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604)

선잠이 든 것처럼 의식이 갑자기 잠기운의 몽롱함 위로 불쑥 고개를 내밀 때가 가끔 있다.

보통 잠귀가 밝지 않아서 과격하게 말하자면 불이 나도 모를 정도로 푹 잠드는 나였는데, 뭔가 오싹한 기분이 들어 잠에서 깨게 되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누운 모습 그대로 귀를 열고, 밤의 찬 공기를 한가득 들이켰다. 두터운 메스키트의 망토가 머리끝까지 씌워져 있었다. 청각이 깨어나고 후각이 깨어나고 촉각이 연이어 깨어났다.

눈을 뜰까 말까 고민하는데 이를 알아차린 메스키트가 어깨를 토닥였다. 다시 재우려는 속셈이었다.

“제 경계가 제이에게도 전해지고 말았나 보네요. 별거 아니랍니다.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메스키트의 목소리는 낮아서 조곤조곤 듣기 좋았다. 토닥이는 일정한 리듬과 겹쳐서 금세 다시 잠이 들 것 같았지만, 그 경계라는 것이 궁금한 바람에 의식 한 편이 끈질기게 현실을 붙들고 있었다.

“뭔데…?”

내가 다시 잠든 줄 알았는지 메스키트는 멀리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졌어요. 아마 저쪽이 우릴 더 먼저 발견한 것 같네요. 전투를 하려는 낌새를 보이기에 경계를 했던 거예요.”

“…위험한 거 아냐?”

“우릴 향한 살기가 아니었기에 안심한 거랍니다. 아마 멀리 있을 다른 불들을 처치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우습게도 그들이 우리를 배려해 주고 있네요. 이 주위를 크게 빙 돌고 있어요. 전투가 일어났다가 금방 종료되고 있죠. 아마 우릴 중심으로 몇십 미터 밖의 모든 불들이 사라졌을 거예요.”

다른 드루이드가 있나 보구나. 다른 드루이드의 전투도 보고 싶긴 한데….

사실 끈질기게 버텼던 의식이 메스키트의 조곤조곤 들려오는 말소리에 연이어 후려 맞고 가라앉는 중이었다.

내 사냥터를 스틸…. 어쩐지 기분은 나빠진 채로 다시 잠이 들었다.

***

모처럼 꿈을 꾸었다.

이곳에 와서 하도 세계수에 대해 많이 듣다 보니 꿈속에 세계수가 나왔다.

사실 그것이 세계수가 맞는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세계수를 본 것은 왁스 실링과 도장 등에 자리한 문양, 그리고 그 일부인 과수원의 가지뿐이었다.

그런데도 세계수가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거대한 나무가 높은 곳에 우뚝 서 있었다. 얼마나 거대했냐면, 내가 아주 멀리서 세계수를 바라보고 있는데 나무 전체를 볼 수 없었다.

미친, 꿈이니까 저게 나무인 줄 알지, 실제로 보면 저게 나무라는 걸 어떻게 알아? 크기도 엄청 컸다.

나무 몸통은 백옥처럼 하얬다. 그러나 가지와 같은 말단으로 갈수록 점점 색이 밤색에 가까워졌다.

설원에서 눈에 반사되는 햇빛에 실명할 수도 있다는 소릴 들었는데, 그 마음을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너무 하얘서 눈이 부시다 보니 눈을 다 뜰 수 없었다. 눈물도 좀 났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나무를 바라보았다. 대체 왜 그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람은 불고 있지 않았는데 금빛으로 빛나는 나뭇잎이 꽃잎처럼 내 앞에 흩날렸다. 그건 꽤 아름다운 장면이라 가슴이 울렸다. 그리고 나뭇가지도 스산하게 흔들렸다.

갑자기 그중 가장 가는 나뭇가지 하나가 날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나무가 저절로 움직여서 징그러울 법도 한데 이상하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가는 나뭇가지는 어쩐지 밤색보단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진했는데, 다른 가지들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에 비해 빛도 약했고 나뭇잎도 없이 앙상했다.

오직 작고 투명한 열매 하나만 매달려 있었다.

