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스는 따로 챙기고 반지를 보며 고민했다. 성능은 엘더를 위한 건데 정작 뽑은 드라이어드는 데이지란 말이지…. 가뜩이나 둘이 사이도 안 좋은데.
슬쩍 데이지의 작은 손을 잡고 반지를 끼워 보았다. 데이지의 새빨간 머리색과 새빨간 루비 반지는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엘더가 이 모습을 보며 “그거 내 건데….” 하며 안달 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드루이드님, 제겐 이 반지가 필요 없어요. 제 전투 보너스와 3개월이나 차이 나는 걸요. 1개월 정도 차이가 나면 또 모르겠지만….”
하긴, 의장용으로 하기에는 반지가 너무 아깝지? 아무리 스페셜 등급 장신구라 해도 맞는 드라이어드에게 안 주면 소용없다 이거네.
“엘더, 이것 봐라. 네 열매를 점지해 준 데이지가 전용 장신구도 뽑아 줬네. 절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애한테 자꾸 꼬맹이라고 시비 걸지 말고 잘 좀 해.”
난 둘이 좀 친해지란 의미에서, 정확히는 엘더와 데이지 사이에 관계 정립을 다시 하란 의미로 데이지에게 반지를 맡겼다. 내가 직접 줄 수도 있겠지만 엘더에게 반지를 뽑은 사람은 데이지란 걸 확실히 해 줘야겠지.
데이지는 반지를 쥔 채 멀뚱히 바라보았다. 엘더는 ‘기다려!’ 상태가 되어 데이지 손에 들린 반지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간식을 기다리는 강아지의 모습이다, 저건.
갑자기 데이지의 한쪽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갖고 싶으신가요?”
데이지는 집게와 엄지로 반지의 링 부분을 잡고 엘더를 향해 흔들었다. 갑자기 메스키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 모습 꼭… 그래요. 내 주인, 제이를 닮았네요. 제이가 엘더 꼬맹이에게 가끔 보이는 모습과 무척이나 닮아 있어요. 정확히는 다이아를 쥐고 엘더 꼬맹이를 흔드는 제이의 모습이겠죠?”
이래서 애 앞에선 찬물도 함부로 못 마신다고. 아니 그렇게 착하고 사랑스러운 데이지가…! 내게 뭘 배운 거니….
몹쓸 일이 일어났던 날을 생각해 보면, 드라이어드들 사이에 등급 차이가 자존심의 문제와 무관하진 않는 것 같던데. 그날 여럿 있던 드라이어드들이 유니크 등급 엘더 한 명의 존재만으로도 기가 팍 죽었지. 물론 메스키트는 인지 외의 존재였던 것 같고.
그럼 지금 엘더는 그런 드라이어드들이 우러러보는 유니크 등급이면서, 여기서 등급이 가장 낮은 노멀 등급 데이지에게 저렇게 대해지고 있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구겨질까.
역시 내 예상대로 엘더의 표정은 구겨진 그의 자존심을 대변하듯 잔뜩 찌그러져 있었다. 스태프를 쥔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아이고, 예쁜 얼굴 그리 쓰지 마라!
“엘더, 스페셜 등급이다, 스페셜. 반짝반짝! 7월 전투 보너스! 여기서 데이지랑 싸웠다가 애가 안 주면 어쩌려고 그래?”
데이지는 엘더의 어그로를 잔뜩 끌어 놓고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주도권은 아이가 쥐고 있지. 비록 태생 등급은 노멀이지만 성깔은 스페셜 못지않은 내 새끼였다.
그래, 어디 가서도 기죽지 않고 잘 지낼 것 같다. 잔뜩 위축되었던 처음의 모습과 달리 가슴을 쫙 편 지금의 모습을 보니 좋다
엘더는 내면의 싸움을 겨우 끝낸 것으로 보였다. 갑자기 메스키트가 내게 하던 것처럼 데이지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반지에 눈이 멀어 자존심을 굽힌 것이다.
