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쟁이들은 빈 수레가 보이자 습관적으로 다이아를 채웠다. 하지만 난쟁이들의 생산 속도에 비해 수레의 한도는 터무니없이 낮아서, 난쟁이들은 금방 불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나를 빤히 보며 양팔을 휙휙 휘두르며 더 보내라는 팔짓을 했다.
다이아가 가득 찬 수레는 다시 털털털 되돌아갔다. 동시에 상대방의 기기에서도 반짝 푸른빛이 났다.
“앗! 300다이아 확인했습니다! 쿨 거래 감사합니다!”
그러곤 과수원을 향해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돈 생겼으니 또 뽑기 하러 가는군. 왠지 다시 보게 될 것 같은데.
그 이후론 일사천리였다. 난 열매는 데이지의 입에 먼저 물려 주고 가끔 엘더와 메스키트에게도 건네주었다.
메스키트는 양분 열매를 한 번에 이렇게 많이 먹어 보는 것은 처음이라며 웃었다. 크흡, 앞으로 제가 잔뜩 대접해 드릴게요!
내게 다이아를 입금받은 사람들은 과수원으로 뛰어 들어갔다가 잠시 후 다시 나타났다. 그러곤 다시 다이아를 입금받고 또 과수원으로 들어갔다. 조금 카지노 앞 전당포 주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저… 드루이드님….”
이 주변의 양분 열매는 얼추 다 쓸어 담은 것 같았다. 뽑기에 자꾸 실패했던 사람들도 어느새 드라이어드들을 하나씩 끼곤 내게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그중 유독 나와 자주 보는 한 사람의 양분 열매를 사고 있는데, 데이지가 내 코트를 잡아당기며 말을 걸었다. 불렀니? 내가 내려다보자 데이지는 어쩐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배불러요.”
헐, 데이지가 내게 배가 부르다는 말을 했어! 저 아이가 배가 부르다는 말은 처음이야! 여관 식당에서 몇 사람분의 음식을 홀로 다 해치운 데이지가! 아니 그런데 양분 열매가 배를 채우는 용도였어?
“내 주인, 제이. 이건 데이지 아이의 성장 한계에 다다랐다는 뜻이랍니다. 더 먹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메스키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난처함을 살짝 담은 눈웃음을 지었다.
“묘목 아이가 더 커지기엔 제이의 영혼의 한계가 너무 작아요.”
내 낮은 레벨이 문제였다.
될성부른 쪼렙이 다이아 좀 사회에 환원하겠다는데!
전투! 사냥! 경험치! 그래, 몬스터를 때려잡으러 가자! 내가 커야 데이지도 자란다.
필드에 나갈 마음이 만반인데 메스키트가 슬쩍 제안했다. 긴 여행이 될 수 있으니 좀 더 준비를 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RPG 게임의 시작 전, 필수가 되는 물과 음식, 포션,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내 장비 같은 걸 말했다.
“내 주인, 제이. 우리 드라이어드들은 제이와 영혼이 연결된 존재, 제이가 강해지면 저희들도 영향을 받는답니다.”
오, 그러니까 주인의 스탯에 드라이어드들도 영향을 받는다는 거지? 이미 드라이어드들이 개화되었을 때부터 장비를 착용하고 있어서 뭘 더 해 줘야 강해질지 궁금하기도 했다.
난 내 구린 코트를 보았다. 이 세계로 떨어졌을 때부터 자동으로 장착하고 있는, 누가 봐도 구린 뉴비 웨어. 그래, 장비를 사러 가자.
필드로 나갈 마음을 간신히 접고 약도를 보며 상가로 향했다. 어느 곳으로 향할지 결정한 것은 엘더의 징징거림도, 제일 먼저 눈에 띈 가게도 아니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이번 달 한정 장신구! 오직 26번째 테라리움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산품! 스페셜 등급, 지혜의 ‘루비’ 반지의 행운권 추첨이 곧 마감됩니다! 당신의 드라이어드에게 최고의 태양을 선물해 주세요!”
한정, 스페셜 등급, 게임 유저가 환장하는 단어들이 내 귀에 콕콕 박힌다. 바로 고개가 들어간다. 뭔데, 저거? 장신구? 어떻게 살 수 있는데? 좋은 거 맞지?
“제가 사요! 살게요! 다이아는 말만 해요!”
