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604)

데이지가 급한 일이 있다며 향한 곳은 나도 잘 모른다. 심지어 아이가 밤이 되면 묵는다는 마을 공동 회관의 위치도 몰랐다. 나 이렇게 보면 데이지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으면서 혼자 친한 척했구나. 왠지 씁쓸했다.

그러고 보니 여관 주인이 데이지와 가까이 지냈지? 그분께 여쭤보면 데이지의 행방에 대해 알 수 있지 않을까?

어느새 내가 이 세계로 처음 떨어졌던 그 거리에 도달했다. 여기 여관 주인들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있기 때문에 걸음을 빨리했다.

거리는 여전히 활기찼다. 내가 보았던 이상한 차림과 특이한 외형의 사람들이 드라이어드들이었음을 이젠 알 수 있었다.

이 세계에 막 떨어져 여유가 없던 나와 지금의 내가 느끼는 거리의 느낌은 확실히 달랐다. 난 정말로 게임 속의 일원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도착한 여관은 여전히 한적했다. 외곽에 위치한 탓인지 데이지가 구태여 이곳으로 날 끌고 오지 않았으면 가지 않았을 법한 위치긴 했다.

어제오늘 통틀어 손님이 나뿐이었는지 카운터에 선 주인은 무척이나 지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오, 데이지와 함께 왔던 드루이드님!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과수원은 어땠나요?”

“뭐, 좋은 드라이어드들을 얻었죠.”

주인은 나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녀는 슬쩍 내 뒤를 살피더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얼핏 보면 내 드라이어드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나 착각할 수 있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데이지를 찾는 듯했다. 그럼 데이지는 여기로 돌아오지 않았구나.

“저 혹시 데이지가 갈 법한 곳을 아세요? 과수원에서 헤어졌는데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기도 하고….”

“데이지요? 글쎄요. 아이를 제가 잘 챙겨 주긴 해도 자주 오는 편은 아니라서요.”

그럼 마을 공동 회관 위치라도 물어볼까? 거기서 하염없이 기다리면 데이지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 데이지에 대해 좀 더 물어볼까?

“그런데 혹시 데이지가 드라이어드였다는 걸 아셨나요? 음, 왠지 알고 계셨을 것 같은데….”

“결국 알아차리셨구나. 전 드루이드님께서 데이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계실 줄 알았어요. 하지만 좀 더 지켜보니 그건 아니었던 것 같고요.”

“전 데이지가 드라이어드였다는 사실을 과수원에서 알았어요. 그것도 남이 말해 주기 전까진 몰랐어요.”

“그 아이가 사실 참… 불쌍한 아이랍니다.”

앗, 이 플로우는! 설마 데이지의 과거에 대해 알 수 있는 걸까?

그런데 내가 알아도 되는 걸까? 나와 데이지는 어제 처음 만난 사이였고 데이지는 주인이 말하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할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데이지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안내원에게 데이지의 정체에 대해 들은 이후부터 생각했지만, 만약 할 수 있다면 데이지가 나의 드라이어드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도 있었다.

내가 들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사이, 이미 여관 주인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그 아이는 참… 안쓰러운 아이랍니다. 아이가 마을에 온 건 작년 이맘때쯤이었어요. 그 시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나요?”

“…지금이면 세계수의 가지가 열매를 맺는 날이군요.”

“그래요. 아이는 야생의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가 아니랍니다. 과수원에서 태어난 아이였어요.”

어어어… 갑자기 누군가 뒤통수를 후려친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 과수원에서 태어난 드라이어드가 왜 혼자 떠돌아다니고 있지…?

“그 말은… 데이지가 주인이 있었던 드라이어드라는 건가요?”

“있었지요. 잠깐이지만. 금방 버려졌거든요.”

잘못 들은 것이길 빌었다. 안내원이 뭐라고 했더라? 영혼의 연결을 끊은 드라이어드는 혹독한 추위와 끊임없는 갈증,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을 겪게 된다고 하지 않았나?

아주 좋지 않은 경험이 될 거라고 했는데? 그럼 데이지는 여태 그런 고통을 겪어 오고 있었단 말이야?

하지만 마냥 내 앞에선 밝아 보였고…. 문득 데이지가 허겁지겁 음식들을 먹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이 생명과 직결되는 행위였음을…. 그것도 모르고 난 그저 복스럽게 먹는다고 귀엽게 생각했는데….

바로 옆에서 보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데이지가 가여워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데이지가 환하게 웃던 모습이 조각조각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아이의 등급이 문제였어요. 전 그곳에 없어서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등급을 확인하지 않고 데이지를 개화시킨 드루이드가 그 자리에서 아이에게 험악하게 굴었나 봐요. 겨우 구한 열매에서 태어난 것이 가장 낮은 노멀 등급의 드라이어드였으니 분노했나 보죠. 심지어 회복형도 아니라며 더 심하게 굴었나 봅니다. 아이에게 폭력을 행하려고 하자 보다 못한 다른 드루이드가 자신의 열매를 양보하며 사태는 마무리되었다고 해요. 데이지는 그 자리에서 바로 영혼이 끊기고 쫓기듯 과수원에서 도망 나온 거예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름도 얼굴도 모를 그 드루이드, 데이지의 전 주인 새끼에게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격한 분노를 느꼈다. 만나게 된다면 뺨을 후려갈기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그러지 못해서 손톱이 박히도록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데이지한테 어떻게 그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지? 그 착한 아이에게 무슨 짓을….

그래서 데이지가 과수원에서… 그렇게 도망치듯 뛰쳐나가 버렸구나. 자신의 과거가 덧입혀져서…. 난 그것도 모르고….

내가 분노하면 분노할수록 왼손에 채워진 테라리움 아티팩트가 함께 공명하듯 진동했다.

