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다른 테라리움들로 대피할 생각은 안 해 보셨나요? 더 앞 번호로 말이에요.”
듣기만 해도 난이도가 꽤 될 것 같은 퀘스트였다. 아직까지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다니.
RPG게임 경력으로 유추해 보자면 분명 보스 몬스터가 한 놈 버티고 있는 느낌인데. 시작부터 레이드인가? 튜토리얼 막 하고 있는데 레이드라고?
“세계수의 가지가 우릴 보호해 주고 있지만 우리 역시 세계수의 가지를 지탱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네. 공생 관계이기에 어느 한 곳 균형이 깨지면 위험하다네. 특히 과수원이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지. 설마 자네, 이것도 모르고 있었는가?”
“아,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말해 본 거예요, 그냥. 다 알고 있죠.”
모르고 있었지. 내가 이곳 돌아가는 구조를 어떻게 알겠나. 그럼 결국 다 타 버린 테라리움으로 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는 건데.
내가 머리를 굴리며 고민에 빠져 있는데, 메스키트가 작게 웃으며 손끝으로 내가 들고 있는 핸드폰을 가리켰다. 넹? 제 핸드폰은 왜요? 다이아 필요하세요? 메스키트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지!
“내 주인, 제이. 다이아예요.”
“다이아가 왜?”
[주인님! 다이아가 필요하세요?]
“악! 다이아 쓸 때 되면 알아서 부를게! 깜짝 놀랐잖아!”
[주인님! 그럼 말 나온 김에 다이아 좀 더 가져가세요! 수레가 가득 차서 다이아로 집을 짓고 있어요!]
[주인님! 그런데 다이아론 집을 지을 수 없어요! 다이아를 쌓으면 전부 무너져 버려요!]
“알아서 가져갈게! 아직 아냐!”
황급히 핸드폰을 껐다. 자기들이 무슨 시리도 아니고 다이아라는 말만 나오면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있어. 그런데 노인이 날 보며 “자네 왜 무섭게 혼잣말을 하고 있나?” 했다. 혼잣말이라뇨….
“제이가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요. 다이아는 그냥 보석이 아니랍니다. 저분이 말씀하신 세계수가 테라리움을 보호하고 테라리움의 사람들이 세계수의 가지에 도움을 주는 방법 말이에요.”
“다이아로?”
[주인님! 그럼 조금이라도 가져가세요!]
[주인님! 다이아가 없어서 굶고 계시는 거 아니시죠?]
성화에 못 이겨 다이아를 탈탈 털어다가 엘더에게 쥐여 주느라 이야기를 놓쳤다.
“그럼 이 의뢰를 받은 걸로 알겠네. 보상은 자네가 일을 완수하고 오면 차차 생각해 봄세.”
갑자기 두루마리 제일 아랫줄에 한 줄이 추가되었다. 보상 [???].
미확인 [???]에 노이로제가 걸린 나는 이 퀘스트를 받아야 할지 말지 정말 고민되었다.
아니 곱게 좀 알려 주면 안 되나요? 원래 사람이란 모름지기 빵빵하게 보장된 보상이 있어야 몸을 움직이는 건데. 설마 보상이 다이아면 전 이 퀘스트는 좀….
“보상 힌트 좀 줘요! 그렇게 가시면 안 되죠.”
“과수원에 찾아온 나비들이 아직 길을 떠나지 않았다네. 그리고 우린 그중 몇 마리를 잡아 채집통에 보관 중이지.”
저건 무슨 암호일까? 시적인 표현인가? 갑자기 여기서 곤충 채집이요?
“괜찮은 보상이네요. 제이, 노려볼 만해요.”
“나비 좋지. 이왕이면 노멀 필드의 나비들이면 좋겠는데.”
“전 나비를 아직 본 적 없어요! 꼭 보고 싶어요!”
그런데 드라이어드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나비가 대체 왜? 팔랑팔랑 날아다는 곤충 나비가 아니라 장비나 아이템 이름인가? 나는 노인이 무빙워크를 탄 것처럼 스르륵 사라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메스키트에게 물었다.
“나비는 왜? 좋은 거야?”
“후후, 역시 모르실 줄 알았어요.”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난 여기서 너무 지식이 부족해.
