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604)

사람들은 열매를 신중하게 고르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고개를 저으며 이미 골랐던 열매에서 손을 떼기도 하고, 저 열매는 색깔이 어떻고 광택이 어쩌고 하며 심도 있게 토론했다. 내가 보기엔 다 같은 투명한 구슬인데요.

그래도 막상 하나를 고르려니 고민이 되었다. 마음 같아선 여기 있는 열매를 다 사들여서 좋은 게 나올 때까지 까 보고 싶긴 한데. 그 후 처치가 곤란이지. 보통의 카드 게임들처럼 내가 운용할 수 있는 용병 수가 제한되어 있을 수도 있고 소지 한도가 존재할 수도 있고.

일단 드라이어드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정확히 모르니까 시험 삼아 한 개만 먼저 따 보기로 했다.

“네가 한번 골라 볼래?”

가지에 달린 열매들에 입을 헤 벌린 채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데이지에게 물었다. 데이지는 화들짝 놀라 “제가요?” 하며 되물었다.

“아무거나 상관없어, 그냥 한 번 찍어 봐!”

내가 재촉하자 데이지는 고민을 하더니 한 열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 잠시만!”

갑자기 웬 삐쩍 마른 남자가 삿대질을 하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거기 그 아이와 당신까지 해서 두 개를 딸 건가? 아니면 한 개를 딸 건가?”

“그건 왜?”

“이건 내게 아주 중요한 의식이야! 난 나의 행운의 숫자에 맞춰서 따기 위해 순번을 기다리고 있어. 앞서 6명이 땄으니 앞으로 한 번만 따면 내 숫자에 딱 맞거든.”

“별….”

여기서 말을 멈췄으면 난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성에 대해 인정은 해 주려고 했다.

“그리고 되도록 당신이 따도록 해! 오늘 내 운세에 붉은색은 불길하다고 했어!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많은 붉은색을 피해 왔는지 알아? 당신이 그 빨간 머리 아이를 데려오면서 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고! 그러니 행운의 숫자라도 맞추는 데 동참해!”

미쳤나? 별 이상한…. 내가 미친놈 보듯 쳐다보자 그는 갑자기 데이지에게도 윽박을 지르기 시작했다.

“어서 그 재수 없는 머리 좀 어떻게 해 봐! 가릴 수 있다면 가리든가 아니면 내가 열매를 딸 때가 되면 저리 꺼져 있어!”

“죄… 죄송해요.”

데이지는 잔뜩 주눅이 들어서 제 머리를 양손으로 가리며 내 뒤로 피신했다. 이게 무슨 어이없는 상황?

“듣자 듣자 하니까 더 못 들어주겠네! 왜 애한테 지랄이야? 별 미신 같은 걸 들먹이면서 왜 우리 애 기를 죽여? 시발, 그냥 아무거나 하나 뽑으면 되지, 미신 지킨다고 퍽이나 좋은 게 나오겠다!”

난 데이지의 손을 꼭 잡고 소리쳤다. 순식간에 방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제제를 위해 안내원들이 우리에게 몰려왔다.

“뭐? 이 열매 하나에 얼마짜린 줄 알아?”

“300다이아가 너한테나 비싸지, 네 자식 궁상떠는 거에 왜 우리가 맞춰 줘야 돼? 숫자 맞추려면 그냥 네가 두 번 사든가!”

내 말에 몇몇 사람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쭈? 웃기다 이거지. 사실 본래의 나라면 상상도 못 할 행동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리치는 등 이목의 중심이 되는 일은 이전엔 쪽팔려서 못했다.

하지만 난 지금 믿는 구석이 있는 만큼 당당했다. 많은 돈으로 생긴 여유는 사람을 새삼 당당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이지, 저 열매가 맘에 든다고 했지?”

나는 그 남자 앞에서 보란 듯이 열매를 땄다. 이상하게도 열매는 따뜻했다.

손 안에 들어온 것이 오죽 영롱해서 감탄하던 것도 잠깐, 그리고 그 옆의 것도, 옆의 옆에 있는 것도, 커다란 가지에서 뻗어 나온 작은 가지에 매달린 5개의 열매를 모두 땄다.

원래 이럴 예정은 아니었지만. 손에 다 들고 있기 벅차서 몇 개는 데이지에게 부탁했다.

“그걸 다 지불할 능력은 돼?”

“허세 아니야?”

누군가 수군거렸고 남자가 이때다 싶었는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물론. 나는 안내원에게 다이아를 지불하겠다고 말했다.

