 하늘하늘 춤을 췄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던 메스키트가 웃으며 우리를 반겼다.
“좋은 이야기를 나눴나요?”
“응! 도움이 많이 되었어!”
메스키트를 메인으로 두는 것에 변함은 없었다. 아직 마을과 멀어진 불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으니까.
멀리 퍼지는 꽃씨들 중 가장 근처의 것들을 따라갔다. 살랑살랑 날아가던 것들이 어느 순간 비라도 맞은 것처럼 축 처져서 떨어져 내렸다.
우수수 떨어지는 꽃씨들의 너머로 여태 봐왔던 불과 다른 모습을 한 불이 존재하고 있었다.
슬라임처럼 뭉글뭉글 기분 나쁘게 꿈틀대던 형태가 아닌, 저것은 꼭… 사람 같은 형태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