나뭇가지는 내가 손을 쭉 뻗으면 닿을 곳까지 와서는 멈춰 섰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덩그러니 열려 있는 투명한 열매가 너무나도 따기 좋게 보이고 탐이 났다.

그래서 땄다. 한 손으로 잡자마자 늦가을의 홍시처럼 툭 하고 쉽게 떨어졌다.

열매는 과수원에서 쥐었던 다른 열매와 달리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는 열매를 내 손으로 데우며 한없이 바라보았다. 이 열매는 뭘까?

별안간 나뭇가지가 내 뺨을 철썩철썩 때리기 시작했다. 야, 예고도 없이 선공하기 있나요? 우리 아까까진 분위기 좋았잖아! 갑자기 왜 이래?

그러자 나뭇가지가 말도 하기 시작했다.

“일어나라, 잠탱아.”

내가 잠 많은 것이 벌써 세계수까지 소문이 났다고? 좀 소름 돋는데.

“진짜 못 일어나네. 벌써 해가 중천이야.”

“드루이드님!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나뭇가지가 엘더와 데이지 성대모사를 한다. 뭐야, 이 세계수는?

“드루이드님! 여행을 계속 떠나셔야죠! 이러다가 영영 28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하지 못하면 어떡해요?”

그리고 눈이 번쩍 뜨였다.

***

어느새 날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아티팩트에서 나온 드라이어드들이 날 지켜보고 있었다.

와… 늦잠 잤나 봐. 야유회에서 제일 늦게 일어난 것만큼 뻘쭘했다.

“뺨 누가 때렸어? 엘더지?”

“때린 거 아냐. 두드린 거야.”

“네 힘으로 두드리면 그게 때린 거지!”

아프진 않았지만 깨워도, 깨워도 못 일어난 나 자신이 쪽팔려서 괜히 딴청을 부렸다.

“어, 그래. 그럼 앞으로 조심할게.”

엘더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그렇게 나오면 내가 미안해지잖아. 따지고 들 줄 알았는데. 더 뻘쭘해져서 뺨만 열심히 문질렀다.

아직 잠이 덜 깬 기분이라 정신 좀 차리려고 물을 꺼내 마셨다.

내 체온과 함께 있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신기하게 시원했다. 잡화점에서 막 물병을 구매했을 때의 온도와 동일한 느낌이었다.

입 안 대고 마시려고 열심히 털어 마시다가 내 드라이어드들에게도 슬쩍 권해 보았다.

물 마실래? 목 안 말라? 그런데 놀랍게도 다들 방금 갈증과 비슷한 느낌은 해소되었다고 한다. 내가 물 마셔서…. 좀 물아일체가 이런 게 아닐까 생각도 들고….

“데이지는? 데이지는 이것저것 잘 먹었잖아.”

여관에서 몇 인분씩 해치웠던 아이니까 혹시나 싶어서 물병을 건네주었다.

“그때의 저는 인간과 다름없어서 살기 위해 먹었는걸요! 그래도 그 여관의 음식들은 정말 맛있어서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지금은 딱히 뭘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배도 고프지 않고요.”

해사하게 웃으면서 너무나도 슬픈 이야기를 한다. 어쩐지 작은 몸을 하고 많이 먹는다 싶었지….

그땐 뭣도 모르고 보는 내가 배부를 정도로 복스럽게 잘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다 생존과 직결된 행동들이었다니.

크흡, 아이의 처절한 마음이 느껴져서 가슴이 아려 왔다.

내가… 내가 다 잘 먹을게. 내가 다 잘할게. 내친김에 배도 채우려고 비상식량을 꺼냈다.

경품으로 잔뜩 받은 것을 포함해서 잡화점에서 한계 수치까지 구매한 비상식량. 나의 아침밥.

비상식량은 에너지바처럼 생겼다.

껍질을 까니까 생각이 달라졌다. 초코 코팅이 없잖아요! 손으로 툭 끊어 보니 파삭, 하고 부서진다. 아씨, 첨가물도 없네. 견과류 같은 거 말이야! 맛이 상상이 된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조각을 입에 넣었는데, 퍼석하고 텁텁하고 진짜 살기 위해 꾸역꾸역 먹는 느낌이었다.