모두가 의심하는 눈초리로 수군거렸지만 오직 안내원 남자만 담담하고 그리고 아주 정중하게 ‘1500’이라고 써진 상자를 가져왔다. 300이나 1500이나 상자 크기는 그대로였고 숫자만 다를 뿐이었다.

핸드폰을 들어 깨웠다. 까만 핸드폰 화면이 곧바로 <무한 다이아> 화면으로 바뀌었다. 나는 난쟁이들에게 명령했다.

“삽으로 퍼 와. 아니 수레째 부어도 돼.”

그리고 핸드폰을 든 손은 상자에, 시선은 무례한 남자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잘 봐라, 이것이 너희와 나의 차이다.

알약 통에서 알약을 털어내듯 상자에 핸드폰을 탁탁 털었다. 곧바로 와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흡사 터진 콩 주머니에서 콩이 우르르 쏟아져 나올 때와 같은 소리가 났다.

사람들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지고 피부가 창백해졌다. 내 바로 앞에선 무례한 남자의 표정은 더 했다.

한참 동안 방 안에 내 핸드폰이 다이아 쏟아 내는 소리로만 가득했다. 챠르르, 하는 소리를 제외하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고요했다.

“저… 드루이드님. 다이아 수량이 오버 되었습니다.”

안내원의 말에 상자를 보니 1500의 숫자는 사라지고 +158이란 숫자만 남아 있었다. 이 난쟁이들이 수레로 부으랬더니 진짜 수레를 엎어 버렸나?

“그래요? 그럼 한 개 더 따죠, 뭐.”

난 300을 마저 맞추기 위해 핸드폰을 더 털었다. 핸드폰에서 와아아, 하는 난쟁이들의 함성 소리가 들리더니 숫자가 +312가 되어 버렸다. 아, 이거 완벽하게 딱 맞추기 힘드네.

“남은 건 팁이에요. 안내해 줘서 고마워요.”

더 정중해진 안내원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나는 데이지의 등을 떠밀며 마음에 드는 열매를 하나 더 골라 보라고 하였다.

“내 행운은 너야. 네가 고른 열매가 내게 행운을 줄 거야. 등급은 상관없어. 그냥 아무거나 고르렴.”

내 말에 데이지는 얼굴을 붉히더니 우물쭈물하면서 나와 무례한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내가 손짓을 하자 작은 손에 든 열매를 옷의 주머니에 넣고는 자신의 키에 맞게 내려온 가지에서 열매를 하나 똑 땄다. 그 모습이 기특해서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온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상자를 가져다 놓은 안내원이 따로 마련된 방으로 날 안내했다.

“이거 내가 당신의 행운의 숫자를 채 가서 어쩌나? 응? 억울하면 18이라도 맞춰 봐. 18에도 8이 들어 있으니까! 18! 하하하!”

나는 한 손엔 열매를 가득, 다른 손으론 데이지의 손을 꼭 잡고 안내원을 따라갔다. 방 안은 여전히 정적만 흐를 뿐이었다.

기분 째진다! 아까 무례한 남자에게 맞받아칠 땐 심장이 쿵쿵거려서 터질 것 같았는데 지금은 무척이나 후련하고 기분이 상쾌했다. 돈 최고! 돈지랄은 더 최고!

어두운 통로가 이어졌다. 경사가 낮아지는 것이 어째 지하로 향하는 느낌이었다. 어둠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밝은 빛이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온실이란 곳은 굉장했다.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빛이 닿았다. 피부에 닿는 빛은 매우 따뜻했다.

데이지도 기분이 좋은지 풀어진 얼굴을 했다. 빛은 천장의 거대한 수정에서 쏟아지는 것으로 보였다. 사방이 크리스탈 같은 유리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딛고 선 바닥은 금으로 이상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계단 한 개 층 정도 더 높은 곳에 반짝이는 흙이 가득 찬 거대한 석조함이 자리했는데, 양각으로 풍성한 나무가 조각되어 있었다. 함 옆엔 거대한 석판이 푸른빛을 띠고 서 있었다.

“여기 위에 열매들을 놓으시면 드라이어드를 개화할 준비가 되신 겁니다. 석판을 통해 열매의 유전자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유전자 정보요?”

“네, 더 설명을 해 드릴까요? 아니면 바로 개화를 진행하실 건가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무척이나 정중한 안내원은 내 안위를 샅샅이 살피며 내가 조금이라도 궁금한 표정을 짓자 곧바로 반응해 왔다. 설명은 땡큐지.

“세계수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드라이어드들의 유전 정보를 가지고 있단 건 알고 계시죠?”

“…….”

