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604)

군데군데 탄 것처럼 빈 자국이 있었지만 길게 자란 풀들이 사뿐히 상처를 가려 주고 있었다.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까 새삼 주위가 한 폭의 풍경화같이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녹색 캔버스에 톡톡 떨어진 노란 물감이 어두웠던 내 마음을 사르르 풀어 버렸다.

아침에 뜨는 별처럼, 노란 꽃송이들이 가는 길을 즐거움으로 비춰 주고 있었다.

다이내믹한 일이 왜 없겠어. 내가 가는 지금 이 길의 모든 것이 내 삶의 이벤트 같은 것이었다.

확실히 내가 살던 서울에선 애써 공원 같은 곳을 찾아가지 않는 한 이런 아름다운 풍경은 보기 힘들지.

하늘은 파랗게 맑고 하얀 솜털 같은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공기는 무척이나 상쾌했다. 미세먼지 때문에 입과 코를 막으려 전전긍긍했던 날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맘껏 숨을 들이마시며 녹음의 풀냄새와 향긋한 꽃향기를 폐에 가득 채웠다. 흡연으로 오염됐던 폐마저 깨끗하게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멀리서 잔잔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가뿐하게 어루만졌다. 그 바람을 타고 하얀 꽃씨들이 실려 왔다.

풀밭에 핀 노란 꽃들도 이 꽃씨들도 익숙한 것이었다. 어느 곳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민들레였다. 회색 가득 황량한 곳에서도 봄이 왔음을 알려 주는 반가운 꽃이었다.

“민들레꽃 군락지로 들어온 것 같아.”

엘더가 제 옷에 붙는 하얀 솜털을 털어 내며 불퉁하게 말했다. 메스키트가 잠시 걸음을 멈춰 섰다. 그녀의 커다란 그림자만 졸졸 따라가던 우리도 덩달아 멈춰 섰다.

“운이 좋다면 야생 드라이어드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맑은 기운이 충만해요. 내 주인, 제이. 야생의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를 본 적 있나요?”

“아니, 본 적 없을걸? 아마 열매에서 개화한 드라이어드만 본 것 같은데.”

혹시 야생이란 말에 반응을 보일까 싶어 슬쩍 데이지의 눈치를 봤다. 걱정과 다르게 아이는 오히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메스키트의 말에 무척이나 기대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는 보기 힘든 거야?”

“필드 발생 확률이 높다고 해도 애초에 드라이어드가 자연적으로 태어날 확률이 매우 낮답니다. 야생의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는 세계수가 널리 퍼뜨린 축복의 꽃가루를 받고 태어나지요. 하지만 꽃가루에 닿는 모든 식물들이 드라이어드가 되는 것은 아니랍니다. 그 그릇이 되는 조건을 만족하는 아주 특별한 모체여야만 하죠. 한마디로 선택받은 모체가 우연히 세계수의 꽃가루를 만나야 드라이어드가 될 수 있답니다.”

듬성듬성 고개를 내밀고 있던 민들레꽃이 어느새 풀밭을 노랗게 가득 메우고 있었다. 메스키트는 주변을 돌아보며 마저 이야기를 이었다.

“여긴 테라리움이 제법 인접한 지역이니 꽃가루의 영향을 받을 테고, 군락지이다 보니 특별한 모체가 있을 확률이 아주 높아요. 운이 좋다면 민들레꽃 드라이어드를 볼 수 있을 거예요.”

오, 갑자기 설레기 시작했다. 민들레꽃 드라이어드는 어떻게 생겼을까? 작은 꽃잎이 노랗고 촘촘히 피어 있으니 데이지처럼 무척 사랑스럽게 생긴 드라이어드가 아닐까?