비로소 둘의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엘더는 아이에게 한쪽 손을 쑥 내밀었다. 그리고 잘생긴 얼굴을 백 퍼센트 활용하여 해사하게 아이를 바라보았다.
“줘.”
겉모습만 보면 프러포즈의 그것이었다. 비록 반지의 위치가 반전되어 있지만. 나는 웃겨서 죽을 것 같았다. 메스키트에게 매달려 미친 듯이 웃었다.
주위에서 웅성웅성, 뭐야, 뭐하는 거야, 프러포즈야? 비는 거 아냐? 그렇지 않아도 1등 당첨 때문에 잔뜩 쏠려 있던 관심과 집중이 온갖 날조로 변형되었다.
“저는 드루이드님을 닮아 자비로우니 여기까지만 할게요.”
도도한 얼굴은 금세 깨졌다. 볼 재미 다 보았는지, 데이지의 얼굴이 다시 화사한 얼굴로 변했다.
엘더는 결국 중지에 루비 반지를 끼웠다. 반지를 낀 엘더의 주변에 옅은 붉은 아우라가 감돌았다. 오, 특수 이펙트.
지금이야 반지를 얻었으니 몇 시간 정도는 고분고분해지겠지만, 날 때 인성 어디 안 간다고, 금세 또 티격태격하는 둘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이제 아이템 얻을 것 다 얻었으니 레벨 업 하러 가자! 나의 이 결심에 장작을 넣는 것처럼, 슬쩍 나타난 웬 노인이 두루마리를 건넸다. 귀신처럼 소리 없이 나타난 노인의 존재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메스키트가 놀란 얼굴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어요, 해를 가할 것 같지 않아서 내버려 두었는데.”
“드루이드여,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었는가? 부디 나를 도와주시게. 나는 세계수의 26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자네.”
느낌상 저것은 퀘스트였다. 초보자 퀘스트. 메인 퀘스트. 튜토리얼! 생긴 것도 꼭 첫 퀘스트 주는 NPC처럼 생겼잖아!
설레는 마음을 안고, 나는 굉장히 친절한 사람이란 것을 어필하며 웃었다. 누가 봐도 퀘스트 잘해 줄 것 같은 얼굴로.
퀘스트를 받아 줄 사람을 찾으셨나요? 아주 잘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좀 튜토리얼 시작도 하기 전에 캐릭터 뽑기 하고 랜덤 박스도 돌리고 장비도 마련하긴 했지만, 한국 유저들이라면 본디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청개구리 같은 습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가끔 경로를 이탈하여 가지 말라는 막힌 맵도 두드려 보고 이진법 대미지로 NPC도 좀 죽여 보고, 하지 말란 짓만 골라 하다가 열받은 GM이 보낸 경고 쪽지도 좀 받아 보고, 그래야 게임을 전부 씹고 뜯고 맛봤다고 할 수 있지요.
심지어 저는 헤비 과금러보다 돈이 많으니 그 돈 쓸 수 있는 곳에 다 찔러 좀 봤습니다. 이게 바로 사교육입니다. 게임계 사교육!
초보 퀘스트 받기 전에 초보가 아닌 스펙으로 몬스터들을 스킵하는, 아주 높은 곳을 바라보는 후천적 다이아 수저!
그렇지만 게임 세계에 들어왔으면 정석대로 퀘스트도 받아 보고 그래야지! 게임은 노가다와 퀘스트의 적절한 비율로 이뤄져 있는 거잖아? 드디어 내게도 퀘스트가!
여기도 업적 시스템 있었으면 좋겠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가만 보니 자네… 영혼이 아직 많이 성장하지 않았군.”
헐, 퀘스트 시작 가능 레벨이 달린다는 건가? 설마 이 게임, 시작부터 조작법 따라가야 소소하게 경험치를 얻을 수 있고, 그 경험치로 퀘스트 시작 레벨에 도달하는 시스템인 건가? 하지만 난 정석 루트는 개나 줘 버린 버그 플레이어나 다름없는데.
