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전투치고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리타이어된 드라이어드가 없었으니 됐다.
여기저기 불에 그을린 자국이 가득한 데이지의 옷에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론 안타까웠다. 새로 사 줄 순 없나? 유독 크게 타 버린 데이지의 소매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데이지가 “앗! 크게 타 버렸네요!”라고 말해서 더욱 그랬다.
엘더 힐링으로는 옷은 어떻게 복구 못 하나 보네. 이제 막 마을에서 나왔는데 다시 돌아가기도 그렇고…. 매번 불에 탈 때마다 마을로 다시 돌아갈 순 없잖아?
“제이, 데이지 아이의 옷이 신경 쓰이는 건가요?”
메스키트가 옷을 만지작거리는 내 손을 빼냈다. 그 큰 손에 내 손을 올려 두고, 내가 데이지의 옷을 보며 짓던 것보다 더욱 상심한 표정을 지었다. 손엔 내가 불안함을 참지 못하고 손톱으로 마구 짓누른 초승달 모양 흔적이 가득했다.
“이건 괜찮아. 내 버릇일 뿐이야. 진짠데! 내가 다른 데는 근육이 없어서 힘이 쥐뿔도 없는데 손아귀 힘만 세거든. 나 한 손으로 나무젓가락도 부러뜨릴 수 있어! 아깐 긴장해서 손을 꼭 쥐어서 그래!”
시시각각 음울해지는 메스키트의 표정에 죄라도 진 기분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다음엔 함부로 제 신체를 다루지 않을게요! 그렇게 아프지도 않은데 저 대신 아파하니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요!
메스키트는 엘더가 빛이 감도는 손으로 내 손을 대신 쥘 때까지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포션 써. 너 많잖아.”
흰빛이 꼼꼼히 내 손바닥을 훑는 사이, 엘더는 데이지를 턱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포션을 이럴 때 쓴다고? 애 생명력은 네가 다 채웠잖아?
나는 반신반의하며 잡히지 않은 손으로 주섬주섬 포션을 꺼냈다. 솔직히 내가 포션을 받았을 때 이상함을 느끼긴 했다.
보통 게임에서 포션 색깔은 빨강, 파랑, 노랑, 형형색색이잖아? 온갖 색깔을 포션에 다 때려 박고 포션 색만 봐도 저게 뭘 회복해 주겠구나, 빨간색이면 생명력 포션이군, 하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이 포션은 투명하단 말이지. 눈앞에 길쭉한 포션 병을 가져와 찰랑 흔들어 보았다. 빛에 비추어 가까이 보아도 투명했다. 몽글몽글 작은 기포들이 둥둥 떠올랐다.
“다친 건 네가 다 치료했는데 왜 포션을 써?”
“꼬맹이 옷 망가진 게 속상한 거 아녔어?”
“그러니까 왜 포션을 써?”
베이직한 RPG 게임 플레이어 출신인 나의 지식과, 진짜 게임 세계 태생 엘더의 지식이 충돌했다.
이건 마치 초등학교 때는 0이 제일 작은 숫자로 배웠는데, 중학교 들어가니 숫자 앞에 마이너스가 붙을 수 있다는 사실을 들은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내가 감히 게임 세계 태생에게 어쭙잖은 지식을 비벼 보려는 것이 안타까웠는지, 메스키트가 자상하게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이건 인간들에게 포션이라고 불리지만, 사실 드라이어드들에겐 수액이라고 불린답니다. 정확히는 세계수의 수액이에요.”
난 내가 들고 있는 포션이 갑자기 홈쇼핑에서 별표 다섯 개 쾅쾅 박아 가며 광고하는 고로쇠 수액쯤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그것보다 더 좋겠지? 미친, 세계수의 수액이라니. 이것도 막 마시면 몸에 좋고 그런 건가? 내가 수험생일 때, 부모님께서 머리 좋아진다고 고로쇠 수액을 한 박스 사다 준 적이 있었는데…. 처음에나 맛이 신기했지….
