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운데에 커다란 물음표가 박혀 있는, 내 주먹만 한 상자들이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옆엔 랜덤 박스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들과 확률이 나열되어 있는 안내판이 있었다.
“헐? 이 하우스들은 뭐예요?”
여러 가지 모양 집들의 이미지들이 확률 0.1% 문구와 함께 안내판 제일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굴도 있고 오두막도 있고 신전도 있고 오래된 고성도 있었다. 종류는 다양했다.
“한정된 아티팩트 공간을 최상으로 꾸밀 수 있는 아주 효율적인 가구죠! 아직 테라리움 아티팩트가 확장이 덜 된 상태라면 이보다 더 좋은 아이템이 없습니다!”
완벽해! 미니 하우스라니! 저건 데이지랑 어울릴 것 같고 저건 메스키트랑 어울릴 것 같고 저건 엘더가 환장할 것 같고…. 갖고 싶은 것이 잔뜩이라 눈이 돌아갈 것 같았다.
그림들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희망 리스트를 추렸다. 하우스는 물론 저 깨끗한 물이 펑펑 샘솟는 하얀 분수대도 무척이나 끌렸다. 무지개도 걸려 있잖아? 확률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올 때까지 까면 된다.
“헉헉, 여기 있는 랜덤 박스 다 살게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요!”
“과도한 도박은 정신 건강에 해롭습니다. 저희 공방은 이 원칙을 중시하며 드루이드 한 분께 한정된 수량만 팔고 있어요.”
“아니! 내가 사겠다는데! 이유가 왜 필요해요! 애초에 정신 건강을 걱정하면 뽑기 시스템은 왜 있는데요?”
내 다이아를 가져가라고! 내가 매출 올려 주겠다고! 내 성화에도 안내원은 룰이라 어쩔 수 없다며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암울했다. 왜 다이아가 있는데 무한대로 뽑기를 하지 못해….
할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하여 눈앞의 랜덤 박스 한 무더기를 결제했다. 내가 구매할 수 있는 수량은 딱 200개였다. 상자 한 개당 15다이아, 총 3000다이아가 사라졌다. 그리고 구매 대가로 행운권 묶음을 받았다.
갑자기 주위로 얼마 없던 손님들이 죄다 모여들었다. 오, 랜덤 박스 까나 봐. 구경하자! 뽑기 할 때 옆에서 구경하는 재미도 있긴 하지.
첫 상자에선 나무 울타리 한 피스가 나왔다.
이 무슨…. 안내판을 보니 울타리 아이템은 확률 80%. 한마디로 더미 아이템이었다. 확률 조작하려고 넣어 놓는 수량 채우기용 아이템. 뒤도 안 돌아보고 옆으로 치워 버렸다.
“이거 버리시는 거면 저 주시면 안 되나요?”
재빨리 상자를 짚은 사람이 내게 말했다. 아 거 뭐 버리는 건데 알아서들 하쇼. 아니, 잠깐만.
“막 주워도 상관없는데, 그럼 행운권 저 주세요.”
“뭐, 어차피 당첨될 거란 기대는 안 했으니까요. 여기요!”
숫자가 적힌 별 모양 종이를 넘겨받았다.
“저도 행운권 드리면 버리신 거 주워도 돼요?”
“넹.”
그 후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행운권을 넘겼다. 부캐릭터를 잔뜩 생성해서 편법으로 파밍 작업하는 기분도 조금 들고….
행운권을 잘 모아다가 로브 주머니에 넣고 상자를 마저 깠다.
하얀 울타리, 철제 울타리, 가시가 있는 울타리, 황금 울타리, 아 이건 엘더 주고, 돌로 만든 울타리, 모조 꽃이 핀 울타리….
장난? 미친 세상 모든 울타리를 다 수집하게 생겼네.
알고도 지르지만 역시 더러운 확률 게임. 주위에서 울타리의 신이라며, 운이 어지간히 없다며 소곤소곤한다.
