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604)

큰일이네. 나 걷는 거 진짜 싫어하는데. 냅킨의 깨끗한 부분으로 아이의 입가를 닦아 주니 얼굴은 당황했으면서도 얌전히 있었다.

“그럼 준비 없이 지금 바로 가면 될까? 나 진짜 가진 건 다이아뿐인데 혹시 따로 사야 될 건 없을까?”

“음, 저도 잘 모르겠어요. 돈이 많은 분들은 포션이나 식량을 많이 사서 가시긴 해요.”

그 ‘많이’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잡히네. 뭐 됐다. 물건은 나중에 사고 지금은 가장 궁금한 그 ‘과수원’에 빨리 가 보고 싶었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여관을 나서는 우리를, 여관 주인은 살뜰히 배웅해 주었다.

도착한 과수원은 내가 상상하던 그런 넓게 펼쳐진 사과밭이 아니었다. 거대한 온실이 떠오르는 유리 돔 건물이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것이 노래방 미러볼 반쪽 똑 떼다가 엎어 놓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절망스럽게도 사람이 너무너무 많았다. 입구에 다다르기 전까지 어깨에 치인 횟수만 열 번은 넘을 것 같았다.

이대론 나보다 키가 작은 데이지는 휩쓸리겠다 싶어서 양해를 구하고 번쩍 안아 올렸다. 당황한 데이지가 발버둥을 쳤지만 그에 맞춰 내가 휘청거리자 움직임을 멈췄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게 모셔 왔나 봐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어요.”

“아냐, 아냐. 어차피 더 일찍 깨웠어도 내가 못 일어났을 거야. 그나저나 이 사람들이 전부 드루이드야?”

“아뇨, 구경꾼도 섞여 있을 거예요. 좀처럼 보기 힘든 구경거리니까요.”

버스와 지하철을 타던 스킬로 열심히 사람들을 뚫고 지나갔다.

“번호표는 어디서 뽑는지 알아?”

“안녕하세요. 제가 도움을 드릴까요?”

데이지가 말한 번호표를 뽑기 위해 열심히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웬 남자가 말을 걸었다. 단정하게 빼입은 정장 차림에 이 사람은 여기 안내원일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는 어쩐지 내가 안고 있는 데이지를 묘한 눈으로 한 번 보고는 금세 표정을 지웠다. 내가 무언가 불쾌한 기분을 느끼기에는 너무 짧은 순간이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도움 좋죠. 어, 좀 이용하려고 왔는데 번호표는 어디서 뽑나요?”

뭘 이용하는 줄도 모르면서 일단 던져 보았다. 최후의 경우엔 데이지한테 헬프 쳐야지.

“현재 저희 테라리움 측에서 무상으로 제공해 드리는 열매 번호표의 경우 이미 발급이 종료되었습니다.”

“어떡해요? 드루이드님! 오늘을 놓치면 다시 1년을 기다리셔야 해요!”

데이지가 안절부절못하며 내 옷깃을 잡고 흔들었다.

헐! 그럼 나 이용 못 하는 거야? 모험 못 떠나? 게임 못해? 이건 내 예상에 없었는데! 잠깐! 무상이랬잖아? 무상은 끝났지만 유료는?

“그럼 유료는요? 다이아를 지불할게요.”

“유료로 열매를 구매하시는 경우 번호표가 따로 필요 없습니다. 안내해 드릴까요?”

“콜! 갑시다!”

안내원을 따라가는 도중 건물의 한편을 차지하고 선 긴 행렬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하얀 종이를 소중히 안고 있었다. 저게 설마 번호표인가? 그들은 나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나는 그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몇 시부터 왔을까?

“1년에 한 번씩밖에 열매가 열리지 않으니 수량은 한정되어 있답니다. 그중 테라리움 정책상 반 정도의 수량은 처음 모험을 떠나는 드루이드님들께 무상으로 제공을 해 드려야 하지요. 100개만 드릴 수 있기 때문에 3일 전부터 밤을 새워 가며 줄을 서는 분들도 계시답니다.”

3일 밤샘! 쩐다. 문득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팬 사인회에 가기 위해 밤샘을 했다던 친구가 떠올랐다. 새로 나온 핸드폰을 먼저 사기 위해 줄을 섰던 동기도.

난 체력이 달려서 그렇게 못 하겠던데. 진짜 대단들 하다.

남자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거대한 나뭇가지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곳이었다.

