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604)

저레벨 구간은 레벨 업이 비교적 빠르다는 상식이 이 게임에서도 통했는지 데이지의 성장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작은 불을 4개로 쪼개서 하나하나 처치하던 것이 이젠 둘로 쪼개서 처치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 무렵에 메스키트가 데이지에게 연계 전투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전까진 당장에 데이지의 전투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였기에 독주하도록 내버려 두었지만, 앞으로의 전투를 위해서라도 팀에서 각각의 능력을 파악하는 것과 함께 조화롭게 섞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데이지가 교육을 받을 때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주워들은 지식이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르잖아?

팀의 방패가 되는 메스키트는 데이지와 달리 불에 대한 면역력이 강해서, 데이지가 스치기만 해도 화상을 입는 것에 비해 웬만한 불길로는 다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데이지보다 스피드가 떨어져서 한 자리에 고목처럼 우뚝 서서 불의 시선을 끄는 방패가 될 순 있지만, 그것도 불의 개체 수가 늘어나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으면 당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공격력은 물론 데이지보다 월등히 세지만, 다음 공격으로 이어지는 속도가 단도 두 개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날아다니는 데이지보단 떨어진다고 했다. 만약 데이지의 공격력이 지금보다 월등히 높아진다면 서로 훌륭한 검과 방패가 될 것이다.

데이지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 일부러 불을 4개로 쪼개서 훈련을 하는 것을 보며, 나는 살짝 소외된 엘더를 바라보았다.

그사이 엘더의 레벨도 올랐는지, 새하얀 로브에 새겨진 금빛 자수가 더 늘어 있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더욱 화려해져서 저게 바로 소위 말하는 자체 발광인가 싶었다. 자꾸 문양에 손이 가려는 것을 안간힘으로 참았다.

“너는 훈련 안 해?”

“나와 메스키트는 호흡이 잘 맞아.”

“아니! 데이지도 있잖아.”

“저 꼬맹이가 강해지면 굳이 맞출 필욘 없어. 그땐 내가 메스키트만 신경 쓰면 되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사이가 좋아진 줄 알았는데 아직 앙금이 남아 있는 건가? 표정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오래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불이 불을 부른다고. 4개로 쪼개 놓은 불들을 다 해치우기도 전에 새로운 불들이 쏙쏙 나타났다.

데이지가 처치하려던 것을 어쩐지 메스키트가 저지했다. 다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나머지 나타난 불들도 4개로 쪼개라고 했다. 데이지는 당황한 얼굴이 되었지만 메스키트의 단호한 표정에 어쩔 수 없이 말을 따랐다.

작은 불들은 쪼개지고 쪼개져서 모두 12개가 되었고 모두 불꽃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불길을 내뿜었다.

메스키트가 랜스를 하늘 높이 치켜들자, 마른하늘에 노란 모래비가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데이지가 주위를 빙글 돌며 공격을 피해 대기하는 사이 모든 불들이 메스키트를 둘러쌌다.

우뚝 선 메스키트를 향해 엘더의 스태프가 고정되었다. 메스키트의 검은 갑옷은 확실히 불길에 닿아도 그을리는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니는 데이지에 비해 엘더는 정말 여유롭게 메스키트를 서포트했다. 작은 빛이 쉴 새 없이 펑펑 터졌던 이전 전투와 달리, 아주 커다란 빛이 메스키트에게 가끔 닿고 말았다.

탱커가 어그로를 다 끌면 힐러는 탱커만 보면 된다. 그런 의미였구나.

데이지는 자신에게 공격이 오지 않으니 여유롭게 불을 하나하나 꺼트렸다. 애먹으면서 전투했던 전과 달리 데이지의 얼굴이 훨씬 편안해 보였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대응하기 좋게 적은 수가 나타나면 좋겠지만 항상 일이 좋게 풀리는 법은 없답니다. 심하면 많은 수의 불에 둘러싸일 수도 있어요. 모래를 덮어쓴 불은 저를 바라보겠지만, 모래가 다 털려 나간 불은 데이지 아이를 공격하거나 돌발 행동을 할 거예요. 공격의 우선순위도 생각해서 저를 둘러싼 불을 처치하는 방법을 익혀야 해요.”

하나 남겨 둔 작은 불은 모래비를 잔뜩 뒤집어쓰고 메스키트에게 불길을 뿜고 있었다. 아주 작은 데다가 엘더가 적당히 힐링을 써 주니 메스키트에게 타격은 거의 없었다. 불길이 속으로 쌍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데이지는 모래가 다 털려 나가는 시간을 차분히 기다렸다. 모래가 다 떨어진 불은 메스키트에게서 멀어졌고 곧바로 단도에 꽂혀 사라졌다.

잘 짜인 팀을 보고 있자니 절로 뿌듯했다.

세상 사람들! 제 완벽한 덱 좀 보세요! 비록 나는 팀의 지갑을 맡고 있지만.

그러고 보니 나는 뽑기 운이 따라 줘서 특성을 고루 얻게 되었지만, 만약 공격형 드라이어드만 셋이라거나 회복형 드라이어드가 없다거나 하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야 다이아가 받쳐 주니 드라이어드를 셋이나 데리고 여행을 떠나지만, 드라이어드가 하나인 드루이드는 어떻게 전투를 할까?

