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체구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선택으로 보였다. 마치 독침을 내리꽂는 매서운 말벌처럼 보였다. 마냥 어린아이처럼 보이던 데이지가 확연히 달리 보였다. 쟤도 드라이어드였지. 그것도 공격형.
골목에서 만난 인성 나쁜 패거리에게 랜스를 꽂아 버리던 메스키트의 매서운 눈빛과 나뭇가지로 상대를 꼬챙이 꿰듯 뚫어 버리고도 무심해 보였던 엘더의 모습이 함께 떠올랐다. 이들과 같이 데이지도 드라이어드였다.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큰 소리가 났고 까만 재와 섞인 먼지바람이 불과 데이지를 중심으로 크게 퍼졌다. 별다른 타격은 없고 눈만 조금 따가울 뿐인 바람이었지만 메스키트가 나와 엘더의 앞에 서서 방패를 들었다.
걱정과 다르게 별거 아니었나? 데이지가 한 번에 해치워 버린 건가? 데이지의 엄청난 기세를 보아하니 왠지 불은 그냥 꺼져 버렸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메스키트가 그렇게 경고했던 것이 무색하게, 알고 보니 정말 원 킬로 처치할 수 있었던 초보 몬스터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갑자기 엘더가 스태프를 크게 휘둘렀다. 먼지구름을 뚫고 튀어 오른 데이지를 향해 엄청난 불길이 따라붙고 있었다.
데이지가 극적으로 공중에서 방향을 틀어 피했다. 그와 동시에 엘더가 쏘아 보낸 흰 빛이 달라붙었다. 데이지의 발이 땅에 닿자마자 또 한 번 불길이 끈덕지게 쫓았다.
위험할 뻔했던 순간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해서 입을 틀어막았다.
데이지가 가까스로 불길을 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 가슴도 계단을 구르는 것처럼 한없이 밑으로 내려앉았다.
메스키트가 말했던 세 번의 방어는, 아이가 미처 피하지 못한 불길을 땅에서 솟아오른 모래 벽이 막아내자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 두 번.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돌아오라고 할까?”
“제이, 데이지 아이는 생각보다 잘하고 있어요. 발이 무척이나 빨라서 벌써 3번이나 위기의 순간을 넘겼잖아요? 이미 전투는 시작되었어요. 이건 쉽게 무를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나는 생각보다 몬스터의 난이도가 높아 메스키트를 내보낼까 고민하다가 마음을 다잡았다. 저 정도가 제일 약한 수준이면 앞으로의 것들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쉽진 않겠지.
매번 간만 봤다가 애를 뺄 순 없으니 지금은 믿고 응원해 줘야 하는 게 맞겠지? 지금 아이를 빼면 내가 데이지를 믿지 못한다는 인식을 줄지도 몰라. 아이는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데이지는 방금 또 한 번 솟아오른 불길을 땅을 미끄러져 피했다. 공중으로 피했다가 내려올 때 습격 받으면 피하기 힘들다는 것을 아이가 깨달은 것이었다.
비록 낮은 등급이지만 내가 가진 드라이어드들 중 유일하게 공격형인 아이였다. 특화된 것이 명백한데도 매번 겁을 먹고 내세우지 못하면 아이에게 독이 될 거야. 성장할 기회를 내 두려움이 박탈할 순 없어.
불꽃이 터지는 것처럼 쏘아진 불길에 또 한 번 모래 방어벽이 우뚝 솟아오른 것을 보며 결심이 흔들릴 뻔했다. 불의 기세에 두려울 법도 한데, 데이지는 꽤나 침착하게 불의 공격을 피하며 빈틈을 노렸다.
드디어 회심의 유효타가 꽂혔지만 불은 잠시 주춤할 뿐 타격이 없어 보였다.
“한 방을 노리지 않으면 안 돼요! 불은 생명력이 강해요! 서서히 끌 생각은 접어요!”
메스키트가 큰 소리로 데이지를 지도했다.
촛불에 작게 손바람을 흘려보내면, 촛불은 주춤하다가도 꺼지지 않고 다시 활활 타오른다.
하지만 크게 부채질을 하거나 후 불어 버리면 못 이기고 꺼져 버린다. 메스키트의 말뜻은 이렇게 들렸다.
그녀가 전투 전 조언했던, 한 번에 삼키지 못하면 나눠 삼키라는 뜻은 뭐였을까? 요령이 있을 법한데 왜 정확하게 알려 주지 않는 걸까?
