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미니어처가 들어 있는 상자를 안고 데이지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데이지를 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세상 사람들! 내 행운의 꽃 좀 보세요!
“제가 좋은 걸 뽑은 게 맞죠?”
“그럼! 완전 갖고 싶었어, 이거.”
미니어처 분수대에선 크리스탈처럼 반짝이는 맑은 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물에 손이 젖지는 않았다. 분수대 위엔 앙증맞은 무지개도 걸려 있었다.
그런데 막상 뽑기는 뽑았는데 이걸 어떻게 아티팩트에 배치를 하나? 그냥 갖다 대면 되나?
되네. 내가 노렸던 필드 정중앙에 하얀 분수대가 본래의 크기로 돌아가 예쁘게 자리 잡았다. 나는 유리 돔에 손을 댄 채 이 각도 저 각도로 돌려 보며 황홀감에 젖었다. 아, 이거 꾸미는 맛이 나네.
조금 자신감이 생겨서 남은 박스를 모두 열었지만, 딱 한 번 한 자릿수 확률인 거대한 곰 인형이 나오고 죄다 울타리였다. 0.1%의 하우스가 나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울타리 박스가 맞을 거야. 아니면 이렇게 내게 잔인할 수 없어.
“곧 행운권 추첨이 있습니다!”
밖에서 메가폰 소리가 들렸고 더 깔 상자도 없어서 자리를 털었다. 랜덤 박스 대리 구매도 생각해 보았는데 안내원이 절대 안 된다고 못 박아서 시도도 못 해 봤다.
행운권을 수십 장 쟁여 둬도 불안해서 밖의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개당 1다이아에 죄다 매입했다.
이 중에 하나는 당첨되겠지. 떨리는 마음을 안고 추첨이 시작되려는 상가 광장 중앙으로 향했다.
엘더에게 슬쩍 행운 버프 쿨이 아직 안 됐냐고 물었는데 아직이라고 답이 돌아왔다. 아 거참 잘생긴 얼굴 말곤 쓸모가 없네!
“먼저 5등! 50명! 포션 1개입니다!”
메가폰을 쥔 사람이 숫자를 불렀고, 나는 포션 48개가 생겼다.
“그다음 4등! 30명! 여행용 비상식량 1개입니다!”
또 숫자를 불렀고, 나는 비상식량 25개가 생겼다. 내던진 행운권 뭉텅이가 허공에 흩날렸다.
“…3등! 5명! 이번엔 다들 탐이 나는 물건일 텐데요! 드라이어드 특제 영양제 1개입니다!”
역시나 나는 영양제 5개가 생겼다.
미리 나가서 받을 준비를 하는 내게 진행 요원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상자째로 경품을 떠넘겼다.
영양제는 내 드라이어드들이 잘 사용해 주었다. 뭐가 좋아? 하고 물으니 좀 더 튼튼해졌다고 답을 해 주었다. 방어 스탯이 오르는 건가?
“2등! 1명! 테라리움 아티팩트에 장식할 수 있는 ‘눈송이를 뿌리는 구름’을 가져갈 행운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두구두구두구…!”
앗! 저건 좀 탐이 난다. 스노우 필드 드라이어드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는 아이템이라 내게 그다지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쁘지 않은가?
저 몽글몽글 떨어지는 작고 귀여운 눈송이들을 보라며…. 혹시 모르니 갖고 있어도 좋을 것 같은데!
줄창 경품을 타 갔던 나지만 저건 당첨이 안 됐다. 왜죠? 나는 경품을 타가는 사람의 뒤에 재빨리 붙어 직거래를 시도했다.
“님, 그거 파실? 제가 삽니다.”
그러나 한정 템이라고 쉽사리 안 팔아 주었다.
“부르시는 값에 삽니다. 부담 갖지 말고 제시해 주세요.”
선 제시를 시도하자 머뭇거리며 “그럼… 300…?” 하고 말꼬리를 올렸다.
나 참 그거 얼마나 한다고. 수레나 보내요.
“스노우 필드 물건은 어디다 쓰게?”
“예쁘잖아!”
눈송이 구름 미니어처를 들고 싱글벙글 웃자 엘더의 표정이 구겨졌다.
왜! 뭐! 너도 쓸데없는 거 좋아하잖아! 금으로 만든 노래하는 새 조각상이나 금으로 만든 모조 하프는 어디다 쓸 건데?
엘더가 반짝거리는 것에 환장한다면 나는 예쁘고 아기자기한 것에 환장했다.
“대망의 1등! 오직 세계수의 26번째에서만 구할 수 있는 한정 장신구! 스페셜 등급의 지혜의 루비 반지를 가져갈 행운의 주인공은 누가 될까요?”
저요! 저요! 잇츠 미! 나는 평소 믿지도 않는 온갖 신을 다 찾아서 기도했다. 저건 꼭 갖게 해 주세요!
“행운의 숫자는 226번! 226번 행운권을 가진 드루이드님은 이쪽으로 와 주세요!”
226! 행운권을 넘기는 손이 빨라졌다. 하지만 225, 227이 있는데 226이 없었다. 빌어먹게도 226번이 없었다.
누구냐! 누가 타 가냐! 당첨이 안 되면 다이아를 주고 살 테다! 하지만 메가폰이 애타게 226번을 불러도 앞으로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226번! 안 계시나요?”
차라리 아예 나오지 말아라. 그럼 다음 번호를 부를 거 아냐? 그때였다.
“어… 드루이드님.”
데이지가 뒤에서 옷을 잡아당겼다. 데이지의 손엔 별 모양 종이가 들려 있었다. 아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제 손에 쥔 종이를 내게 보여 주었다.
