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인, 제이. 그러고 보니 제 설명이 부족했군요. 다이아는 보석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 이유에 대해선 설명을 안 했네요. 다이아는 세계수의 증산 작용으로 공기 중에 퍼진, 세계수의 수액이 담긴 물질이에요. 그것이 드루이드의 영혼을 만나 결정화된 것이 다이아죠. 공기 중으로 퍼질 때 세계수의 힘도 함께 담겨서 퍼지기 때문에 많이 증발할수록 세계수에겐 좋지 않답니다. 불이 많아지면서 증산 작용도 비이상적으로 활발해진 탓에 지금 세계수는 갈수록 힘이 약해지고 있는 상태에요. 이를 막기 위해 과수원에서 다이아를 받아 힘을 되돌려주는 중이랍니다.”
메스키트는 내게 월렛을 꺼내 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드루이드의 영혼을 만나 결정화된 다이아를 담는 그릇이 월렛이라고 알려 주었다.
물론 보통의 다른 드루이드들의 월렛에 해당되는 이야기겠지만. 나는 자체적으로 다이아를 생산하는 월렛을 가지고 있는 중이라….
영혼의 한계가 큰 드루이드는 비교적 빠르게 다이아로 결정화시킬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다이아 한 개를 얻는데 한 달이 넘게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다.
또한 세계수의 가장 먼 가지와 잎에서 증산 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세계수와 가까이 있을수록 더 얻기 힘들다는 것도.
한마디로 다이아를 많이 얻고 싶으면 레벨 업 많이 하고 뒤 번호의 테라리움으로 가야 된다는 뜻이었다. 다이아의 가치가 왜 그렇게 큰지 대충 짐작이 갔다. 메스키트는 다이아를 얻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고 했지만, 어쩐지 말하기도 전에 얼굴이 급 어두워져서 내가 막았다. 좋지 않은 방법인 건가?
“다이아는 세계수의 힘을 직접적으로 담고 있는 물질이기 때문에 불이 아주 열렬하게 반기는 먹잇감이랍니다.”
그러니까 번개탄 정도 되는 물질이란 거군. 이거 전투 났을 때 내 핸드폰을 놓치거나 인벤토리에서 다이아라도 쏟아지면 지옥의 화염을 보게 되는 건가….
불이 다이아를 쫓아 다가온 바람에 근처에 있던 우리도 발견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드라이어드들이 전투 모드가 되었다.
작은 불은 데이지가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었지만, 다이아를 먹고 좀 더 커진 불은 다시 쪼개기 작업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발견하고 말았다. 커진 불이 처치되고 난 후 이전과 다르게 느껴지는 그 미세한 차이를. 체감뿐이라 확정 지을 순 없지만… 경험치가 더 오른다!
내 더러워진 눈매를 아무도 알아차려선 안 돼. 멀리 갈 필요 없겠어.
나는 드라이어드들을 끌고 직선으로 더 나아가는 대신 마을 주위를 빙 도는 길로 경로를 틀었다. 우리가 쓸었던 지역에서 조금 더 벗어나자 다시 불이 보이기 시작했다. 발견하자마자 냅다 다이아부터 던지고 보는 나를 엘더가 기를 쓰며 막았다.
“놔 봐. 다 내가 생각이 있어서 그래.”
“그렇게 쓸 거면 날 줘!”
“넌 계속 많이 주고 있잖아! 이게 다 너희들 잘되라고 하는 거야!”
다이아를 먹고 쑥 자란 불은 확실히 작은 불보다 경험치를 많이 주는 것 같았다. 느려졌던 레벨 업 속도가 다시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누가 보면 미쳤다고 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방법은 다이아가 썩어 나는 나이기에 가능한 방법임을.
경험치 버프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 데이지의 사냥 수준에 맞춰 던지는 다이아 개수를 늘려 갔다. 나중엔 자리 옮기기도 귀찮아서, 데이지가 불을 쪼개면 각각에 다이아를 던져서 크기를 키우는 편법도 썼다.
메스키트가 이런 방법도 있냐며 황당해했지만 원래 한국 유저들이 다 그렇다.
게임 한정 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굴릴 자신이 있다.
***
다이아를 적어도 열매 뽑기만큼은 쓴 느낌이었다. 후반부엔 거의 2~3개씩 투척했으니까. 유료 뽑기 하려고 땅을 팔았던 누군가가 봤으면 목뒤를 잡고 쓰러질 그런 행태였다.
사냥 노가다는 별로 좋아하지 않고 지루해서 죽을 것 같은데 분위기를 타다 보면 정신 놓고 잡을 때가 있다.
왜 마라톤에도 ‘러너스 하이’라는 용어가 있지 않은가? 뒈질 것 같은 기분이 싹 사라지고 갑자기 미치는…. 지금이 딱 그때였다.
