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604)

우린 단델리온에게 군락지의 중심으로 초대를 받았다.

드라이어드들이 실질적으로 생활하는 심장부와 같은 곳이라고 했다. 가는 길이 급하지 않다면 오랜만에 만난 드루이드와 잠시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정중히 부탁했다.

너무 극진한 대접이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사실 나와 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군락지의 중심이라는 곳도 모두 궁금하기도 하고….

단델리온이 손짓을 하자 그 주위로 옹기종기 모여 우리를 경계하던 어린 드라이어드들이 확 풀어졌다. 서로의 사이에 알게 모르게 존재하던 벽과 거리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이들은 내 드라이어드들을 향해 우르르 뛰어왔다. 몇 명은 한없이 높은 메스키트를 허리를 젖혀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보았고, 몇 명은 자신들과 비슷한 크기의 데이지에게는 친근하게 다가갔다.

내게도 아이 둘이 붙었는데 엘더 주위는 황량했다. 애들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엘더가 얼마나 까칠한 인성의 소유자인지. 엘더는 예뻤지만 성격은 더럽다는 걸 녹색의 찌푸린 두 눈이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어린 드라이어드들은 재잘재잘 자신의 왕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자랑했다. 그리고 태어나서 다른 드라이어드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며 무슨 힘을 사용할 수 있는지,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했다.

내 곁에 붙은 둘은 자신들의 왕이 극진히 대한 내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느끼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이 중에서 가장 평범했으며 가진 거라곤 다이아뿐인 어른이라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애들 앞에서 돈 자랑을 할 수도 없고.

데이지는 불도 잡을 수 있냐는 아이들의 질문에 빨개진 볼을 하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뭘로 잡았냐는 질문에 허리춤의 단도를 슬쩍 보여 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호의의 눈빛을 굉장히 낯설어하는 것 같았다.

작은 꽃들이 한데 모여 있어…. 조그맣고 사랑스러운 꽃들이…. 힐링된다.

군락지의 중심으로 향할수록 좀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민들레꽃이 만발했다. 꽃을 밟을까 두려워 신발을 벗어야 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민들레 드라이어드들 앞에서 모체인 꽃을 밟으면 좀 그렇지 않을까? 그런데 내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들은 발랄하게 자신들의 모체를 밟고 다녔다.

민들레꽃들은 밟혀서 푹 찌그러졌다가도 다시 활짝 얼굴을 내밀었다.

아이들이라 가벼우니까 괜찮은 걸지도 몰라. 나는 좀 무게가 있으니까…. 푹 찌그러지면 그날로 내가 밟은 민들레꽃의 운명은 다한 것이 아닐까…? 살꽃마…?

빈 곳에만 발을 디디려고 노력해도, 정말 사방이 빼곡하게 노란 꽃으로 가득 차 있어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주춤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의도를 눈치챈 단델리온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민들레는 밟혀도 다시 피어나는 존재,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꽃들이랍니다. 애초에 관상에 가치를 둔 꽃들도 아니고 하물며 신경 써서 가꿔야 하는 꽃들도 아니랍니다. 우린 꽃씨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필 수 있고 따뜻한 햇빛과 조금의 물만 있으면 일생을 견뎌 낼 수 있죠. 그렇기에 모양이 조금 찌그러진다고 해도 우리들의 가치가 손상되진 않으니 안심하셔도 된답니다.”

그렇게 말해 줘도 막상 밟으려니 좀 망설여지는데. 제가 그쪽으로 갈 때까지 딴 데 보고 있어 주면 안 될까요?

그런데 내 꼴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던 엘더가 나 대신 성큼성큼 앞서갔다.

저 큰 덩치로 민들레꽃을 다 짓이겨 밟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아주 폭군이나 다름없었다. 저, 저 감정이 메마른 꽃나무!

“드라이어드를 직접 밟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해? 손이라도 잡아 줘?”

됐다, 됐어. 내가 알아서 한다. 이미 엘더가 양껏 밟은 꽃을 또 밟는 사태만 피하도록 최대한 발끝을 세워서 걸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생쇼를 하고 있는 동안 이미 내 드라이어드들은 전부 단델리온의 근처까지 도착한 후였다. 조금 민망해지는군요….

군락지의 중심엔 작은 옹달샘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하며 깊이도 아주 깊어서 비가 내리지 않아도 마르는 일이 없다고 했다. 그 주위를 민들레꽃들이 살뜰히 에워싸고 있었다.

“원래는 이 군락지가 훨씬 넓었답니다. 여러분께서 걸어오신 그 길도 한때는 군락지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죠. 과거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민들레꽃이 가득 피어 있었답니다.”

단델리온은 스태프를 높이 들어 올렸다. 스태프의 끝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른, 하얀 꽃씨를 닮은 안개가 빠르게 군락지에 퍼지기 시작했다.

“불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군락지의 크기도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태어나는 민들레 드라이어드들도 줄어들고 있죠. 아마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에는 더 좁아져 있을지도 모른답니다.”

나는 단델리온의 말에 지평선까지 가득 핀 민들레 꽃밭을 상상하다가 화들짝 깨어났다.

그놈의 불! 여기도 저기도 불! 악의 근원 불! 오면서 봤던 민들레 꽃밭도 넓었는데 원래는 더 넓었다니. 거기다 좁아지고 있는 상태라니.