“제가 226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너무 간절한 나머지 잘못 들은 건가?
데이지가 내민 종이를 보니 숫자 226이 적혀 있었다.
이백이십육, 숫자 2 두 개, 6 한 개, 순서대로, 이렇게 써진 숫자 맞지?
내가 숫자를 착각한 건 아닌지 떨리는 손으로 자꾸 숫자를 확인했다. 행운권 수백 장을 산 내가 아니라 한 장 가진 데이지가 1등이라고? 아무리 데이지가 나의 행운의 꽃이라고 해도 이렇게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니.
“제이, 1등 번호가 맞는 것 같은데 안 나가 볼 건가요?”
메스키트가 놀란 눈으로 허리를 숙여 나와 함께 행운권의 숫자를 바라보았다.
“226번! 안 계시나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여기요! 여기요! 우리 애가 226번을 뽑았어요!”
나는 데이지의 손을 잡아끌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또 내가 나타날 줄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진행 요원이 메가폰을 내렸다.
만약 당첨이 되지 않으면 반지를 타간 사람을 백지 수표급의 다이아로 현혹시켜서라도 소유권을 양도받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역시 직접 당첨되는 쪽이 기분이 더 째졌다.
물론 내가 당첨된 것이 아니라 내 드라이어드가 당첨된 것이지만. 내 드라이어드니까 그게 그거 아니겠어?
진행 요원은 행운권 번호를 확인하곤 내게 반지가 있는 유리 케이스의 열쇠를 넘겼다. 축하한다는 말과 부럽다는 말, 짝짝짝 박수 소리가 모두 내게 향했지만 아무것도 신경 쓸 수 없을 정도로 어안이 벙벙했다.
솔직히 데이지가 랜덤 박스에서 분수대를 뽑았을 때보다 더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역시 데이지 널 만난 건 엄청난 행운이야!”
데이지의 두 손을 꼭 잡고 소리쳤다. 로또 복권도 5등이나 겨우 당첨되어 본 난데, 오직 단 1명 뽑는 1등에 당첨되다니!
알고 있는 온갖 미사여구를 다 사용하여 데이지가 내게 얼마나 행운인지 찬양했다. 데이지의 볼은 머리색처럼 새빨갛게 변했고 수줍게 웃었다.
“안 열어 볼 거야?”
스윽, 하고 나타난 엘더가 내 어깨를 콕콕 찔렀다. 반짝이는 눈은 과수원에서 무릎 꿇고 날 바라보았던, 그때의 강아지 같은 눈이었다.
평소 반항적이고 까칠한 표정을 전혀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던 엘더는,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순해 보였다.
진짜 알기 쉽다. 물질 만능 주의. 다이아 만능 주의인 내 난쟁이들과 참 잘 지낼 것 같은데….
“열어야지!”
작은 홈에 열쇠를 넣고 돌리자 열쇠가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이 무슨? 갑자기 사라지는 열쇠에 당황한 것도 잠시, 유리 케이스의 문이 열리며 아름다운 루비 반지와 마주하게 되었다. 오, 영롱하다. 루비는 실제로 처음 본다.
일정하게 파인 홈을 따라 촘촘하게 작은 루비 알이 박힌 두꺼운 은색 링, 그 위에 자리한 은색의 나뭇잎 두 장에 포옥 싸인 석류알같이 동그랗고 새빨간 루비. 루비 안엔 작은 불이 갇혀 있는 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반지는 손난로처럼 따뜻했다.
장식이 화려하여 거추장스럽게 보이기는 해도, 원래 게임에선 쓸데없이 화려한 장신구일수록 엄청난 아이템이었다.
반지를 홀린 듯이 보고 있는데 진행 요원이 갑 티슈 두 개를 이어 붙인 크기의 나무 상자를 추가로 건넸다.
짙은 밤색의 나무 상자 케이스 겉면엔 금박으로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반지 케이스 치고는 너무 크지 않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진행 요원이 직접 케이스 상자를 열어 안을 보여 주었다.
3개의 홈과 각각의 홈을 이은 금색 줄. 홈은 각각 반지, 목걸이, 귀걸이를 위한 자리처럼 음각으로 파져 있었다. 삼각형의 정중앙엔 이상한 마법진 같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뭔데요? 내가 궁금증을 가득 담아 바라보자 그가 지혜의 루비 장신구 스페셜 등급 컬렉션이라고 답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반지를 포함하여 세트로 묶이는 장신구 두 개를 더 모으면 특별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고…. 제가 수집에 또 환장하는 건 어떻게 아시고.
“특별한 보상이 뭔데요?”
“3개의 장신구의 성능을 뛰어넘는 지혜의 루비 티아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얻는 데 성공하신 분은 계시지 않지만….”
앞으로 이렇게 1등 2번 더 하라는 건가요?
지혜의 루비 티아라는 게임에서 종결급 아이템이란 거겠지. 종결 좋다.
보통의 나라면 종결은 무슨 남들의 반 이상만 하자, 하고 생각했겠지만! 난 종결 노려도 된다. 다이아가 종결을 향한 길을 깔아 주고 있었다.
이 무한에 가까운 다이아들을 가지고 끝을 노리지 않으면 더 말이 안 되는 거겠지.
“나머지도 추첨으로 얻어야 하나요?”
“추첨으로 얻으실 수 있는 건 반지뿐입니다.”
“그럼요?”
“나머지의 행방은 묘연하답니다.”
오, 오래된 RPG 감성이 내 심장을 강타했다. 찾아라, 스페셜 등급 장신구를 세계 곳곳에 뿌려 놓았으니! 알지, 알지. 한 번에 얻을 수 있으면 그게 종결 아이템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