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604)

주머니에서 열매를 죄다 꺼내자 갑자기 조용히 있던 엘더가 난리를 쳤다.

“그걸 왜 걔한테 줘? 나나 메스키트한테 투자해야지!”

“둘은 다 컸잖아.”

“더 클 수 있어! 아니 더 강해질 수 있어! 저 땅딸막한 꼬맹이보다 차라리 내게 줘!”

거, 심보 참. 애 앞에서 욕심도 많긴.

자 하나 쥐어 보렴. 양분 열매는 그냥 씹어 먹으면 되나? 아니면 먹는 방법이 따로 있나? 데이지에게 열매를 하나 주자 작은 손으로 조심히 받아 들었다. 하지만 엘더의 눈치를 보며 들고만 있을 뿐이었다.

“얘는 공격형이잖아. 쑥쑥 자라서 딜을 넣어야지. 딜러가 딜 달리면 다른 애들이 고생한다?”

“내가 쟤보다 더 세!”

엘더는 제 허리에도 안 오는 데이지를 보며 왁왁 성화를 부렸다. 하지만 데이지는 엘더의 눈치를 보면서도 내가 준 열매를 뺏기고 싶지 않아 휙 몸을 틀어 버렸다. 내 새끼 데이지는 착한데 성깔이 있었다.

“너 데이지한테 그렇게 대하면 못 써. 오히려 감사히 생각해야지. 받들어 모셔도 부족한데.”

“내가 왜 이런 꼬맹이한테?”

“너 데이지가 뽑아 준 열매에서 개화했어. 데이지가 친히 널 점지해 준 거라니까? 데이지 아니었으면 나 같은 다이아 부자한테 네가 올 수 있었겠니? 아마 300다이아에 벌벌 떠는 애들한테 갔을 확률이 크겠지?”

데이지가 점지해 준 다이아수저 태생. 엘더의 입이 꾹 다물렸다. 조용해서 좋다. 입을 다무니까 잘생긴 얼굴이 더 잘생겨졌다.

그 모습을 보며 메스키트가 큭큭,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으니까 한편의 화보를 보는 것 같았다.

양옆, 그리고 앞이 꽃이다. 진짜 꽃이긴 한데 비유적인 의미로도 꽃이었다.

“그런데 데이지가 정말 공격형이야? 이렇게 작고 가녀린데.”

“드루이드님, 제 무기를 보여드릴까요?”

데이지가 양 허리춤에서 두 개의 단도를 꺼내 휘리릭 돌린 후 쥐었다. 오, 제법 까리한뒈?

“내 주인, 제이. 드라이어드를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돼요.”

메스키트가 눈높이 선생님처럼 내게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드라이어드의 뿌리는 단단한 바위도 가뿐히 뚫을 수 있어요. 설령 작은 묘목이라 할지라도. 이 아이는 주인이 없을 땐 평범한 인간들과 다를 바 없었겠지만, 지금은 제이가 있어요.”

문득 도로의 아스팔트를 깨부수고 피어 올라온 잡초들의 모습이 데이지와 오버랩되었다. 데이지는… 사람을… 찢어….

“후후, 하지만 저에겐 조금 안타깝게 되었네요.”

내가 너의 머리를 쓰다듬어도 되겠니? 메스키트가 데이지에게 물었다. 메스키트의 눈높이는 엘더보다 배는 높아서, 그녀는 데이지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상관없어요, 그렇게 아이가 눈을 마주하며 답하자 묵직한 건틀릿이 데이지의 머리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제 큰 뿌리로 일으키는 지진은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참 유용했는데 말이죠. 하지만 이 데이지 아이는 제 지진을 버틸 수 없답니다. 이젠 사용할 수 없게 되었어요.”

지반을 뒤집어엎을 정도로 강력한 지진이었지. 엘더는 메스키트의 지진에 면역이 있다고 했지만, 데이지를 보니 확실히 나무와 일반 꽃의 뿌리는 차이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내 눈엔 그저 예쁘고 멋진 드라이어드들로 보이는데, 자주 모체를 빗대어 이야기가 튀어나오면 바로 와닿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묘목 상태라 뿌리가 더 약할 거예요. 얼른 자라서 내 주인을 지키는 든든한 검이 되어야 할 텐데요. 내 주인, 제이. 이 묘목 아이를 한번 들어 올려 보겠어요?”