어쩐지 흩날려오는 하얀 꽃씨의 수가 많아진 것 같다. 덩달아 옷을 털어 내는 엘더의 얼굴에도 점점 짜증이 보이기 시작했다. 데이지는 제 머리에 붙은 꽃씨를 떼어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데이지의 빨간 머리에 유독 대조되는 하얀 꽃씨들을 보고, 아이가 꼭 털갈이하는 하얀 고양이 털을 잔뜩 뒤집어쓴 것 같아서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메스키트가 손을 들어 작은 꽃씨를 손에 가두고 어느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어쩌면 저쪽에서 먼저 우리를 보러 올지도 모르겠네요. 이 꽃씨들은 침입자를 감별해 내기 위해 정찰용으로 보낸 거예요. 자신들의 군락지에 온 자들이 반가운 손님일지 아니면 꽃밭을 망치러 온 불청객일지 가늠하는 거겠죠.”

헉… 이 솜털 같은 꽃씨들이 정찰용이었어?

메스키트의 말이 맞다면 모체의 능력을 십분 활용한 유능한 드라이어드일 것이다. 생각이 바뀌었다.

야생이니까 말 그대로 와일드한 드라이어드가 나타나면 어떡하지? 우리를 침입자로 생각한다면 좀 위험한 상황이 될 것 같은데.

긴장되는 마음을 안고 메스키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한 무더기의 노란 꽃들이 너울너울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봤자 민들레는 내가 알기론 노멀 등급이야.”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엘더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 저 등급 우월주의. 아주 고귀하신 유니크 등급이라고 기고만장해서는! 물론 카드 게임에서 등급이 중요할 순 있지! 날 때부터 타고난, 다 만들어진 카드니까.

굳이 육성하지 않아도 출전 즉시 효과를 보이기도 하고. 뽑기에서 높은 등급 나오면 기분이 째지긴 해! 스페셜 메스키트가 떴을 땐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던 적도 있고!

하지만 데이지가 나의 소중한 드라이어드가 된 이후로 태생보다 중요한 것은 성장 환경이라고 마음을 바꾸었다.

넘치는 다이아로 다져진 엘리트 코스를 밟으면 등급을 넘어선 엄청난 능력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등급으로 한계를 단정 짓고 무시하는 건 나만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건 이제 내 가치관을 위협하는 일이 될 것이다.

예전에 했던 게임에선 뒤에서 두 번째로 높은 등급 카드가 모든 유저들이 다 사용하는 필수 카드, 국민 덱으로 자리매김했었다. 보통은 버려지기 쉬운 등급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건으로 게임 전문 사이트를 뜨겁게 달군 적도 있었다. 덕분에 무과금 유저들에게 엄청난 호평을 받았었지.

선례가 있는데 이 <테라리움 어드벤처>도 어쩌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아직 미래는 모를 일이잖아?

물론 안 되면 되게 할 것이다. 난 그럴 만한 능력이 충분하다 못해 넘치니까! 다이아가 넘치지! 성장에 아낌없이 투자해서 노멀 등급이 좋지 않다는 편견을 다 깨부숴 줄 거다!

내가 드라이어드들을 핸드폰 화면 너머로 만났으면 이런 생각 따윈 그저 게임 공략쯤으로 치부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게임 속 세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직접 교감하는 드라이어드들을 보면 마냥 그럴 수도 없었다. 정말… 게임 속이 맞는 걸까?

“제이, 저길 봐요. 민들레 드라이어드에요. 아니, 민들레 포레스트네요. 저렇게 많은 야생 드라이어드라니.”

메스키트의 말에 하던 생각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환상적인 광경에 숨이 멎는 줄 알았다.

한 무리의 샛노란 드라이어드들이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었다.

흩날리는 노란 꽃잎과 하얀 꽃씨, 그사이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드라이어드들의 노란 원피스. 봄날의 꽃축제에서 화려한 요정들의 퍼레이드를 보는 기분이었다.

동류의 드라이어드들을 한데 모아 놓으면 저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하는구나.

하나같이 데이지와 같은 묘목 상태의 어린 드라이어드들이었는데 마침 입은 옷도 노란색이라 얼핏 보면 유치원생들 같기도 했다.