말로 자꾸 사람 명치를 때리네…. 깐 박스는 많은데 아직 울타리 이외의 것은 못 봤다.
“이거 혹시 울타리 박스예요? 울타리만 들어있어요”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은 여기 안내판에 전부 있답니다.”
“울타리만 나오잖아요! 이건 랜덤 박스가 아니라 울타리 박스예요!”
“확률적인 부분에선 저희가 도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이미 사용하여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아이템은 환불이 불가능해요.”
내가 설마 환불이라도 해 달라고 할까 봐! 환불이 문제가 아니라 나는 구매할 수 있는 랜덤 박스가 한정되어 있는데 죄다 울타리만 나오잖아요! 하우스는커녕 울타리로 집도 짓겠는데요! 차라리 울타리만 나와도 그러려니 넘기게 구매 제한을 풀어 주든가!
“드루이드님, 뭐 하세요?”
노멀 필드 코너로 쇼핑을 보내 놓았던 데이지와 엘더가 돌아왔다. 상자가 텅 비어 있는 엘더에 비해 데이지는 다이아가 거의 그대로였다. 아니 왜 다이아를 못 쓰니…. 저축할 거니?
더 달라고 상자를 내미는 엘더에게 다이아를 털어 주며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다이아 펑펑 쓰는 법부터 가르쳐야 하나? 뒤에 뭔가를 숨기는 걸 보니까 뭘 사긴 한 것 같긴 한데.
“엘더, 마침 잘 왔다. 나 그 행운 주는 버프 좀 걸어 줘.”
“뭐 하는 건데?”
“이게 랜덤으로 아이템이 나오는 상자인데 몇십 개째 울타리만 나오잖아! 난 분수대도 갖고 싶고 하우스도 갖고 싶단 말이야. 울타리 말고 좀 좋은 게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도 울타리, 울타리, 염불을 외다 보니 게슈탈트 붕괴가 올 것 같았다.
갑자기 엘더의 눈매가 더러워졌다. 날 무슨 도박 중독자쯤으로 보는 눈이었다.
“내 행운 버프를 무슨 그딴 곳에 쓰려고 해.”
“야, 이게 나 좋자고 하는 짓이야? 엉? 이게 다 너희들 잘되라고 하는 거 아냐? 테라리움 아티팩트에 응? 막 물이 콸콸 흐르는 멋진 분수대가 있다고 생각해 봐! 황금으로 만들어진 건 아니더라도 신전도 막 으리으리한 게 있고! 엉?”
사실 나 좋자고 하는 일은 맞았다.
“메스키트한테 걸어 준 지 얼마 안 돼서 못써.”
내 말에 설득당한 엘더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럼 얜 나 대신 다이아를 축내는 것 외에 쓸데가 없는데. 아니 잘생긴 얼굴은 쓸데가 많지. 울타리만 나와서 더러운 기분이 좀 정화된 것 같아.
“아! 데이지, 여기 상자 하나 열어 볼래? 그냥 열기만 하면 돼.”
다이아를 주자마자 쓰러 갈 줄 알았던 엘더도 랜덤 박스가 궁금한지 가까이 다가왔다. 어느새 말도 없이 돌아온 메스키트도 랜덤 박스 안내판을 유심히 구경하고 있었다.
“제가 좋은 걸 뽑으면 드루이드님의 기분이 좋아지시는 건가요?”
“당연하지! 울타리만 아니면 돼! 울타리만 아니면! 부담 갖지 말고 그냥 열기만 하면 돼. 이것 봐. 이렇게 상자 뚜껑을 열면… 오, 뭔가 많다.”
처음으로 울타리 한 피스만 덩그러니 들어 있는 것이 아닌, 뭔가 잔뜩 들어 있는 상자를 열었다. 신이 나서 꺼냈는데, 시발 하얀 울타리 10세트.
“앗! 발전하고 계시네요! 울타리 10세트는 확률 15%에요!”