어느새 날이 좀 어둑해지고 초보 사냥터도 완전히 정리된 느낌에, 레벨 업은 속도는 급격히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불의 크기를 좀 더 키워 보려고 해도 일정 수준의 크기가 되면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팍 사그라들었다.
이것이 현질러의 독주를 막는 세계수 축복의 위엄…. 보스 몬스터 한번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레벨 업 속도가 느려지며 어쩐지 몸이 갈수록 축 처지는 느낌이라, 나는 모처럼 움직여서 피로가 오는 거라고 생각해 피로 회복제를 따다 열심히 마셨다. 마신 직후는 몸이 개운해져서 힘내서 다이아를 던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서 자꾸 마시다 보니 속이 역한 느낌과 두통이 몰려와 그만두었다. 체력이 작작 하라고 레드 라이트를 깜박깜박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게임 속인데 피로라니 너무 한 거 아닌지….
꼭 전투 진행에 체력이 필요한 게임들이 떠올랐다. 특히 친구끼리 하트나 에너지 같은 것을 보내 줘야 하는 모 플랫폼 게임들 같은….
몰래 까먹던 피로 회복제도 메스키트에게 들켜서 팀은 잠정적으로 사냥 중단에 들어갔다.
무리하면서 이런 방법을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며, 이상한 기분은 들었지만 전투에 신경 쓰느라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이 잘못이라며 메스키트가 자책을 했다.
나는 죄인이 된 기분으로 피로 회복제를 주머니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죄송합니다. 원래 현실에서도 아메리카노나 각성제를 물처럼 마시던 사람인지라….
눈 밑이 거뭇하다고 걱정을 하기에 내 몰골이 궁금해져서 핸드폰에 비춰 봤다가 화들짝 놀랐다. 나는 거의 며칠 밤샘을 한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잠깐 사이에 이 끔찍한 몰골은 또 뭐죠…?
못난 주인을 둬서 미안하구나. 체력이 쓰레기 같은 본체 따라갈 줄은 몰랐지. 이젠 내가 물러날 때였다.
확실히 이곳에서 더 얻을 것은 이제 없는 것 같지. 아쉬움에 입맛만 다시며 아무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메스키트도 방패와 랜스를 내려 두고 내 옆에 앉았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몸에 기댈 수 있도록 슬쩍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설렌다. 꼭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는 느낌이야.
데이지는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다리를 조물조물 주물러 주며 많이 피곤했던 거냐며 걱정을 했다. 결혼도 안 했지만, 손녀딸이 생긴 할미의 마음이 이러할까…. 흐뭇하다.
내 몰골을 보다 못한 엘더가 흰빛을 휘감은 손으로 두 눈을 덮어 주었다. 좀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팀의 전투력이 내 다이아 편법으로 인해 다음 사냥터를 강행 돌파를 해도 될 만큼 오른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 힘들면 전투를 최대한 피해서 걷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일정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띠링.
갑자기 핸드폰에서 알림음이 들렸다. 나는 이제 난쟁이들이 머리를 써서 지능적으로 내 주의를 끄는 줄 알았다.
다이아 사용 알람 시계라도 맞춰 놓은 거 아닌가 싶어 질겁을 하며 엘더의 손을 슬쩍 치우고 핸드폰을 보았는데, 웬 초록 실링 왁스가 박힌 하얀 편지 봉투가 화면을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핸드폰은 난쟁이 바이러스에 걸려서 <무한 다이아> 화면밖에 못 띄우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메신저 기능이요? 스팸 메일 아냐?
수상한 메일 열었다가 기말 과제를 저당잡혔던 극악무도한 바이러스에 걸린 경험이 있었기에 핸드폰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터치해서 봉투를 열었다. 실링 왁스에 있는 양각 문양, 세계수로 보이는 나무 문양은 내 퀘스트 스크롤 제일 마지막에 찍혀 있던 인장과 같은 것이었다.
세계수의 26번째 테라리움의 은인에게.
드루이드 네임: 제이
골칫거리를 해치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26번째 테라리움은 더 이상 가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주민들의 생활이 훨씬 풍족해졌습니다.
달성 조건: 26번째 테라리움 주변의 불의 개체수를 85% 이상 감소.
★당신의 이름이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친근’하게 불리게 됩니다.
세계수의 26번째 테라리움 내 당신의 지위: 5급 가드너
(4급 이상부터 해당 테라리움의 일정 지분을 소유할 수 있게 됩니다.)
(9급 미만부터 해당 테라리움과 적대 관계가 되어 입장이 불가해집니다.)
귀하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혜택을 드립니다.
- 세계수 26번째 테라리움 내 상점 구매가 10% 할인
- 세계수 26번째 테라리움 내 지정 여관 무료 이용 가능
- 1년에 한 번 세계수의 열매 무상 지급 우선권
- 20번대 테라리움 방문 시 26번째 테라리움이 당신의 신분을 보장합니다.
세계수의 26번째 행정 관리원 및 과수원이 본 증명서를 인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