두 손으로 쥔 하얀 솜방울이 달린 스태프와 담요처럼 두른 녹색의 케이프가 너무도 사랑스러운 색 조합이라 잘 어울렸다.

행렬의 제일 뒤에 선 두 드라이어드는 민들레꽃의 뾰족한 톱날 잎사귀를 닮은 거대한 부채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이 양옆으로 커튼처럼 걷히자 무리 중에서 유일하게 성숙한 모습을 한 여성형 드라이어드가 나타났다.

등 뒤에 잎사귀를 닮은 두 쌍의 날개를 나비처럼 달고 민들레꽃을 여러 겹 엎어 놓은 것 같은 노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흩날리는 꽃씨의 솜털을 닮은 하얀색 머리 위엔 왕관을 형상화한 것 같은 화관이 놓여 있었다.

들고 있는 스태프도 어린 드라이어드들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거대하고 화려했다.

동화 속 요정 같은 모습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엄이 넘쳐흘렀다.

“…그래서 군락지가 유지되었던 거군.”

엘더가 중얼거렸다. 메스키트도 이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이 환장하게 아름다운 광경에 침착하지 못한 것은 나뿐인가?

데이지를 보니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다행이다. 혼자만 들뜬 게 아니라.

“내 주인, 제이. 이건 아주 보기 힘든 광경이랍니다. 드라이어드들끼리 무리 지어 사회를 이룬 대규모 포레스트뿐만 아니라 그 포레스트의 왕도 보게 되었네요.”

민들레 드라이어드들은 우리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멈춰 섰다. 어린 드라이어드들이 길을 트자 그들의 왕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저는 이곳 민들레 드라이어드들의 우성종. 로드의 역할을 맡고 있는 ‘단델리온’입니다. 세계수의 작은 축복, 드루이드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이고… 제가… 제가 다 영광이죠.”

사람이 절로 굽신거리게 된다. 왕이라잖아? 엄청 대단한 신분 아냐? 엘더, 저분이 어딜 봐서 노멀 등급이니. 아차! 이건 편견인가?

“군락지로 들어오려는 기척이 느껴져 경계를 하고 말았습니다. 드루이드님이신 줄 알았다면 경고의 꽃씨가 아닌 환영의 꽃잎을 보냈을 겁니다. 세상 모든 드루이드는 저희 드라이어드들의 희망이자 작은 신. 저의 무례를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세요.”

드루이드란 이유로 이렇게까지 대접받다니. 그렇게 대단할 것 없는 나라서 조금 부담스러웠다. 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어요! 하얗게 꽃씨가 흩날리는 모습도 눈 내리는 것처럼 보여서 완전 예뻤어요! 무례라고 할 것도 없는데요!”

나는 필사적으로 부인했다. 진짠데! 진짜 멋있고 환상적이었는데! 여기서 불쾌함을 드러내고 짜증 낸 건 엘더밖에 없는데요!

“대단하군요. 야생의 몸으로 포레스트를 이끌고 군락지를 지키다니. 모든 야생 드라이어드들에게 귀감이 될 모습이에요.”

메스키트가 개화 후 나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예를 갖춘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주시하던 민들레꽃의 왕 단델리온이 메스키트를 보고 놀란 얼굴이 되었다. 메스키트의 말 때문이 아닌, 정말 순수하게 메스키트의 모습만 보고 놀란 것처럼 보였다.

메스키트는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보기만 해도 알아챌 수 있는 스페셜급의 색다름이 있는 건가?

“많은 영혼을 지게 된 자의 의무일 뿐입니다. 대단하신 분께 과한 칭찬을 받게 되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단델리온이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녀의 작은 움직임에도 금빛으로 빛나는 작은 꽃잎들이 요정의 가루처럼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것들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꿈을 꾼다고 착각할 만큼 몽환적인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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