탁 트인 광장 한가운데서 메가폰으로 소리치던 사람에게 달려갔다. 저 다이아 많아요! 내게 다이아를 어필하던 난쟁이처럼 핸드폰을 흔들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만 장신구는 파는 상품이 아니랍니다. 행운권 추첨을 통해 당첨되신 분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럼 행운권은 어디서 사면 돼요?”
“금색 띠를 장식한 가게들의 물품을 사면 얻으실 수 있습니다. 여기 무료로 한 장 드리는 것도 받으세요!”
숫자가 적힌 별 모양 종이를 받았다. 오, 이거를 잔뜩 모아 놓으면 된다는 거지?
금색 띠! 설명을 듣고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휙휙 주위를 둘러보니, 가게 입구에 금색 리본으로 장식을 한 곳이 몇 개 보였다. 가게를 사면 안 되나요?
엘더가 메가폰을 쥔 사람 앞에 세워진 유리 케이스 앞으로 홀린 듯이 걸어갔다. 유리 케이스 안엔 베이지색 벨벳 쿠션 위에 영롱한 빛을 뿌리는 루비 반지가 곱게 자리하고 있었다.
“가공된 탄생석 장신구라…. 확실히 보기 힘든 물건이네요. 스페셜 등급이면 탄생석의 마법 효과를 최고로 끌어낼 수 있을 거예요. 욕심이 나는 물건이에요. 저는 불멸의 ‘다이아몬드’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메스키트도 보석이 좋아? 갖고 싶어?”
엘더는 뭐 반짝거리는 건 다 좋아할 것 같아서 이해했지만 메스키트의 반응은 의외였다.
“후후, 내 주인, 제이. 제가 말한 탄생석들은 보석 이상의 가치가 있답니다. 저건 그냥 보석이 아니에요. 태양의 힘을 담은 보석이죠. 정확히는 태양의 시간을 담았답니다. 루비는 7월의 태양. 드라이어드들이 날짜에 따라 전투 보너스를 받을 수 있단 걸 아시나요?”
온실의 석판에서 본 적 있다. 데이지와 메스키트의 경우 4월에 전투 보너스를 받는다고 적혀 있었지. 나는 모처럼 아는 설정이 나와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 보너스의 날짜는 저희 드라이어드들 모체의 첫 개화 날짜와 같아요. 가장 완벽할 때란 거죠. 엘더 꼬맹이의 경우 6~7월에 전투 보너스를 받으니 7월의 루비에 더욱 관심이 가는 거예요.”
관심이 가는 것뿐만 아니라 눈빛으로 유리 케이스를 뚫을 만큼 열중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개화 시기와 전투 보너스가 겹치다니, 낭만적인 설정이야…. 저렇게 들으니 더 갖고 싶다. 저거 완전 엘더를 위한 전용 아이템 아냐?
“그럼 7월도 되고 저 반지도 갖고 있으면 엘더는 더 많은 전투 보너스를 받을 수 있어?”
“정답이에요.”
행운권이 많이 필요했다. 경우의 수가 많아야 당첨될 확률도 더 커지겠지.
“엘더! 안 따라오면 두고 간다?”
엘더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을 하고는 따라왔다. 이왕 사는 거 가장 필요한 것부터 사자고 마음 먹었다.
메가폰을 든 사람은 금방 마감된다고 외쳤지만, 그 옆의 모래시계를 보니 아직 시간의 여유가 한참 남아 있었다. 내가 여기 가게들을 다 털어도 충분할 것 같았다.
장비는 뭘 사는 게 좋을까? 일단 이 낡은 코트만 벗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소장하기엔 너무 구려.
좋은 고객을 알아본 주인이 웃으며 반겨 주었다. 그러곤 내가 딱 필요한 코너로 안내해 주었다.
“나도 메스키트와 같은 갑옷을 입어야 할까?”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은색 투구를 들어 보았다. 포기. 장난 아니게 무겁네. 머리가 이렇게 무거운데 몸을 감싸는 다른 부위들은 얼마나 무겁겠어. 다시 제자리에 놓아두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제이의 체력으론 무거운 중장비는 무리일 거예요. 투구는… 잘못하면 목이 꺾일 수도 있어요.”
조금 소름이 돋았다. 메스키트가 입은 갑옷이 너무 멋있어서 내심 기대했는데. RPG 게임의 기본은 번쩍번쩍한 갑옷이라고 생각했거늘. 운동도 안 하고 근육도 없는 나에겐 무리겠지.