마지막 모래 벽이 솟으며 데이지가 무적이 되는 기회가 모두 소모되었다. 그리고 나는 바싹 말라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데이지의 승리를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잡힐 듯하면서 도통 잡히지 않는 데이지에 불은 열이라도 받은 건지, 굵직한 불길을 가늘게 나눠 여러 갈래로 데이지의 행동반경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어코 불길이 데이지의 부츠 끝을 따라잡고 말았다. 하지만 동시에 엘더가 스태프를 휘둘러 쏘아 보낸 흰빛이 연기가 피어오르기도 전에 막아 냈다.
그러고 보니 엘더의 반응 속도는 무서울 정도로 빨랐다. 데이지에게 조금이라도 위기의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엘더의 흰빛도 함께 찾아갔다.
“최대한 멀리 피해! 한번 불이 붙으면 끌 수 없어!”
엘더가 데이지를 주시하며 소리쳤다.
한 번에 여러 불길을 피해야 하는 데이지는 여전히 빨랐지만 조금 벅차 보였다. 점차 불길에 닿는 횟수도 많아졌다. 그만큼 엘더의 흰빛이 번쩍번쩍 눈이 부실 정도로 터졌다.
내가 오두방정을 떨면 엘더가 집중하지 못할 것 같아서 애써 참으며 손을 쥐어뜯었다.
그때 멀리서 데이지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금방 불길을 피해 땅에 단검을 꽂으며 백스텝으로 피하는 바람에 무슨 말인지 확인하진 못했다.
그런데 저 불… 어쩐지 처음보다 좀 커지지 않았어? 착각인가? 분명 처음엔 내 머리통만 했는데 이젠 매고 다니던 책가방만 한데? 멀리서 보면 완전 캠프파이언데?
“불이 커졌어! 메스키트! 불이 커졌어! 뭐야, 저거 실시간으로 레벨 업도 해?”
“제이, 그건 데이지 아이의 힘을 흡수했기 때문이에요. 드라이어드는 불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 했죠? 지금 데이지 아이는 벽난로 앞에 놓여진 장작이나 다름없어요. 제가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할 수 있다고 했던 이유가 이 때문이랍니다. 불이 데이지 아이를 태워 가며 힘을 얻고 있어요.”
무슨 그런 끔찍한…! 지금 애의 성장이고 나발이고 애를 급히 불러와야 하게 생겼다. 또다시 데이지가 눈을 감는 일은 싫다. 내가 돌아오라고 소리치려고 할 때 메스키트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내 주인, 제이. 당신의 불안감은 굳게 연결된 영혼을 통해 데이지 아이에게 전염돼요. 물론 지금 불안하단 건 알아요. 하지만 더 믿어 줘야 해요. 그게 제이가 해야 할 일이에요.”
“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 저 꼬맹이 감을 잡은 것 같으니까. 비로소 메스키트가 했던 조언을 이해한 걸로 보여. 메스키트가 정확하게 조언하지 않은 이유는 그녀도 데이지 개량종은 처음이기 때문이야. 데이지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건넨 자신의 조언이 저 꼬맹이에게 독이 될 수 있으니 스스로 파악하길 바랐던 거야.”
엘더가 나를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눈은 데이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들도 이렇게 데이지를 믿어 주는데 주인이라는 사람이 덜덜 떨고 있으니.
나는 데이지에게 들릴 리는 없지만 속으로 열심히 아이를 향해 ‘난 널 믿어.’라고 소리쳤다. 전투에 방해되지 않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불길이 더 가늘어졌다. 거미줄처럼 퍼져서 사방에서 데이지를 옥죄이기 시작했다. 나는 위험해도 엘더가 늦지 않게 회복 스킬을 쓸 것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노력했다.
항상 피하기 위해 자세를 한껏 낮추고 있던 데이지가 갑자기 허리를 쭉 폈다. 그러곤 상체를 확 틀었다가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듯 단도를 쥔 두 손을 휘둘렀다.
붉은 꽃잎이 흩날리는 매서운 바람이 일며… 불이 두 동강이 났다.
대박! 처음으로 데이지의 유효타에 불이 제대로 반응한 순간이었다.
해치웠나? 기뻐서 두 주먹을 꼭 쥐고 세리머니를 하려는데… 반으로 뚝 갈라진 불이 꿈틀댔다. 시발 저게 안 죽네.