“드라이어드들에게 옷이나 방어구는 속을 보호해 주는 나무껍질, 즉 바크나 다름없답니다. 바크가 상처를 입으면 수액이 흘러나와 감염을 막고 상처 복구 작용을 하죠. 세계수는 모든 드라이어드들의 모체나 다름없답니다. 그 세계수의 수액을 마법적인 힘으로 보존해둔 것을 인간들은 포션이라고 불러요.”
“하긴…. 열매에서 개화할 때부터 다 방어구 착용하고 나왔으니까….”
이거 먹이면 되는 건가? 아니면 바르는 건가? 데이지에게 포션 병을 건네주었다. 알아서 사용하겠지.
아이는 포션병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이후 일어난 일은 내가 상상한 것 중에 정답이 없었음을 보여 주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액체들은 순식간에 기화되어 데이지의 몸을 감쌌다. 데이지는 하얀 안개에 폭 싸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연기들은 빠른 속도로 데이지에게 남은 전투의 흔적들을 지워 갔다.
“와…. 완전 신기하네.”
“제이, 이제 마음이 좀 놓였나요?”
“이런 방식이면 좀 낫네! 경품으로 받은 포션, 아직 47개 더 있거든!”
“대단해요!”
내가 흥분해서 소리치자 데이지도 옆에서 거들었다. 엘더는 혀를 차며 겨우 이 정도의 손상으로 포션을 남발하는 드루이드는 나뿐일 것이라고 말했다.
남발이라니! 이건 내 기준으론 절대 남발이 아닌데! 마음 같아선 액체가 순식간에 기화하는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한 번 더 써 보고 싶었지만 뒤의 전투를 위해 참았다. 나중에 포션 파는 사람 있으면 전부 구매해야지.
메스키트는 엘더의 치료가 끝나자마자 다시 내 손을 꼼꼼히 살폈다. 데이지는 키가 작아서 위의 상황이 안 보이니 동그란 눈을 하고 열심히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다치신 거예요…?”
“아냐, 아냐. 별거 아냐. 진짜 별거 아냐.”
이미 엘더가 말끔히 치료한 손을 보여 주며 데이지를 안심시켰다. 불길 속에서 멀쩡히 살아 돌아온 너도 있는데, 기껏해야 손톱으로 쥐어뜯은 내 손이 무슨 대수겠니.
갑자기 메스키트가 내 손을 놓고 데이지를 불쑥 들어 올렸다. 평소처럼 메스키트의 허리에 대롱대롱 매달릴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데이지는 중간에 덜렁 멈춰 섰다.
데이지가 순식간에 팔에서 뿜은 줄기에 단검을 매달아 땅에 깊게 박아 넣어 고정시켰기 때문이다. 닻에 고정된 배처럼 데이지는 메스키트의 갑작스러운 풍파를 버텨 냈다. 하지만 뿌리의 힘이 아니었으므로 편법이긴 했다.
메스키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기분 좋게 웃었다. 그녀는 데이지에게 순발력은 정말 칭찬해 줄만 하다고 했다. 하지만 메스키트가 힘을 주니 허망하게 단검이 뽑혔다.
데이지가 아무리 기를 쓰고 뿌리를 박아도… 아직까진 메스키트가 건성으로 들어 올리는 것에도 버틸 수 없구나….
우린 기세를 몰아 첫 전투의 흥분이 가시기 전에 새로운 사냥감을 물색했다. 불이 호시탐탐 테라리움을 노리는 것은 맞는지 멀리 가지 않아도 금방 만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진짜 초보자 사냥터나 다름없었다.
한번 경험을 하고 난 데이지는 정말 거리낌이 없어졌다. 후반부에나 겨우 사용했던 붉은 꽃잎이 흩날리는 윈드 커터 같은 기술을 달려가면서 바로 사용했다. 마치 몬스터가 인식하기도 전에 선공을 날려 기선 제압을 하는 모양새였다.
작게 박살 나 크기가 작아진 불은 데이지의 일격에 금세 사그라들었다.