맛이 미묘하게 없는 다이어트용 식품도 아니었다. 조금의 조미료도 없는, 정말 순수하게 맛이 아예 없었다.

난 이게 주머니 속에 한계 수치까지 있다. 모험 중 허기는 비상식량이 전부 해결해 준다고 잡화점 주인이 열심히 입을 털었는데, 설마 재고 처리였습니까? 이 맛없는 걸 누가 사요? 다이아가 많은 제가 샀군요. 시발….

“왜 그러세요?”

“아냐…. 그냥 많은 생각이 들어서 그래.”

내 썩은 표정에 데이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미 깐 걸 버리기도 뭐하고 배도 고파서 먹긴 먹는데… 서럽다. 다이아도 많은데 이런 맛없는 걸 먹는다.

신기하게 먹으면 먹을수록 배가 차긴 했다. 아주 작은 크기여서 네 입 만에 끝났지만 다 먹을 때쯤엔 배가 불렀다.

헛배 부른 느낌인데? 입맛을 조져 놔서 더 이상 음식이 당기지 않게 만드는 용도인가?

“후후, 맛이 없나 보네요.”

“먹어 보진 않았지만 뭉쳐 놓은 톱밥을 씹는 느낌이야. 나 방금 좀 햄스터가 된 기분이었어.”

메스키트가 내가 내려놓은 물병을 주워 건네며 웃었다. 물로 입을 열심히 헹궜다.

앞서 했던 다짐도 잊고, 앞으로 배가 고프면 그냥 참을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도 들었다. 한국인은 밥심인데….

출발하기 전 우리가 갈 경로를 다시 되짚어 보았다.

엘더가 현재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짚어 주었는데, 26번째 테라리움과는 조금 떨어졌지만 28번째 테라리움과는 거리가 한참이었다. 아, 벌써 힘들다.

이제 확실히 세계수 가지의 축복 영역에서 아주 멀어진다고 하여 메인은 메스키트로 변경하기로 했다.

강한 몬스터가 나타날 확률이 높아졌으니 팀의 안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데이지와 진하게 연결되어 있는 영혼의 연결을 메스키트에게 돌렸다.

곧바로 드라이어드들에게 반투명한 막이 덧씌워졌다. 방어형인 메스키트를 리더로 하자 파티 전용 버프로 방어력이 증가한 것이다.

다시 떠난 길은 너무나도 순탄했다. 메스키트를 리더로 돌리고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 무색하게 한참을 걸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재잘재잘 작은 새처럼 떠들며 분위기를 띄워 주던 데이지도 화제가 떨어졌는지 중반부턴 입을 다물었다.

신나서 절로 나오던 콧노래도 오래 걷다 보니까 지쳐서 자동 음 소거 되었다.

중간중간 불이라도 나타나 주면 기분 전환이 되었을 것 같은데, 잘 닦아 놓은 포장길이 끝나고 인적이 드물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비포장길이 나타날 때까지도 불은 나타나지 않았다.

누가 제 사냥터를 싹 쓸어 갔죠? 설마 밤 중에 우리 주변을 맴돌았다는 그 드루이드인가요? 매너가 없네.

그때 메스키트는 그들이 우리를 배려해 주는 것 같다고 했지만 내 입장에선 아니었다.

경험치가 없잖아요. 레벨 업을 해야 하는데 내 잠재적 경험치를 다 털어가 버리면 어떡합니까? 한두 마리는 남겨 주지. 시식 코너에서도 뒷사람을 위해서 한두 개는 남겨 주는데. 사람 사는 정이 없다.

아침밥도 망했고 사냥도 망했고 지루하게 걷기만 하고 다리는 아파 와서 조금 우울한 마음이 들 것 같았다.

어젠 나름대로 하루가 다이내믹했지만 오늘도 어제와 같을 거라고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던 탓일까. 하긴 매번 영화나 소설 같은 일들이 일어날 순 없겠지. 어쩌면 내일도 오늘처럼 쭉 앞만 보고 걷기만 할지도 몰라.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보고 걷는데, 어느 순간부터 러그처럼 푹신하게 깔린 풀밭 위로 작고 노란 꽃들이 송송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