나눠져서 크기가 작아지기만 했을 뿐, 불은 꿈틀꿈틀 잘도 움직였다. 데이지는 둘이 붙는 것을 경계하며 다시 한번 차례차례 꽃잎이 흩날리는 날카로운 바람을 보냈다.
불은 작게 쪼개져서 4개가 됐다. 그런데 저렇게 수가 늘어나면 오히려 더 위험한 거 아닌가?
갑자기 메스키트가 앞으로 성큼 걸어 나가 랜스를 휘둘렀다. 랜스에서 피어오른 모래 뭉텅이가 세 개체의 불에 꽂혔다.
모래에 맞은 불은 데이지를 공격하던 것을 멈추고 방향을 틀어 메스키트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뒤로 더 물러서자.”
엘더가 뒤로 잡아끌었다. 그 와중에도 착실히 메스키트에게 스태프를 휘둘러 버프를 걸었다.
저게 어그로 끄는 건가요? 탱커들이 쓰는 도발 스킬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순간 게임 실사화 트레일러 영상을 보는 줄 알았다.
데이지는 훨씬 작아진 불의 정중앙에 단도를 꽂았다. 처음에 애먹었던 것은 거짓말처럼 불이 팍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러곤 지체 없이 메스키트에게 달려드는 불을 향해 달렸다.
매섭게 내던진 두 개의 단도가 뒤떨어진 양쪽의 불에 꽂히자, 불은 케이크 위의 촛불처럼 휙 꺼져 버렸다.
달려오는 속도가 줄지 않았다. 데이지의 양손에서 가는 식물 줄기가 튀어 나왔다. 채찍처럼 단도의 손잡이를 휘감자마자 아이는 멈춰 섰고 양팔에 힘을 크게 실었다.
단도를 붙잡은 줄기는 철퇴처럼 묵직한 파이널 샷을 마지막 불에게 날렸다.
드디어 불이 모두 잡혔다!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긴장과 함께 피로도 날아가 버린 것 같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상쾌함이었다.
데이지는 열기가 식지 않아 헉헉거리며 메스키트의 방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훌륭해요! 첫 전투치고 멋진 모습을 보여 주었네요.”
메스키트가 웃으며 데이지를 칭찬했다. 그리고 살짝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마지막에 급박하게 치달아 끝을 맞이한 전투에 넋을 놓고 있던 상태였다. 뒤늦게 메스키트의 눈짓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장하다! 내 새끼! 데이지!”
한달음에 데이지에게 뛰어가 끌어안았다. 데이지는 성한 곳이 없었다. 지금 보니 딜러가 꽁꽁 싸매고 있던 이유를 알겠어. 사방에 불똥이 튀는데 맨살로 전투에 임할 순 없지.
데이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고 긴장을 탁 풀었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몸이 축 늘어졌다.
“헤헤….”
“진짜 멋있었어! 완전! 난 날아다니는 데이지가 벌처럼 보였어! 진짜 빨라서 눈이 다 못 쫓을 정도였다니까!”
난 내가 불안에 떨었던 일들은 쏙 숨기고 데이지를 열심히 칭찬해 주었다.
불길을 피할 때 얼마나 잽쌌는지, 유효타를 꽂을 때 얼마나 멋있었는지, 무서울 법도 한데 전혀 겁먹지 않았던 용기와 급박한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아낸 전투 센스까지.
지금도 눈앞에 선명한 치열했던 전투를 한 컷 한 컷 다 집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엘더가 스윽, 하고 다가왔다.
“그 작은 불에 그렇게 쩔쩔매다니. 아직 한참 커야겠구나, 꼬맹아.”
“데이지, 쟤가 말은 저렇게 해도 힐은 기가 막히게 잘하더라. 서포트 일등 공신이었어!”
이 게임에 미터기가 있으면 엘더의 힐량은 천장 뚫었을 거다. 항상 거만한 태도가 다 근거 있는 태도였음을.
“감사해요.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위기 때마다 빛이 반짝반짝 쏟아져서 더 마음 놓고 임할 수 있었어요!”
데이지가 헤실헤실 웃으며 엘더에게 말했다.
과거 사이가 조금 안 좋았던 둘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엘더는 반짓값을 했을 뿐이라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 빨리 다이아나 챙겨 달라며 보채는 게 어쩐지 데이지의 감사 인사에 부끄러워서 그런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