갑자기? 뭐 못할 것도 없지. 전에도 한 번 안아 올린 적이 있었으니까.

무릎을 살짝 굽히고 데이지를 안아 올렸다. 매우 당황했던 초반과 다르게, 데이지는 마주 안겨 오며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얼른 자라서 제가 드루이드님을 안아 드릴게요!”

앗, 그건 괜찮아. 그래도 생각이 기특해서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이제 내려놓아도 돼요, 제이. 작은 묘목 아이야, 이번엔 뿌리를 내려 보렴.”

데이지는 메스키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제이. 다시 들어 올려 보세요. 너무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흠, 무슨 의도인 걸까? 아무렴, 메스키트가 내게 쓸데없는 일을 시키겠어. 그런데 데이지가 갑자기 날 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좀 전처럼 무릎을 굽혀 아이를 들어 올리기 위해 양팔에 힘을 줬다.

“흡!”

미친, 어깨 빠지는 줄 알았다. 허리도 마찬가지로 집 나가는 줄 알았다. 평범하게 서 있는 데이지를 들어 올릴 수 없었다. 발에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예고는 해 주지! 하루의 반 이상을 앉아서 생활했던 나는 온몸이 삐걱거리는데!

허리를 두드리고 있는데 엘더의 쯧쯧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흰 빛이 다가왔다. ‘원래 인간은 다 너처럼 몸이 쓰레기냐?’ 하고 엘더의 눈빛이 말했다.

입은 가만 있지만 분명 눈이 그렇게 말했다. 경찰 불러. 합의는 없다.

“신기하죠? 이게 바로 제가 말한 드라이어드들의 뿌리랍니다.”

그러면서 메스키트는 밭에서 무 뽑듯 데이지를 쑥 잡아 올렸다. 데이지는 어어, 하면서 속절없이 끌려 올라갔다. 아이는 메스키트의 허리께에 대롱대롱 들려서 허망한 얼굴을 했다.

“작은 묘목 아이야. 최소한 내 힘으로 널 잡아 뽑을 수 없도록 뿌리를 단단히 만들렴. 지반의 아주 깊숙한 곳까지 구석구석 뿌리를 내려야 할 거야. 미리 이야기해 두지만 난 자주 널 들어 올릴 거란다. 뿌리에 자주 자극을 주면 더욱 단단해질 것이기 때문이지. 노력하면 내 지진을 잠시 동안은 버틸 수 있게 될 거란다.”

“우와!”

데이지는 감탄하는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모습은 마치 스승과 제자를 보는 것 같았다. 메스키트가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데….

슬쩍 엘더를 봤다. 어쩐지 엘더는 둘의 모습을 보며 그 예쁜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너도 저렇게 쑥쑥 뽑혔어?”

“맞아요, 제이. 바로 알아보셨네요. 엘더도 그렇게 키웠답니다. 엘더 꼬맹이가 제 지진을 버틸 수 있게 된 건 모체의 뿌리가 강한 덕도 있지만, 이 묘목 아이와 같은 수련을 했기 때문이랍니다.”

어린 엘더가 데이지 대신 메스키트의 허리에 대롱대롱 걸려 있는 상상을 했다. 저 덩치가….

“끅… 끅….”

“시끄러워! 웃지 마! 애초에 메스키트의 힘은 드라이어드들 중에서 최상급인데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엘더가 스태프를 쥔 손을 바들바들 떨며 분을 삭였다. 감히 날 어찌 못하니까.

메스키트의 밑에서 강하게 컸구나. 그럼 메스키트의 저 바른 인성도 좀 배우지.

“저 노력할게요! 얼른 쑥쑥 자라서 원래의 크기로 돌아갈 거예요!”

땅으로 내려온 데이지가 소리쳤다. 그러곤 쥐고 있던 양분 덩어리 열매를 왕, 하고 깨물었다.

그냥 평범하게 먹는구나. 그럼 이것도 좀 먹어 보렴. 내리 3개를 더 먹였다. 데이지는 복스럽게 잘 먹었다. 엘더는 데이지의 입 속으로 사라지는 열매를 못마땅한 눈을 하며 바라보았다.

열심히 열매를 삼킨 데이지가 갑자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데이지의 양팔이 빛나고 있었다. 데이지의 몸에서 스르륵 돋아난 줄기와 잎이 데이지의 양팔을 감으며 올라갔다.