“떠돌던 데이지에 대해 알게 되었고 가여워서 음식을 챙겨 주게 되었답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아도 무척이나 순수한 아이라 표정과 행동에 모든 감정이 드러났어요. 드루이드와 오랜 시간 떨어진 드라이어드는 오래 살 수 없다고 하던데, 지금까지 버틴 것이 대견하죠…. 태어나자마자 그런 모진 일을 당했는데 드루이드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은 데이지가 얼마나 안타까운지 몰라요.”

살면서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끔찍한 환멸을 느낀 적이 있었나 싶었다. 전 주인과 같은 드루이드라 내가 싫었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잘 대해 주다니.

데이지는 얼마나 착한 거지? 속은 곪아가고 있지 않을까? 데이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내가 그 아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갑자기 테라리움 아티팩트에서 메스키트와 엘더가 튀어나왔다. 메스키트는 곧바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내 주인, 제이. 무슨 일이에요? 대체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분노하게 만드는 거죠? 우리는 서로 영혼이 연결된 존재, 당신의 격한 감정은 우리도 느낄 수 있어요.”

“뭔데 그래? 사람이야? 드라이어드야? 내가 죽여 줄까?”

분노하는 나의 눈빛이 저렇게 생겼을까 싶다. 어쩐지 내 드라이어드들이 날 보는 것과 같은 눈빛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호박색의 메스키트의 눈, 시퍼런 칼날처럼 빛나는 엘더의 에메랄드색 눈.

“데이지는… 혹시 회관에 가면 그 아이를 찾을 수 있을까요?”

“음…. 그게 가능성이 가장 높겠네요. 회관으로 가는 길을 알려 줄게요. 부디 당신이 데이지의 상처를 감싸 안아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이를 대할 때의 당신은 참 좋은 드루이드로 보였으니까요.”

여관 주인은 갑자기 튀어나온 내 드라이어드들을 보며 놀란 눈을 하면서도 차분히 대답을 이어갔다.

“그 자식 이름이 데이지야? 죽여 줄까?”

나는 자꾸 헛소리하는 엘더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죽 밀었다. 죽이긴 누굴 죽여.

“내 주인, 제이. 데이지란 아이가 걱정되는 건가요? 드라이어드군요. 하지만 당신과 영혼이 연결된 드라이어드는 아닌 것이 분명한데.”

“그 아이를 찾고 싶어. 지금 많이 힘들어하고 있을 거야. 내가 도움이 되고 싶어. 그 애 정말 착하고 상처가 많은 아이야. 나에게 큰 도움이 되어 준 아인데…. 난 아무것도 몰랐어….”

눈가가 뜨거워졌다.

메스키트가 망토를 들어 내 눈가를 살짝 문질렀다.

“울지 말아요, 제이. 당신이 울면 제 마음도 아프답니다. 데이지 드라이어드를 찾고 싶은 건가요? 흔한 종이라 찾기 힘들 수도 있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에요.”

난 여관 주인이 그려준 회관으로 향하는 약도를 꼭 쥐고 여관을 나섰다. 입을 열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꾹 다물고 땅만 보며 걸었다.

“내 주인, 제이. 제가 도움이 될 수 있게 해 줘요.”

메스키트가 내 어깨를 감싸 쥐며 걸음을 멈추게 했다. 난 문득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만약 데이지가 스페셜 등급이었다면, 유니크 등급이었다면, 하다 못해 레어 등급 정도만 됐어도 그렇게 모질게 버려지지 않았을 텐데….

“저는 사막의 수호신, 전 지하수의 이정표가 될 수 있지만 제 굵고 곧은 뿌리가 꼭 지하수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메스키트가 건틀릿에 감싸인 손으로 내 볼을 조심히 쓰다듬었다.

“내 주인, 제이. 데이지를 찾으면 되는 건가요? 전 세계수에서 태어난 드라이어드들이라면 유전 정보를 토대로 찾을 수 있어요. 당신이 찾고자 하는 드라이어드가 밟았던 땅의 정보를 아주 깊숙한 곳에서부터 들쑤셔서 찾을 수 있어요.”

“나도 있어.”

엘더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는 흰 꽃 뭉치가 달린 스태프를 휘둘렀다.

“내 칭호는 신이 내린 선물이지만 한편으론 행운의 부적이기도 해. 내 꽃가지는 행운을 비는 부적으로 사용됐어. 내가 메스키트에게 행운을 올려주는 버프를 걸면, 네가 찾고자 하는 그 드라이어드를 찾을 확률이 높아질 거야.”

평소의 다이아 타령하던 그런 한심한 얼굴이 아니었다.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을 하고는 온 힘을 다해 날 도와주겠다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새삼 이들이 나의 드라이어드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안달이 나 데이지를 빨리 찾아야 한다는 불안함이 어느새 사그라들고 있었다. 둘의 힘이면 데이지를 바로 찾아내 줄 것만 같은 믿음이 들었다.

“저와 엘더는 인연이 깊어서, 엘더의 버프는 제게 큰 효능을 발휘할 거예요. 단번에 그 드라이어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냥 데이지 종을 찾으면 되는 건가요?”

“머리가 붉은색이야.”

“레드 데이지로군요. 특징이 좁혀지면 좋아요.”

엘더가 스태프를 들어 메스키트를 향해 원을 한 바퀴 그렸다. 달콤한 향기와 함께 피어난 흰 꽃잎이 팔랑팔랑 흩날리며 메스키트를 감쌌다. 뒤이어 메스키트가 두 눈을 감더니 랜스의 끝을 온 힘을 다해 땅으로 처박았다.

쿠릉…!

큰 소리가 들리며 땅에 강한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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