“저는 전투에 특화된 드라이어드가 아니다 보니 제 힘을 써서 군락지를 숨기는 것밖에 할 수 없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태어나는 드라이어드의 수도 줄고 세계수의 축복도 이젠 많이 옅어져서… 제 힘도 점점 약해지고 있기에 가릴 수 있는 범위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단델리온은 암울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도 무척이나 초연한 얼굴을 했다. 꼿꼿이 세운 등에도 전혀 두려움 따위는 없어 보였다.

“그 뜻은 제가 세계수가 내린 의무를 다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모든 의무를 끝마치고 드디어 세계수의 품으로 갈 수 있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이곳에서 더 이상 새로운 드라이어드가 태어나지 않고, 마지막 남은 드라이어드까지 세계수의 품으로 올려 보내면 비로소 제 차례가 오는 겁니다.”

모든 드라이어드는 생명이 다하면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간다. 하물며 세계수의 열매에서 개화한 드라이어드가 아닐지라도.

세계수의 꽃가루를 받고 태어난 야생의 드라이어드도 세계수에게 가게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죽는다는 것은 분명 모든 생명이 있는 존재들에게 두려운 일일 텐데. 왜 단델리온은 무척이나 그걸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까?

고고한 왕과 같은 단델리온이었지만 어쩐지 그 속은 조금 지쳐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이곳의 모든 드라이어드들이 세계수의 품으로 가기 전, 제 힘이 모두 끝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내 한결같은 표정을 유지하던 단델리온에게 조금의 두려움이 나타났다.

음, 혹시 날 이곳으로 불러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이유가 바로 저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드루이드는 존재 자체로 작은 세계수가 될 수 있는, 드라이어드들의 영혼의 안식처라고 했으니까.

나와 영혼의 연결을 맺으면 힘이 점점 약해져 가는 단델리온도 괜찮아지지 않을까?

“그… 그럼 전 드루이드잖아요? 작은 세계수라고 불리는…. 그럼 제가… 어… 당신을 거둘까요?”

하지만 내 말에 단델리온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잘못 짚었나?

“배려가 가득하신 분이시군요. 말씀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곳의 단 하나의 드라이어드도 내버려 둘 수 없어요. 분명 세계수의 안배를 받는 드라이어드는 무척이나 안정된 상태가 되겠죠. 많은 야생의 드라이어드들이 이를 꿈꾸고 있을 거예요. 그러나 저는 민들레 포레스트의 왕이 되는 자. 홀로 떠날 수는 없답니다.”

“그 말은 여기 있는 모든 드라이어드들과 영혼을 연결…?”

상상해 보니 조금 아찔한데.

“내 주인, 제이. 그건 불가능한 일이란 걸 알고 계시죠? 분명 제이의 영혼의 한계는 아주 커졌답니다. 아마 불과의 수많은 전투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여기 있는 민들레 아이들의 영혼의 크기가 아무리 작다하더라도 제이의 영혼은 이 모두를 수용할 수 없어요. 이건 제이가 하겠다고 마음먹어도 제가 말릴 거랍니다. 제이는 쓰러질 거예요.”

메스키트의 표정은 나를 달래는 것처럼 인자한 웃음을 짓다가 점점 아주 단호해졌다. 정말 내가 여기 있는 민들레 드라이어드를 모두 거두겠다고 선언하면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저도 마냥 꿈속에 살고 있는 애가 아니라서 불가능하단 것쯤은 알고 있는데요….

“전 힘을 모두 잃어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랍니다. 제가 의무를 다 끝내지 못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죠. 모든 야생의 드라이어드는 때가 되면 세계수의 품으로 가는 것이 당연한 순리랍니다. 작은 세계수를 만나 이번 생을 연장하는 것은 그저 매우 특별한 일일 뿐이에요.”

“그럼 제가 뭐 도와드릴 건 없나요?”

영혼을 좀 똑 떼어 준다거나. 개화한 드라이어드와 영혼을 끊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런데 그건 어떻게 하는 거지?

앗, 갑자기 단델리온이 환하게 웃었다. 아 본론이 이거였군! 나와 이야기하고 싶었던 이유가 곧 나올 말임을 눈치챘다.

“어젯밤 누군가가 이 주위의 불을 모두 처치하고 가셨어요. 분명 실력이 있는 드루이드님이시겠죠. 만나 뵙고 감사의 인사라도 전하고 싶었지만 금세 사라져 버리셨답니다. 군락지를 야금야금 삼켜가는 불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던 차에 저희에겐 너무나도 고마운 은인이지요. 하지만 아직도 채 꺼지지 않은 불들이 존재한답니다.”

아, 어제 내 사냥터 다 쓸고 간 사람을 말하는 거군. 내 경험치 다 털어간 정 없는 사람.

“제가 군락지를 모두 덮는 안개의 주술을 쓸수록 힘은 더 빠르게 소모된답니다. 드루이드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제가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힘을 좀 더 비축할 수 있을 거예요. 부디 도와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사례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아직 불이 활개치고 다니는 위치를 알려 주었다.

친절하게 퀘스트 몹의 위치도 찍어 주시다니. 보상도 주고! 이것은 서브 퀘스트!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지!

“할게요!”

나는 행여나 무를세라 황급히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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