머쓱하긴 하지만 모른 걸 계속 두는 것보다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우리 과 교수님이 그럼 왜 전공 지식은 모른 채로 내버려 두었냐고 호통을 치실 것 같지만, 원래 유저들이 시험공부는 잘 안 해도 게임 내 공략은 고시 준비하듯 달달 외우잖아? 같은 거다, 같은 거.
“만약 노멀 필드의 나비를 얻게 된다면, 엘더 꼬맹이와 데이지 아이에겐 좋은 일이 될 거예요. 강해지는 법이 양분 열매를 많이 먹거나 전투를 많이 하는 것 외에도 존재한답니다. 이 경우 언젠간 한계를 느끼게 될 거예요. 갑자기 넘을 수 없는 벽에 맞닥뜨리게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죠.”
흠, 만렙, 즉 맥스 레벨에 도달했을 때의 이야긴가?
“나비는 드라이어드를 잘 찾을 수 있어요. 제가 뿌리를 내려 찾는 것보다 더 멀리, 더 정확하게 찾을 수 있죠. 특정 종의 드라이어드와 나비가 ‘허니메이트’가 된다면, 나비는 그 종의 다른 야생 상태의 드라이어드를 찾아내는 길잡이가 될 거예요.”
메스키트는 말을 멈추고 불시에 데이지를 쑥 잡아 올렸다. 아차, 하는 얼굴이 된 데이지가 메스키트의 허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렸다.
“만약 이 데이지 아이와 나비가 허니메이트를 맺는다면, 나비는 풀어 두기만 해도 데이지 아이와 모체가 같은 다른 드라이어드를 찾기 위해 훨훨 날아가게 된답니다. 허니메이트가 된 나비는 해당 모체가 아니면 힘을 흡수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거든요.”
왠지 펫 같은 느낌도 나고….
“다른 종을 찾은 다음엔 어떻게 해야 돼?”
“이겨서 굴복시켜야죠. 모체가 같은 종의 드라이어드가 둘 이상 모이면, 우린 그걸 포레스트라고 불러요. 포레스트에서 우성종, 즉 왕이 되면 더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어요.”
감이 온다. 같은 카드를 모아서 각성이나 초월, 돌파 같은 걸 시키는 시스템이구나.
“물론 그 드라이어드는 제이의 테라리움 아티팩트에서 생활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이 아이들이 더 강해지길 원한다면, 제이 역시도 영혼의 한계를 늘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답니다.”
다시 제 레벨이 문제가 되는군요! 그래, 그 퀘스트 어렵든 말든 한 번 도전이나 해 보자. 설마 튜토리얼 수준의 드루이드에게 엄청난 난이도의 퀘스트를 주겠어?
메스키트의 설명에 따르면 그 나비라는 건 결국 언젠간 얻어야 될 재료 같은 거잖아? 두루마리의 [???]를 지워 버리고 나비로 자체 수정해 두면 열심히 할 맛도 나네!
“좋아! 한번 가 보자!”
나는 두루마리에서 우리가 있는 테라리움과 28번째 테라리움을 직선으로 이었다. 26-27-28이 나란히 놓인 것이 아닌 V자 형태로 놓여 있어서, 굳이 중간의 27번을 거치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이 두루마리에 나와 있는 맵은 지나치게 간소화되어 있어서 지형이 상세하게 나와 있는 별도의 지도가 필요해 보였다.
마침 근처에 잡화점이 있었다. 지도를 구할 수 있다면 좋겠고 겸사겸사 여행에 필요해 보일 법한 물건들도 좀 더 구매해야지.
이미 주머니에 경품으로 얻은 생명력 포션과 비상식량이 잔뜩 있었지만, 다이아도 많은데 한계치까지 구해 두면 더욱 좋지.
***
“인벤토리는 정말 신기해. 마법 같은 시스템이야.”
나는 로브 주머니를 양손으로 잡고 탈탈 털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지? 겉으로 티도 안 나고. 사실 이 안에 한 아이템당 최대로 가질 수 있는 수치로, 잡화점 주인에게 추천받은 ‘여행을 떠나는 초보 드루이드 필수품들’이 가득 들어 있다.
