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님! 여기에 다이아를 실으면 되나요?]
[주인님! 이건 뭐예요?]
그러게. 그건 뭐지? 시기를 보아하니 보증서와 관련된 물건인가? 다짜고짜 삽으로 다이아를 퍼서 부으려던 난쟁이들을 저지했다. 일단 다이아부터 들이밀고 보는 것 좀 어떻게 해야 될 텐데.
“잘 가지고 있어 봐. 다이아 막 부어서 죽이지 말고. 햇빛 잘 드는 데다가 예쁘게 놓아두고 있으면 다이아 많이 꺼내 갈게.”
아직 정체를 모르니까 일단 스킵해야지. 잘 놔두면 언젠가 쓸모 있는 날이 오겠지.
증명서를 다시 보고 싶어져 편지 아이콘을 터치했다. 자꾸자꾸 보고 싶은 이 마음…. 좀 전의 과정이 반복되며 다시 창이 팝업되었다.
이 게임에 오고 나서 도통 게임다운 시스템 화면을 보지 못해서, 내심 달성감이 덜 충족되는 느낌이라 불만족스러웠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화면으로 증명이 되는 무언가가 생기니 뿌듯해서 미칠 것 같았다.
급을 더 올리려면 뭘 하면 될까? 지분을 소유할 수 있는 건 부동산 같은 개념인가?
현실에서 못 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곳에서 이룰 수 있는 건가? 26번째 테라리움 말고 다른 번호 테라리움에서도 이론 증명서를 받을 수 있는 걸까?
핸드폰을 보며 실실 웃고 있는데 엘더가 궁금해하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뭔데 그래?”
엘더는 조심 좀 해야 된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좀 거리를 두고 보는 얼굴과 바로 옆에서 보는 얼굴은 타격감이 천차만별이다. 내가 보기에 무척이나 이로운 얼굴인데 심장에 너무 해로운 얼굴이다.
화끈해지는 얼굴을 가라앉히며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그게 뭔데?”
“증명서래. 우리가 여기 주위의 불을 다 쓸어서, 여기 테라리움이 나한테 혜택을 주겠대. 신분도 보장해 주고.”
“좋은 것을 받았네요. 마침 다행이에요, 제이. 아무래도 테라리움 내에서 큰일을 벌여서 좋지 않은 시선을 받을까 걱정했는데. 테라리움은 그런 것보다 불에 의한 마을의 안위 걱정이 더 컸던 것 같네요.”
큰일이라면 메스키트와 엘더가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들을 쓸어 버린 일을 말하는 거겠지? 하긴 내가 한 행동은 마을 내 PK와 다름없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긴 했어.
“하지만 이제 당장 급한 불을 껐으니 마을 내 치안에 눈을 돌릴 거예요. 이제 전과 같이 일을 벌이려면….”
“숨어서 해야겠지. 뒷수습도 철저하게. 아예 메스키트의 뿌리를 써서 땅속 깊은 곳에 다 묻어 버리자.”
엘더가 여상하게 대답했다. 절대 안 하겠다고는 말하지 않는 걸 보니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충돌은 면치 못하겠네. 내 드라이어드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성격이 화끈한지 모르겠네.
“그나저나 나보고 5급 가드너래. 칭호가 생긴 것 같아서 신기해.”
현실에서 9급 공무원도 못 해 봤는데 게임 내에서 내가 5급이나 됐다. 그것도 사냥터를 쓸다 보니. 이런 특혜가 주어지는 걸로 보아 결코 쉽거나 흔한 일이 아닌가 보네. 보통 마을 밖을 막 나서면 초보자 사냥터부터 쓸지 않나? 나만의 고정 관념이었나?
“내 주인, 제이. 테라리움이 직접 보장하는 신분은 아주 중요할 거예요. 수많은 드루이드들이 존재하지만 별다른 활약을 못 하고 잠적하는 자들도 많다고 하니까요.”
“그럼 난 그 수많은 드루이드들 중 조금이라도 특별한 드루이드네?”
메스키트가 기특하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게 바로 다이아로 앞서가는 뉴비의 짜릿함!
내가 신기해서 보증서를 자꾸만 읽는 바람에 날은 어두워져 갔다.
마을에 다시 돌아가기에도 애매한 위치가 되어 적당한 자리에서 노숙을 하기로 했다.
노숙은 처음이라 떨리는데. 초등학교 시절 걸 스카우트도 안 해 본, 곱게 자란 화초인데. 그렇다고 침대 아니면 못 자는 사람은 아니지만.
앉아 있던 곳에서 좀 더 걸어가 좋은 자리를 찾았다. 주위에 나무가 많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었다.
메스키트의 조언에 따르면 식물이 많이 자라는 곳은 불에 의한 피해가 적은 곳으로, 다시 말해서 불이 나타날 확률이 아주 적은 곳이라고 했다. 물론 우리가 근처 불을 다 쓸어 버린 것도 있지만.
장비와 로브를 두툼하게 껴입은 덕인지 밤바람은 그렇게 싸늘하지 않았다. 나는 기대기 좋은 나무 옆에 멀뚱히 앉아서 세 명의 드라이어드가 오손도손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혹시 모르니 한 명만 불침번으로 남고 나머지는 테라리움 아티팩트로 돌아가 체력을 비축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불침번은 단호하게 메스키트로 정해졌다.
“메스키트는 잠 안 자도 돼?”
“드라이어드는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살 수 있답니다. 전투로 인한 상처는 어쩔 수 없지만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작은 세계수인 제이가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의 영혼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제이가 피곤하면 드라이어드들도 피곤을 느끼고, 제이가 상쾌함을 느끼면 드라이어드들도 마찬가지예요. 제이는 아무 걱정 없이 푹 쉬기만 하면 돼요.”