아이의 손가락 하나하나 전부 감싼 줄기와 잎들은 어느 순간 반짝, 하고 빛을 내며 사라졌다. 대신 손등에 은실로 꽃이 수놓아진 매끈한 진녹색 가죽 장갑이 자리하고 있었다.

데이지는 양손을 쫙 펴고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 저게 레벨 업의 가시화인가? 의욕이 마구 샘솟는다.

“이거 양분 열매만 따로 사려면 아무래도 다른 드루이드들에게 구매해야겠죠? 뽑기에 도전했다가 드라이어드 열매에 걸리면 낭패니까.”

“저 이제 말해도 됩니까?”

온실의 장식품처럼 서 있던 안내원이 퍼뜩 입을 열었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걸 곧이곧대로 들으면 어떡해요. 그냥 등급 이야기만 하지 말라고 했던 건데.

“네, 맞습니다. 드루이드님들이 자주 모이는 시장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부탁하지도 않은 마을 내 시장과 상가 약도를 따로 챙겨 주었다. 마침 잘됐다. 엘더의 눈엔 이게 백화점 층마다 있는 약도처럼 보이겠지. 벌써부터 머리 굴리는 게 보인다.

비록 약도는 안내원의 호의였지만 난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담아 다이아로 값을 치렀다. 저쪽 난쟁이들이 보내는 팁입니다. 찡긋.

데이지에겐 태생 등급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도록 내가 최선을 다할 것이다. 물론 내 다이아가 최선을 다할 것이다. 강남 학구열 못지않은 지독한 지원 공세를 보여 주마.

하지만 굳이 시장에 가지 않아도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드라이어드들을 대동하고 과수원을 나오는데 근처를 서성이던 몇 명이 내게 다가왔다.

“오, 좋은 드라이어드를 가지고 계시네요. 여태 봐 온 드라이어드들과 차원이 다른 기운이군요!”

그건 마치 내게 ‘도를 믿으세요?’ 하며 다가오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자꾸 광대는 하늘로 발사될 것처럼 솟아올랐다. 큼큼, 뭘 좀 아시네요. 우리 드라이어드들이 내 눈에만 예쁜 게 아니라니까.

“좋은 드라이어드에게는 그에 걸맞은 육성이 필요한 법이죠. 이 열매로 말씀드리자면….”

“살게요.”

“네?”

“양분 열매 뽑으신 거죠? 있는 거 다 살게요. 1개에 300다이아, 2개는 700다이아, 3개 이상은 300에 100 붙여서 개당 400다이아에 전부 살게요.”

그리고 나는 사생팬에 둘러싸인 아이돌 가수의 기분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좀비가 나오는 영화에 덩그러니 떨어진 생존자의 기분을….

선수를 놓쳐 멀찍이 서 있던 사람들까지 죄다 몰려들었다. 서로 자기가 양분 열매를 몇 개 가지고 있다며 어필하기 위해 아우성이었다. 메스키트가 방패로 살짝살짝 사람들을 밀며 가드했다. 오, 이게 바로 보디가드에게 경호 받는 셀럽의 기분?

“침착하세요. 저는 여기 있는 모든 열매를 살 때까지 자리를 옮기지 않을 거예요. 한 분씩 거래할게요.”

그런데 사람과 사람끼리 큰 다이아가 오가는 거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우리 난쟁이들은 절제를 모르는데.

내가 핸드폰을 꺼내자 상대방도 핸드폰처럼 생긴 물건을 꺼냈다. 처음 보는 다른 사람의 월렛. 하지만 핸드폰과 유사하긴 한데 정확히는 아주 작은 태블릿처럼 보였다.

핸드폰을 깨우자 <무한 다이아> 화면이 기다렸다는 듯이 팝업되었다. 그러곤 난쟁이들이 쉴 새 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주인님! 드디어 다이아가 필요하신 건가요?]

[주인님! 얼른 다이아를 가져가세요!]

[주인님! 자주 안 오셔서 걱정했어요!]

여기서 어떻게 100 단위로 맞춰서 다이아를 꺼내면 되는 거지?

“여기 열매 먼저 받으세요! 전 1개를 팔게요!”

걱정은 잠시였다. 갑자기 광산 외부로 연결된 철로에 300이란 숫자가 적힌 작은 수레가 털털털 나타났다. 미친…. 친절하게 찾아오는 서비스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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