열심히 울타리를 줍줍 하던 구경꾼이 축하를 해 주었다. 울타리 한 피스나 10세트나 뭐가 다른데요. 아놔, 다 같은 울타리지. 어쨌거나 그는 내가 버린 것을 냉큼 주워 갔다.
“자 봐…. 쉽지…?”
유 캔 두 잇. 데이지가 다이아가 아직 많이 남은 상자를 내게 돌려주곤 내 주위에 어지러이 흩어진 랜덤 박스를 하나 골라잡았다.
그리고 뚜껑을 열었다. 놀랍게도 처음으로 울타리가 아닌 아이템이 나왔다.
넝쿨 지지대. 테라리움 아티팩트에 배치 시 넝쿨형 드라이어드들에게 안락함을 주는 아이템이라는 설명서가 함께 들어 있었다.
다른 게 나오긴 했는데 딱히 나에겐 쓸데없는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버리기 무섭게 두 명의 구경꾼이 서로 가져가기 위해 싸움이 일어났다.
“별로인 물건이 나온 건가요?”
조금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는 데이지에게 열심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니! 완전 잘하고 있어. 나 상자에서 울타리 아닌 아이템이 나온 건 처음 봐. 더 까 봐. 더.”
“나도 까 볼래.”
엘더도 주위의 상자를 골라잡아 뚜껑을 열었다. 엘더가 깐 상자에선 요상한 보라색 버섯 아이템이 나왔다.
테라리움 아티팩트에 배치 시 노멀 필드 자생지의 드라이어드들에게 생명력 보너스를 준다고 설명서에 적혀 있었다. 오….
“올… 역시 행운의 부적.”
“저 다시 열어 볼래요!”
갑자기 의지가 불타오른 데이지가 상자 뚜껑을 마구잡이로 열기 시작했다. 데이지는 운이 좋은 편 같았다. 내게 계속해서 울타리를 선물했던 랜덤 박스는, 데이지의 손에서 야자수 모형도 되고 조개가 붙은 바위 더미도 되고 파라솔도 되고 그물 침대도 되었다.
하나같이 내가 가진 드라이어들에게 일말의 보너스도 주지 않고, 내가 노리는 풍경 테마에 맞지 않는 것이 흠이었지만. 데이지가 뽑은 아이템들은 무려 확률 한 자리 수 아이템들이었다.
반면 엘더가 골라잡은 상자에선 어찌나 그리 저한테 좋은 아이템만 쏙쏙 뽑는지. 노멀 필드 자생 드라이어드나 나무형 드라이어드들에게 소소한 보너스를 주는 아이템을 잘도 챙겼다.
하얀 철제 벤치나 덩굴이 휘감긴 가로등은 노멀 필드에 놓으면 찰떡일 것 같은 예쁜 아이템이었다.
메스키트도 재미 삼아 상자를 몇 개 열었지만, 나만 운이 더러웠던 것은 아닌지 울타리를 뽑았다. 웃기게도 그것이 무척이나 위로가 되었다. 원래 뽑기가 다 같이 망해야 자기 합리화를 할 수 있다. 될놈될이라고.
“야, 꼬맹이. 제이한텐 리버 필드 드라이어드도 없는데 낚시 의자를 어디다 쓰게?”
엘더가 덩칫값도 못 하고 자기보다 한참이나 작은 데이지를 놀렸다. 데이지는 분한 얼굴이 되어 엘더를 노려보았다.
두 드라이어드는 어쩐지 사이가 안 좋았다. 이게 다 엘더 탓이다. 데이지가 부들부들 떨며 까려다 말고 들고 있던 상자를 꽉 쥐었다. 상자에서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데이지는 착하고 사랑스러운데 성깔이 있었다.
그런데 뚜껑 대신 옆구리가 열린 상자에서 눈부신 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머릿속에 불꽃이 펑펑 터지는 것 같았다.
“악! 대박! 이거 내가 노린 무지개 분수대잖아!”
하우스가 안 나올 거면 그보다 조금이라도 높은 확률에 있는 분수대가 나오라고 간절히 빌었는데, 드디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