데이지의 전투를 보면서 느낀 건데, 아무래도 아이는 단일 특화, 즉 1:1 특화 딜러로 보였다.
다수의 몬스터를 상대하기엔 부족해 보일 수 있지만, 원래 저런 애들이 레이드 같은 보스전에선 빛을 발했다. 한 방 한 방 집중하여 내리꽂는 공격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자신감을 얻은 데이지의 공격은 무척이나 매서워서, 멀리서 보면 단검이 내리꽂힐 때 일어나는 풍압으로 불이 꺼지는 것처럼 보였다.
메스키트는 멀리서 점점 사정권까지 다가오는 또 다른 불을 보며, 불은 불을 부른다고 말했다.
데이지가 몇 번이고 쪼갠 후에 잡는 불을, 메스키트는 랜스를 한 방 꽂아 주는 것만으로 소강시켜 버렸다. 데이지는 그 모습을 무척이나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후에는 데이지의 공격 궤도가 좀 더 세밀해졌다.
감을 잡은 데이지가 불길에 피해를 입는 횟수가 확연히 줄어들자 이제는 엘더가 좀 더 여유로워졌다.
그러고 보니 얘도 한 공격하지 않나? 나뭇가지가 막 푸슉! 하고! 내가 스태프를 툭툭 치며 은근 눈치를 줘 보았다.
거 게임들 보면 힐러 손이 빌 때 가끔 딜링도 하던데. 막장 파티는 힐러가 딜러 미터기 순위 제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 경우는 게임 커뮤니티 공개 게시판에 저격 글이 올라와 온 유저들에게 조리돌려지는 수준이긴 하지만.
“난 모체를 직접 사용해서 하는 공격이라 불에겐 안 통해.”
내 기대하는 눈치를 알아챈 엘더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기가 공격할 경우 오히려 불 속에 장작을 밀어 주는 꼴이란다.
거 사람은 잘도 뻥뻥 뚫음서 불은 못 뚫네. 하지만 괜찮다. 엘더는 힐도 잘했고 얼굴도 예뻤다. 원래 힐을 잘해서 100점인데 얼굴까지 잘생겼으니까 200점이다.
데이지가 일정 수 이상의 불을 처치하고 난 후였다. 더 이상 사정권으로 몰려드는 불이 없어서 중간 휴식 타임을 가졌다.
포션을 아낌없이 들이붓고 있는데, 데이지가 대뜸 자기 다리를 보라며 가리켰다. 녹색 줄기가 아이의 다리를 빙글빙글 휘감더니 붉은 꽃과 푸른 나뭇잎을 피워 냈다. 피어난 것들은 하얗게 빛이 났다가 사라지고 그 대신 장갑과 세트로 보이는 진녹색 부츠가 자리했다.
저것은 곧 내 레벨이 올라서 데이지의 한계도 뚫렸다는 건데. 시스템 메시지가 팝업되거나 효과음이 울리거나 이펙트가 반짝거리는 것이 없어서 난 내 레벨이 오른 줄도 모르고 있었다.
중간중간 묘하게 상쾌한 기분이 솟아오르며 몸이 가뿐해지는 느낌을 받았는데 혹시 그게 레벨 업이었나?
“메스키트, 혹시 나 뭔가 달라진 거 없어?”
“글쎄요…. 볼수록 내 주인 제이는 더욱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점이요?”
메스키트가 장난을 가득 담아 웃으며 말하자 얼굴이 절로 화끈해졌다. 미치겠다, 별들아….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려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후후…. 농담이에요, 제이. 영혼의 한계가 높아졌군요. 착실히 성장하고 있어요.”
아마 몇 번 더 농담하면 내가 심장 마비로 죽지 않을까 싶다.
메스키트가 내 레벨 업을 검증해 주었다. 지금의 나는 레벨이 몇쯤이나 될까? 궁금해 죽겠다. 마음 같아서는 내 핸드폰에 넘치게 있는 다이아를 레벨 업의 재료로 쓰고 싶었다.
사랑도 돈으로 살 수 있다는데 왜 레벨은 돈으로 못 사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