아는 척할까 말까? 슬쩍 데이지가 걱정되는 척 바라보니, 아이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온실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세계수는 모든 드라이어드들을 이 열매를 통해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열매에서 어떤 드라이어드들이 태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죠. 어쩌면 어떠한 드라이어드도 태어나지 않고 열매 그 자체로 양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후에 태어난 드라이어드들을 위한 거름이 되는 거죠. 직접 온실에서 개화시키기 전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그렇군요.”

“이 석판은 여기 드라이어드 포트에 열매를 두었을 때 발아 단계에서 유전 정보를 확인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유전 정보는 드라이어드들의 등급을 알 수 있는 직관적인 정보죠. 모체가 되는 식물의 자라는 환경, 계절, 수명, 꽃의 아름다움, 희귀도 등등 약초인지 독초인지에 따라서도 등급이 결정됩니다. 즉, 희귀하고 가치가 높을수록 드라이어드들의 등급도 높습니다.”

어렵네… 그니까 뭐… 산삼 같은 건 스페셜이려나? 어느새 구경을 끝낸 데이지가 내 옆에 섰다. 나는 데이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유전 정보를 먼저 확인하시고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개화를 포기하실 수 있습니다. 즉 다음에 태어날 좋은 등급의 드라이어드 거름으로 주면 되죠. 아마 소유하신 열매의 개수가 많으시니 노멀 등급 정도는 거름으로 주셔서 무방하실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제일 처음에 만났던 남자처럼 레어만 나와도 장땡이라 이건가? 그런데 갑자기 데이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 그러니?”

“어… 저… 드루이드님. 제가 급한 일이 생각나서요… 먼저 가 봐도 될까요?”

“갑자기?”

“진짜 급한 일이라서요! 제가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저 바로 가 봐야 될 것 같아요!”

아이는 내가 말리기도 전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열매를 죄다 내게 떠넘기고 온실을 뛰쳐나갔다. 대체 급한 일이 뭐길래 저렇게…. 혹시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걸까? 그런 거면 너무 미안한데. 애가 너무 착해서 말도 못 하고 날 따라왔구나….

찝찝한 마음에 데이지가 나간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설명을 마저 들으러 몸을 돌렸다. 어쩐지 안내원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데이지가 나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네요….”

“네? 뭐가요?”

“아, 아닙니다. 바로 개화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네네, 되도록 빨리요. 애가 걱정되기도 하고.”

내 말에 안내원은 다시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곤 나를 석조함으로 안내했다. 지시에 따라 들고 있던 열매를 하나 올려 보았다.

열매는 흙을 만나자 바르르 떨었다. 동시에 석조판도 빛이 강렬해지며 어떠한 글자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완전 기대된다! 드라이어드! <테라리움 어드벤처> 사전 예약 페이지에 있던 그 화려한 일러스트의 캐릭터들이 나오는 걸까? 혹시 <해리포터>의 만드레이크 같은 이상한 게 나오면 어떡하지?

그런데 석판에 새겨진 글자가 ‘NO DATA’…. 뭐 인마?

“이런 첫판부터 운이 좋지 않으시네요. 드라이어드의 정보가 담긴 열매가 아닙니다. 이건 다음에 태어날 드라이어드의 거름으로 사용하시는 것이 좋겠네요.”

그런데 그 후로도 내리 세 개가 같은 문구였다. 그러니까 내가 딴 6개의 열매 중 4개가 꽝이라는 거다. 미친, 유료 뽑기인데 꽝이 나올 수 있나요?

“너무 상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열매는 제값에 다시 파실 수 있습니다. 풍부한 영양분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열매라서 드라이어드가 발아한 열매보다 효능이 좋기 때문입니다. 아마 높은 등급을 키우시는 드루이드분께 거름용으로 파시면 다시 열매를 따실 수 있으실 겁니다.”

나야 내키면 밖의 열매를 다시 죄다 따다가 도전하면 상관없긴 한데. 지금 완전 기대하고 있는 상태인데 자꾸 이럴 거냐고! 제발 뭐라도 나와라! 노멀이든 레어든 이런 양분 덩어리 열매를 몇 개라도 사서 키워 줄 테니까!

난 원래 처음에 얻은 모든 것에 애정을 쏟았다. 처음 얻은 펫, 장비, 용병 등등. 더 이상 사용 못하더라도 방출하거나 팔아 버리지 않고 부적처럼 고이 가지고 다니는 성격이었다. 그 수많은 것들 중에 단번에 날 찾아왔다는 것이 얼마나 뜻깊은데. 내가 좀 감성적인 사람이다.

이번엔 반드시 드라이어드가 나오길 기도를 하며 두 개의 열매 중 데이지가 직접 골라서 땄던 열매를 포트에 올려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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