본체 성능이 드라이어드들한테도 영향을 주다니요…. 컴퓨터가 암만 좋아 봐야 뭐해. 파워가 거지 같은데. 엉엉. 과거의 나, 반성하겠습니다.
밤이 찾아왔다. 풀벌레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오직 내가 풀밭에 누워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가득한 고요한 공간.
서울에선 보기 힘들었던 별들이 촘촘히 박혀 아름다운 밤하늘을 연출했다. 빛이라곤 달과 별빛, 그리고 내 테라리움 아티팩트에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이 전부였다.
본래의 나라면 이런 극도로 어두운 상황을 견디지 못했겠지만, 메스키트가 든든하게 옆을 지키고 있어서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피로 회복제를 물처럼 마셨던 탓인지 몸을 뒤척여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런 황량한 풀밭에 누워 자는 것은 상상도 못 해 봤는데, 걱정했던 것과 달리 꽤 괜찮은 느낌이었다. 풀들이 솜털처럼 나를 포근하게 품어 주는 듯했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누워 있기만 해도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던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휴식 스킬 같은 건가 보다.
은은하게 빛을 뿜는 테라리움 아티팩트에 손을 대었다.
노멀 필드의 드라이어드 둘이 자신의 구역을 살뜰히 가꾸고 있었다. 엘더와 그리 멀지 않는 구역에서 데이지의 작은 꽃이 피어났다.
붉은 꽃잎과 인형의 털 같은 밤색 수술들. 비록 한 송이뿐이라 모체가 나무인 다른 두 드라이어드들에게 비교가 되었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귀엽고 예뻤다.
엘더는 내가 챙겨 준 다이아를 공방에서 탕진한 만큼 자신의 구역에 못 보던 물품들이 쏙쏙 설치되어 있었다.
하우스를 마련해 주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가구 욕심은 나와 다를 바 없어서 모체 꽃나무 주위로 이것저것 잔뜩 꾸며 둔 게 보였다.
푹신한 쿠션이 있는 흔들의자가 생겼고 땅에서 솟은 나무를 그대로 조각내어 만든 듯한 책꽂이와 테이블, 의자가 생겼다.
책꽂이에 책은 한 권도 없었지만, 엘더는 그곳에 노래하는 황금 새 조각상이며 작은 미니 골드 하프 등을 두는 장식장으로 쓰려는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엔 반딧불 같은 작은 불들을 모아 만든 것과 같은 램프가 놓여 있었다. 아마 엘더에게 책이 생기면 저곳에서 불빛에 의지하여 독서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듬성듬성 놓여진 가로등에 엘더 플라워 꽃잎이 닿으면 반짝반짝 요정의 빛 가루가 흩날리는 것처럼 보였다.
수많은 울타리 중 따로 빼놓았던 황금 울타리는 엘더의 모체 꽃나무를 빙 둘러 장식되어 있었다.
엘더가 손수 랜덤 박스에서 뽑았던 버섯과 벤치, 돌다리 등이 한 구역에 조화롭게 몰려 있었다. 엘더는 아주 다이아 투자하는 맛이 있는 드라이어드였다.
반면 데이지는 줬던 다이아를 거의 그대로 반환한 만큼 황량했다.
우거진 풀밭에 덩그러니 한 송이 피어오른 붉은 데이지 꽃도 귀여웠지만, 엘더의 구역과 비교하면 좀 심심하단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작은 토피어리 같은 것을 꽃 옆에 두길래 뭔가 하고 각도를 돌려보니, 아이가 슬쩍슬쩍 몸으로 그것을 가렸다.
하지만 360도 위아래 자유자재 시점 조절이 가능한 내 눈을 피할 순 없었다.
“J?”
겨우 알파벳 J 토피어리를 그렇게 숨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니 그걸 왜… 하는데, 아…. 내 닉네임?
유리 돔에서 손을 떼고 입을 막고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정말 너무너무 귀엽게 군다. 단 한 장으로 당첨되게 해 준, 딱 하나 산 상품이 내 닉네임 토피어리 장식이었다니.
“제이,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메스키트가 굴러다니는 내 머리가 엄한 곳에 부딪히지 않도록 손을 들어 막아 주었다. 내 머리통만 한 메스키트의 손은 건틀릿 때문에 푹신하진 않아도 베개처럼 편안했다.
“다이아를 누구보다도 밝히지만 그만큼 속내가 알기 쉬운 엘더도 귀엽고, 나한테 맹목적인 데이지도 너무 사랑스러워. 그리고 메스키트는 함께 있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든든해서 너무 좋아. 나 여기 오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 난 드라이어드 복이 정말 좋은 것 같아. 빨리 다 같이 모험도 가고 놀기도 하고…. 할 수 있는 건 잔뜩 다 하고 싶어!”
“내 주인, 제이. 저도 그래요. 당신을 만난 건 저에게도 행운이랍니다.”
어둠에 가려 메스키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언제나처럼 자상하게 날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늦었다며 이제 그만 자야 할 때라고 메스키트가 재촉했다. 갑옷 위의 버클을 풀어 커다란 망토를 벗었다. 그것을 내 위로 덮어 주며 이제 내일의 일을 기다릴 차례라고 했다.
잠이 안 와서 테라리움 아티팩트를 구경했던 건데, 메스키트의 망토에 잔뜩 밴 스모크 향을 맡고 있으니 절로 의식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확실히 오늘 좀 너무 나대긴 했어. 교복 입고 발랄하게 뛰어다녔던 때 이후로 오랜만에 많이 움직였지. 그러고 보니 메스키트도 공방에서 뭘 샀는지 궁금했는데….
가물가물하던 시야가 완전히 어두워졌다. 빨리 내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눈을 감기가 무섭게 깊은 수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