노인이 줬던 두루마리를 다시 뺏으려고 하길래 열심히 회피했다. Miss! Miss!
“아니에요! 잘 봐요! 저는 달리지만 제 드라이어드들은 얼마나 훌륭한데요!”
얘들은 초보자 덱이 아니잖아요! 제가 비록 쪼렙이지만 그것을 커버할 만큼의 스펙은 만들어 두었는데요! 난 최대한 메스키트를 앞세워 어필했다. 잘 봐 봐요. 저는 스페셜 등급도 있어요!
메스키트가 내 장단에 맞춰 주었다. 웃으며 내 어깨를 감싸 안고 방패를 빼 들어 자세를 취해 주었다. 어쩜…. 멋있어….
“이게 좀 위험한 부탁인데….”
높은 난이도는 좋은 보상을!
“완전 사람 잘 찾아오셨네요! 저예요! 머리론 아니라고 하시지만 이미 가슴으론 제가 인재인 걸 알아보셨잖아요! 어서 본론으로 넘어가요, 우리.”
노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럼 두루마리를 한 번 열어 보게나.” 하고 말했다. 이 두루마리가 퀘스트 창을 대응하는 물건이구나. 두루마리가 꽤 길어서 메스키트가 대신 윗부분을 잡아 주었다. 덕분에 알맞은 눈높이로 안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거대한 나무가 제일 중심에 그려져 있고 아래는 마치 개미굴 도식도 같은 그림이 있었다.
거대한 나무는 세계수인가? 노인은 개미굴 같은 곳의 한 부분을 짚으며 그곳이 세계수의 26번째 테라리움, 즉 우리가 있는 마을이라고 했다.
월드맵이었군. 그리고 다음은 잉크로 X표가 쫙쫙 그어진 곳을 가리켰다. 숫자 28이 쓰여 있었다.
“여기가 얼마 전, 불의 습격으로 전소당한 세계수의 28번째 테라리움일세. 이상한 일이지. 세계수의 가지가 보호하는 테라리움은 불이 쉽사리 넘볼 수 있는 곳이 아니라네. 특히 20번대는 세계수와 아주 가까운 테라리움들이야. 세계수의 가지가 보호하는 힘도 크지.”
그러고 보니 데이지도 저 이야기를 한 적 있지.
나는 노인의 말을 새겨들으면서 아래로 쭉 내려가 보았다. 확실히 숫자가 50번이 넘어가도 그림은 온전했다. 60번대부터 X표가 눈에 띄게 늘었고 100번대 이후는 전멸이었다.
“불이 갈수록 힘이 세지고 있다고는 해도 28번째 테라리움이 당할 만큼은 아닐 거란 말일세. 분명 그곳도 이곳만큼은 아니더라도 드루이드들과 드라이어드들이 포진하고 있었을 걸세. 만약 정말 위험했다면 인접한 다른 테라리움들이 협력을 해 주었겠지.”
메스키트가 노인의 말에 공감했다. 불이 세계수를 위협하는 유일한 적이라고 해도, 아직까진 세계수의 힘이 건재하다고 했다. 그녀의 표정은 세계수에 대한 자부심과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절대 그럴 리 없다며.
“그래서 우리 26번째 테라리움을 포함하여 20번대 테라리움들이 모두 비상이 되었지. 우리도 결코 안전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말일세.”
“원인이 알고 싶은 거군요.”
“그렇다네. 정확한 원인을 알고 기왕이면 해결할 실마리가 있다면 해결하고 오는 것도 좋겠군. 사실 자네 말고도 조사차 드루이드들을 많이 파견했다네. 하지만 돌아온 자들은 아직까지 없지.”
두루마리 제일 끝엔 ‘세계수의 26번째 테라리움 안위를 위하여, 귀하에게 28번째 테라리움의 진실을 조사할 것을 요청드립니다.’라고 쓰이며 마무리되었다. 초록빛으로 반짝이는 나무 문양 도장이 크게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