물이며 비상식량이며 피로 회복제며 붕대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있다. 물은 이 거리 생계에도 중요하기에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이 팔 수 없다며 딱 30병만 살 수 있었다.
포션은 잡화점에서 구매할 수 없는 아이템이라 별도로 제조가 가능한 사람들이나 연금탑에서 사야한다고 했다.
이외에는 99란 숫자를 참 많이 봤다. 그렇게 샀는데도 무게는 안 느껴지고. 실제 세계에도 인벤토리가 있다면 무거운 전공 서적 같은 걸 들고 다닐 걱정 안 해도 될 텐데.
사실 전공 서적은 전부 학과 사물함에 넣어두고 다녔지만…. 내 인생에 들고 다니기 가장 빡쳤던 물건이 전공 서적 외에 잘 떠오르지 않았다. 신입생 때는 뭣도 모르고 그날 강의 과목 책을 다 들고 다녔었는데….
주머니 속에서 생각한 대로 쏙쏙 아이템들이 나오는 것이 신기하여 몇 번이고 그 행동을 반복했다.
엘더, 어느 주머니에 다이아가 있게? 왼쪽? 오른쪽? 사실 양쪽에 다 있었습니다. 아니, 틀렸는데 다이아를 왜 줘? 아까 많이 줬잖아? 그런 얼굴 해도 안 돼. 웃지 마. 예쁘게 웃는다고 내가 줄 줄 알았다면 정답이다.
28번째 테라리움을 가기 위한 지도는 세부 지형들이 죄다 담겨 있어서 크기가 꽤 컸는데, 놀랍게도 엘더가 한 번 보더니 전부 외웠다고 말했다. 내가 얼굴 믿고 구라 치지 말라 했더니 억울하단 표정으로 줄줄 외우더라. 역시 힐러라 지력 캐인가?
첫 전투를 떠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나는 모바일 게임으로 갈아탄 유저지만 한편으론 옛날 클래식 RPG 게임들에 대한 향수가 컸다.
용사가 몬스터 때려잡는 거 얼마나 멋있어? 물론 여기선 내가 때려잡진 않을 거지만. 나는 뭣도 없고 가진 건 다이아뿐이니, 뒤에서 구경하더라도 멋지게 응원해야지.
“내 주인, 제이. 테라리움 밖으로 나가면 곧바로 불을 만나게 될 거예요. 불은 항상 세계수를 먹어 치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답니다. 매우 흉포하죠. 준비되었나요? 힘든 싸움이 될 수도 있어요. 위험한 순간이 올 수도 있겠죠.”
마을을 둘러싼 해자 위의 다리를 건너기 전, 너무 하이텐션이 된 나를 메스키트가 진정시켰다. 그녀의 커다란 그림자에 갇혀 조곤조곤 목소리를 들으니 한껏 고조되었던 기분이 점점 진정되어 갔다.
“하지만 너무 걱정 말아요. 저와 드라이어드들이 항상 제이의 곁을 지킬 거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이가 다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텐션이 낮아지다 못해 조금 불안한 표정을 짓고 말았나 보다. 이번엔 메스키트가 살짝 몸을 비켜서며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다시 쏟아지는 햇빛을 맞으며 텐션이 슬슬 올라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메스키트가 반드시 구해 줄 것 같은 믿음이 있었다. 식물들이 햇빛으로 광합성을 한다면, 나는 메스키트의 웃는 얼굴로 광합성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혼이 풍만해지는 기분이었다.
“데이지 아이는 불과의 전투가 처음이죠? 오히려 정말 긴장해야 할 것은 우리의 매서운 검이 되어 줄 데이지 아인데 말이죠.”
데이지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메스키트 때문에 두 다리에 힘을 바짝 주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착각했음을 깨닫고 환하게 웃었다.
“전 준비되었어요! 드루이드님을 지키고 불은 전부 무찌를 거예요!”
“바로 그 각오랍니다.”
웃고 있는 두 드라이어드들을 보니 나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좋다.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좋았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어느새 다리의 끝이 보이고 있는데, 내내 고민에 빠져 입을 다물고 있던 엘더가 비로소 말을 꺼냈다.
“메인은 누구로 정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