아쉽게도 마을 밖을 나온 이후로 다른 드루이드는 한 명도 못 봤다. 다른 드루이드는 어떻게 싸우는지 좀 보고 싶은데. 혹시 다른 드루이드와 파티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한 구역에서 너무 시간을 오래 끈 탓인지 주위에 불이 더 이상 남지 않게 되었다.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서 사냥터를 쓸어 버린 것이다.

테라리움 입장에서 보면 좋은 일이겠지만 레벨 업을 노리는 유저인 내 입장에선 아쉬웠다.

새 사냥감을 물색하러 좀 더 걸어 나갔지만, 그마저도 데이지가 불을 쪼개지 않고 원 킬을 낼 수 있게 되며 그 반대 급부로 레벨 업도 더뎌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이곳이 맞춤 사냥터가 아니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지도를 펴서 엘더에게 어디쯤 온 것 같냐고 물으니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고 했다. 반은커녕 1/4도 안 왔다고 하니 급 피로가 몰려오는 느낌도 들었다. 더 멀리 나가는 것은 메스키트가 반대했다.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세계수 가지의 영향을 덜 받기에 더 강해진 불들이 나타날 거고 수도 더욱 많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아직 이르다는 판단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론 더 높은 사냥터 찾아서 폭풍 레벨 업을 하고 싶었지만 갑자기 보스급을 만날 수도 있고….

속도가 더디긴 해도 좀 더 이곳에 눌러 붙어 있어야 하나. 하지만 막상 노가다를 하자고 생각하니 좀 귀찮아지는데.

경험치 버프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머리 굴리는 것 말곤 이 팀에서 제일 하는 일 없는 내가 주머니 속 다이아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 불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메스키트도 이를 알아차리고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저기까지 가서 잡을지 그대로 사라지도록 내버려 둘지 고민 중인 것 같았다.

“불은 사람을 홀려요, 제이. 지금은 아직 세계수 가지의 영향권에 있기 때문에 한숨 돌릴 수 있지만 밖의 불들은 아주 영악하답니다. 저렇게 사람을 홀려서 가까이 오게 만들죠. 하지만 가까이 갔을 땐 이미 늦었답니다. 수많은 불이 주위를 포진하고 있는 곳에 제 발로 들어간 격이거든요. 한마디로 저런 불이 미끼가 되는 거죠.”

불 주제에 머리도 쓴다는 건가요? 소름 돋네. 아무래도 메스키트는 그냥 불을 보내려는 마음 같은데 나는 좀 아쉬웠다. 내겐 이미 불은 하나의 경험치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것만 이쪽으로 불러오면 어찌 되지 않으려나?

마침 주머니에서 돌돌 굴리고 있던 다이아를 꺼냈다. 나는 이것이 썩어나도록 많고 이 정도 크기에 이 정도 무게면 적당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멀리 던지기엔 말이다. 이를테면 돌 던지기 같은 느낌으로.

우리 팀에 원거리 스킬이 가능한 드라이어드가 없는 것 같으니, 대신 무얼 던져서 어그로를 끌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엘더가 알아차리면 미쳤냐고 한소리 할 것 같아서 슬쩍 떨어졌다. 어깨도 좀 풀고. 학창 시절 피구 시합에서 피구왕 제희라고 불렸던 나니까 아직 건재하겠지.

다이아를 휙 던졌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다이아에 무섭도록 빠르게 엘더의 시선이 따라갔다.

“미쳤어? 저걸 왜 던져?”

예상대로 엘더가 한소리 했다. 물론 내가 저게 한 개라도 아쉬울 땐 엘더 말처럼 미쳤다고 표현될 수 있겠지만, 지금 마땅히 다이아를 쓸 곳도 없는데, 우리 난쟁이들 소망대로 좀 펑펑 쓸 수도 있는 거지.

다이아는 포물선 궤도를 그리며 날아갔다가 불에 한참 못 미치는 곳에 툭 떨어졌다. 아쉽네. 한 번 더 던져 볼까? 안 쓰던 어깨 한 번 크게 움직였다고 좀 뻐근하긴 한데.

그런데 놀랍게도 불이 반응했다. 진짜 그 꾸물거리는 기분 나쁜 몸뚱이를 하고 거머리처럼 다이아를 향해 기어가는 것이었다. 전속력으로.

불이 데이지나 메스키트를 발견했을 때 보이는 움직임보다 더 광적인 모습이었다. 다이아에 대한 집착이 엘더보다 더해서 입이 쩍 벌어졌다. 아니 불이 다이아를 어디다 쓰는데요?

꿈틀꿈틀 기어온 불은 다이아를 삼켰다. 그리고…. 내 눈을 의심했다. 머리통만 한 작은 불이 데이지를 양껏 상처 입히고 나서 책가방만큼 커졌던 것처럼, 훌쩍 커졌다.

“미친 저게 뭐야? 저게 왜 커져? 나 지금 다이아로 불한테 밥 준 거야? 저게 밥 먹여서 알키우는 모 게임도 아니고 왜 커져?”

메스키트는 내 행동에 난처하단 표정을 지었다. 꼭 실험 매뉴얼대로 안 하고 호기심에 튀는 행동을 했다가 실험 결과 오차범위가 3000% 났을 때, 날 보는 조교의 표정이 저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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