“여기 초보자 세트 없나요? 막 시작하는 초보가 입는 장비요.”
이왕이면 세트 효과 있는 거면 더 좋겠는데.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자 따로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마네킹으로 날 안내했다. 투박한 가죽 방어구가 덕지덕지 올려져 있었다.
미친, 구려. 역시나 초보자 세트. 초보자도 예쁘고 멋있는 장비 입고 싶은데요! 왜 초보는 예쁜 옷 못 입게 하나요! 모든 게임들이 초보자 장비는 구리게 만들자고 약속이라도 했나요? 코스튬인가요? 의장만이 답인가요!
“가볍고 실용적으로 보여요. 중요한 급소들도 잘 가려져 있네요. 연약한 제이에게는 잘 맞을 것 같아 보여요.”
“바로 보았습니다! 이 세트 장비로 말할 것 같으면 보온성도 좋고 방어력도 높죠. 주인의 방어력이 높아지면 드라이어드들은 더 안심하고 전투에 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가? 귀가 팔랑거렸다. 자꾸 들으니 좋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저것도 살게요.”
하지만 룩이 구린 것은 참을 수 없다. 가려야지. 난 그 옆에 걸려 있는 검은 로브를 가리켰다. 이왕이면 때가 타도 잘 티가 나지 않는 검은색으로.
가격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쌌다. 초보자의 머리띠, 상의, 하의, 장갑, 부츠, 다 합쳐서 150다이아. 로브는 10다이아. 세트 구매라고 굳이 10% 할인도 해 주었다.
코트를 벗어서 핸드폰만 빼내고 따로 버려 달라고 부탁했다. 주머니에서 추가로 저번에 사고 넣어 둔 빵과 우유들이 나왔지만, 새로 살 생각으로 무시했다.
간소한 면 티셔츠와 반바지 위에 메스키트와 데이지의 도움을 받아 장비들을 걸쳤다. 머리띠는 도저히 이마에 맬 용기가 안 나서, 머리를 한데 모아 위로 올려 묶었다.
로브까지 대충 위에 두르니 좀 답답했다. 더운 것 같기도 하고. 비로소 첫 모험을 떠나는 그럴싸한 RPG 용사의 모습이 되었네.
“내 주인, 제이. 훨씬 든든해졌네요.”
스탯 상승은 드라이어드들의 심리로 알 수 있는 건가? 뭐 시스템 메시지 같은 게 떠 주면 좋겠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 알 수가 있나.
드라이어드들을 위한 장비는 딱히 없는 것 같아서 그대로 상점을 나왔다. 가게 주인이 추첨권을 6장 줬다. 뭐야? 더 줘요.
엘더가 어느 가게를 스태프로 가리켰다. 아티팩트 공방.
헐! 마이 룸 꾸밀 수 있는 가게인가?
엘더의 눈이 말했다. 사 줘. 입은 가만히 있는데 분명 눈이 말했다.
가야지, 그럼!
가게 안은 백화점보다 훨씬 넓었다. 아티팩트를 꾸미는 아이템이 모험에 꼭 필요한 부분은 아닌지, 아니면 가격 때문인지 손님은 적었다.
가게 안은 파는 물건 테마별로 구역이 세밀하게 나눠져 있었는데, 정확히는 ‘자생 필드’ 별로 나눠져 있었다. ‘노멀 필드’, ‘데저트 필드’, ‘스왐프 필드’, ‘리버 필드’ 등등.
나는 가게 입구의 장바구니 같은 상자를 들고 핸드폰을 깨운 후, 그 안에 다이아들을 쏟았다.
절제를 모르는 난쟁이들의 다이아 공세로 넘치기 전에 빨리 멈춘 후, 내 드라이어드들에게 하나씩 다이아 상자를 안겨 주었다. 데이지는 당황한 얼굴이 된 것에 비해 엘더의 표정은 더없이 환해졌다.
“꼭 필요하거나 정말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이걸로 사!”
난 내 갈 길을 갈게! 굳이 곁에 남으려는 메스키트까지 데저트 필드 코너로 밀어 넣은 후, 나는 가게 중앙의 ‘랜덤 박스 코너’로 달렸다.
뽑기! 무한의 다이아가 생긴 후 가장 내 흥미를 자극하는 랜덤 확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