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웬 메인? 이게 아이돌 그룹도 아니고 메인이 필요한가요? 메인 보컬?
“부케의 메인 말이야. 리더가 되어서 전투 방식의 중심이 될 드라이어드를 정해야지. 당연히 나지? 내가 너의 제일 첫 번째 드라이어드잖아.”
“부케가 여기서 왜 나와? 결혼식 부케? 웨딩 부케?”
갑자기 부케요? 아니 내가 부캐릭터의 부캐를 잘못 들은 건가?
“제이, 부케는 드라이어드들이 장난식으로 말하는 단어랍니다. 누군가 서로 다른 드라이어드들끼리 모여 있는 것이 꽃다발 같다고 했거든요. 정확히는 팀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엘더, 정확한 단어를 써야지.”
“그래서 메인은 누구로 할 거야?”
당연히 나지? 무슨 자신감인지 자꾸 자신을 가리키며 메인을 정하라고 성화였다. 나는 엘더를 빤히 바라보며 엘더가 꽃다발, 부케에 파묻혀 있는 상상을 했다.
엘더가 메인이면 부케 이름은 엘더 꽃다발? 촤하하. 그냥 웃겨서 웃었을 뿐인데, 내 웃음을 멋대로 해석하곤 “역시 내가 맞지?”하며 되물었다.
“왜 네가 메인이 되어야 하는데?”
“나처럼 우수한 회복형 드라이어드가 중심이 되어야 부케가 안정적이지. 날 메인으로 정하면 회복 스킬에 집중할 수 있어서 성능이 향상돼.”
“제이, 엘더 꼬맹이가 말하는 것은 팀의 리더를 정해 달란 뜻이에요. 제이의 영혼과 가장 밀접하게 교감할 드라이어드를 정하는 거죠. 둘 이상의 드라이어드가 있을 땐, 팀의 질서나 규칙을 위해서라도 하나를 정해 두는 것이 좋답니다. 전투가 일어날 시, 리더로 정한 드라이어드의 뜻이 곧 제이의 뜻과 동일하다는 의미에요.”
대표 영웅을 지정하라는 건가? 간혹 게임 중에 대표 영웅을 지정하면 그 영웅의 특수 효과에 따라서 팀이 받는 기본 버프가 있기도 하던데.
엘더가 말하는 것을 보면, 회복형 엘더가 대표 영웅이 되면 팀이 받는 회복 스킬의 회복량이 증가한다는 뜻 같았다.
마침 내겐 드라이어드의 특성이 골고루 있었다. 방어형, 회복형, 공격형. 3개의 특성 중 하나를 살려 전투에 집중해야겠지. 닥돌 극딜 파티가 될지, 안전 제일주의 방어형 파티가 될지, 전형적이고 안정적인 힐러가 멱살 잡고 가는 파티가 될지, 고심해서 정해야겠네.
방어형인 메스키트는 여기 드라이어드들 중 가장 노련해 보였고 매우 든든했다. 내가 메스키트를 바라보니 그녀가 커다란 방패를 들어 보여 주었다.
“메인엔 욕심이 없지만, 제가 메인이 되면 팀의 방어력이 상승할 거예요.”
확실히 듬직했다.
공격형인 데이지는 여기서 가장 경험이 없어 보이지만, 아마 데이지의 강한 공격을 위해 모든 지원이 몰리겠지.
메스키트는 든든하고 데이지는 경험이 필요해 보이는 새싹 딜러고 엘더는 얼굴이 예뻤다. 다섯 손가락 중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 해도 덜 아픈 손가락은 있는데, 그게 엘더다.
저 안하무인 드라이어드에게 리더를 맡기면 내 머리가 아플 거야. 저 봐, 벌써 메인이 된 것처럼 기세등등해서는. 준다고 한 적도 없는데.
“메인은 데이지야. 물론 마을 근처에서만. 마을에서 더 멀어지면 그땐 메스키트로 메인을 바꿀게.”
“뭐야? 왜 내가 아닌데?”
“넌 다이아 줄 테니 데이지가 다치면 회복이나 열심히 해. 버프도 열심히 써 주고!”
금세 뚱한 표정이 되길래 다이아로 회유했다. 버프랑 힐 한 번당 다이아 한 개씩 줄게. 엘더는 바로 순응했다.
“메스키트, 그래도 마을 근처는 불이 좀 약한 애들만 있는 게 맞지?”
원래 초보를 위해 마을 근처는 약한 몬스터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능한 마을 근처에서 오래 머물며 데이지와 나의 경험치 쌓기에 투자할 생각이었다. 전투 방식에 대해 숙지도 하고 퀘스트가 얼마나 어려울지 모르니 레벨도 미리 올려 두고.
“흠, 확실히 세계수의 힘에 억눌려 비교적 기세가 죽은 불이 많은 편이죠. 그렇다 하더라도 불을 얕봐선 안 된답니다.”
초보자 사냥터에서 약한 몹으로 기초 좀 쌓고 다른 사냥터로 옮기게 되면, 그땐 위험할 수도 있으니 메스키트를 메인으로 써서 안전하게 갈 예정이었다.
드디어 철책을 지나며 마을과 완전히 떨어졌다. 이제부터 세이프 존은 끝이었다.
걱정했던 것처럼 마을을 나서자마자 불이 튀어나오진 않았다. 메스키트는 가능한 불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았지만, 나는 경험치가 필요했다. 운영자는 불을 뿌려라!
잘 닦여진 길 위를 걸으며 아무런 어그로도 없는 한적함에 긴장이 탁 풀려 버렸다. 뭐야, 시시해. 나는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도란도란 대화를 시작했다.
“불은 어떻게 생겼어?”
“활활.”
엘더가 성의 없이 대답했다.
누가 그걸 몰라? 그럼 불이 활활 타지 살금살금 타냐? 메인 안 줬다고 삐쳐 가지고는.
“이글이글?”
“귀여워!”
데이지가 대답했다. 어쩜 귀엽기도 해라. 불이 이글이글 탄대. 우리 애가 글쎄 불이 어떻게 생겼냐고 물으니까 이글이글이래요! 사랑스러워.
“제이, 불은 저렇게 생겼답니다.”
그때 메스키트의 갑옷이 철컹! 하는 소리를 냈다. 그녀가 금세 내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오! 그 유명한 불은 대체 어떻게 생긴 건가요? 데이지가 허리춤에서 두 개의 단도를 꺼내며 자세를 취했다.
뚱한 표정을 지우고 진지해진 엘더가, 메스키트의 등 뒤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나를 끌고 뒤로 후퇴했다.
불은 겉 부분이 엘더의 말처럼 활활, 데이지의 말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촛불 같은 불이 아니라, 저건 꼭… 용암? 액체? 슬라임? 아니면 거머리 같기도 했다. 화재 현장처럼 불이 난 것을 상상했던 나는, 내 머리통만 한 액체가 꿈틀거리며 불을 뿜어내고 있는 것에 할 말을 잃었다.
그래, 저것도 명색이 몬스터라고…. 누가 봐도 몬스터처럼 생겼네.
용광로에서 방금 튀어나온 슬래그 같은 것이 주변의 모든 것을 태운 채 움찔거렸다. 몸을 줄였다 키우며 간헐적으로 태양 표면의 홍염 같은 것을 뿜어냈다.
“운 좋게 작은 개체를 만났네요. 하지만 조심해야 해요. 겉보기엔 작아 보여도 불은 불이랍니다.”
“저 정도면 물 뿌리면 꺼질 것 같은데….”
내 혼잣말에 엘더가 코웃음을 터뜨렸다.
“저 불은 물로 절대 끌 수 없어.”
“맞아요. 불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드라이어드뿐이에요. 내 주인, 제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데이지 아이에게 맡겨 보실 건가요?”
“전 할 수 있어요!”
데이지가 불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불의 먹잇감 역시 드라이어드죠. 조심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장작이 되어 버릴 거예요. 그래도 두렵지 않나요?”
메스키트가 데이지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하지만 아이는 전혀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전 맹세했어요. 전 이제 아픔도 죽는 것도 두렵지 않아요!”
데이지가 단호하게 소리쳤다. 순간 나와 데이지 사이에 무언가 연결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을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몸을 움찔 떨었다.
메인 설정. 공격형 데이지가 메인. 드라이어드들의 눈에 투지가 화르륵 타올랐다. 데이지의 팀 효과는 아마 전투력 상승일 것이라고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메스키트가 방패를 들어 올렸다. 방패 표면의 중앙부터 끝까지 눈부신 금빛이 뿜어져 나와 뒤덮였다.
방패를 전부 뒤덮은 빛은 순식간에 모래알로 변해서 데이지의 발밑으로 스며들었다. 데이지가 딛고 선 바닥만 둥글게 사막화된 것처럼 보였다.
모래들은 이따금 성난 파도처럼 튀어 올랐다. 발이 푹 꺼질 것처럼 위태해 보여도 그뿐이었다.
“공격 피해를 3번까지 막아 줄 거예요. 다시 걸어 주기까지 시간이 걸리니 최대한 불의 공격을 피해 가며 전투를 해야 해요.”
메스키트가 데이지에게 당부했다. 데이지는 자신의 발밑에서 요동치는 모래 웅덩이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엘더를 툭툭 쳤다. 엘더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왜?” 하고 물었다.
이미 메스키트와 멀리 떨어진 지 오래였지만, 엘더는 행여라도 내가 튀어 나가기라도 할까 봐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가장 잘 아는 나라서 결코 무모한 행동을 할 리 없는데도.
“넌 데이지한테 뭐 없어? 버프 같은 것 좀 걸어 줘 봐.”
“저런 작은 놈을 상대론 아까운데.”
“우리 애의 첫 전투인데 만반의 준비를 해 줘야지!”
나는 초등학교에 아이를 갓 입학시키는 학부모의 마음이 되어 엘더를 닦달했다. 엘더는 결국 무성의하게 데이지를 향해 스태프를 휘둘렀다. 하얀빛이 데이지의 다리에 감겨 들어갔다.
“스피드가 빨라질 거야. 밤톨만 한 너에겐 이 버프가 제격이겠지.”
잘했다고 칭찬해 주며 다이아를 쥐여 주고 토닥여 주니, 표정을 싹 바꾼 엘더가 웃으며 데이지를 향해 이리저리 스태프를 휘둘렀다.
데이지를 향해 엘더의 하얀 꽃잎이 여러 번 휘감겼다가 사라졌다. 진작 좀 그렇게 하지. 말 잘 들으니까 얼마나 예뻐?
데이지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작은 불을 노려보았다. 메스키트가 옆에서 랜스를 들어 멀리 불을 향해 가리키며 말했다.
“한 번에 처치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데이지 아이의 칼은 아직 무뎌요. 중요한 것은 장기전이 될수록 우리에겐 불리해진다는 점입니다. 데이지 아이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흠… 한 번에 삼키기 힘들면 나눠 삼키면 되겠죠?”
마지막 말에 데이지는 메스키트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걱정은 되지만 한번 도전해 보도록 해요. 물론 저는 이번에 선봉에 서지 않을 거랍니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설명드리는 것보다 직접 부딪혀 보는 것이 더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거예요. 겁이 나도 물러서지 말아요. 당신의 뒤에는 유능한 서포터들이 있어요. 그리고 한결같이 바라봐 주는 제이도 있죠.”
데이지는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낮추었다.
굽혔던 다리에 힘을 주어 도약하자 순식간에 작은 아이가 로켓처럼 높이, 높이 날아올랐다. 내가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의 엘더가 갑자기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데이지가 전투에 나서기 전까지 조금은 여유가 있는 태도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인격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높이 날아간 데이지는 몸의 방향을 바꾸어 단도를 한데 모아 세웠고 불을 향해 내리꽂혀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