저게 세계수의 나무인 걸까? 가지에 금빛으로 반짝이는 거대한 나뭇잎과 함께 동그랗고 투명한 열매들이 은은하게 빛을 발하며 매달려 있었다.

안엔 나 말고도 사람이 더 있었다. 그들은 뒤늦게 들어서는 나를 한 번 쳐다봤다가 피식 웃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뭐야? 기분 더럽게.

“저도 여긴 처음 와 봐요….”

“그건 나도 그래.”

데이지를 내려놓으니 힘드시진 않았냐며 걱정을 한다. 귀엽다.

뭘 어째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방 한 칸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남들 하는 것 보고 따라 할 셈이었다. 그런데 웬 남자가 우리의 옆에 따라 앉았다. 그러곤 굳이 안 물어봤는데 떠들기 시작했다.

“오늘을 위해 부모님께서 가진 땅을 팔아 다이아를 마련하셨어.”

“그랭….”

“우리 부모님은 내가 훌륭한 드루이드가 되길 바라셔. 그러기 위해선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레어(Rare) 등급의 드라이어드를 뽑아야만 해. 물론 그 이상의 유니크(Unique)나 스페셜(Special) 등급을 뽑으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그렇구나.”

굳이 물어보진 않았지만 고맙다. 비장한 표정을 짓는 남자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넌 할 수 있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 주자 그는 다이아가 가득 들어 있을 법한 주머니를 꼭 끌어안으며 심호흡을 했다.

결국 여긴 뽑기 하는 곳이란 거구나? 이름을 과수원이라고 해 놔서 헷갈렸잖아.

원래 랜덤 뽑기는 극혐이지만, 지금 난 돈이 많잖아? 예전부터 돈 걱정 없이 연속 뽑기 계속 돌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런데 이젠 내가 할 수 있네? 열매 하나의 가격이 얼만지 상관없이 나 여기 있는 열매 다 사도 되는 거 아냐?

마침 누군가가 가지에서 투명한 구슬 같은 열매를 똑 떼었다. 그리고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따로 마련된 방으로 사라졌다. 저 열매가 캐릭터가 나오는 카드 같은 거란 말이지?

“노멀은 안 돼! 뽑으면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절대 노멀은!”

그가 갑자기 매서운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그 바람에 데이지가 놀라서 움찔 몸을 떨었다.

“왜?”

“전투력도 약하고 초반 스킬도 별로야. 회복 스킬을 쓸 수 있는 드라이어드면 돈 많은 사람에게 팔 수라도 있어서 괜찮지만 딜러면 망했다고 봐야지. 좋은 등급의 드라이어드의 거름으로 줘 버리면 몰라도 난 지금 딱 한 번 딸 수 있는 다이아밖에 없거든.”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뽑기 게임에서 저 남자가 하는 말이 기본으로 통용되는 룰이긴 하지만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고 해야 할까?

이 알 수 없는 기분에 그에게 시선을 떼고 멍하니 가지만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엄청난 환호성이 터졌다.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불안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리고 몇 명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누가 유니크 등급 이상 드라이어드를 뽑았나 봐! 가지 하나에서 유니크 이상이 여러 개 나올 확률은 극히 적은데…. 이번에 포기하고 내년에 도전해야 하나? 젠장…! 다이아 뽑기가 확률이 더 높대서 부모님께서 무리하신 건데!”

옆의 남자는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정신을 사납게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거리를 많이 벌린 후 앉았다. 어쩐지 데이지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졸졸 따라왔다.

“왜 그래? 저 사람 때문에 그래? 좀 이상한 사람 같지?”

“아니에요….”

도통 표정이 풀릴 기세가 안 보여 주머니에서 다이아 한 개를 꺼내 아이의 눈앞에 흔들었다.

“이거 줄까?”

“아… 아니에요!”

데이지가 얼굴을 붉히며 화들짝 고개를 쳐들었다. 이 한 개로 아이의 기분이 풀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럼 열 개도 백 개도 줄 수 있는데. 데이지는 다행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누가 시클라멘을 뽑았대! 꽃색도 진해서 유니크인가 봐!”

“이런! 노리고 있던 드라이어드 중 하난데! 이제 이 가지에서 시클라멘이 나오긴 글렀군.”

“다행이다….”

밖으로 뛰쳐나갔던 사람이 들어오며 소리쳤다. 그에 맞춰 안의 몇 명이 탄식을 하거나 혹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었다. 갑자기 방 안에 무거운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꼭 내가 뽑기 할 때 누군가 좋은 등급을 뽑아서 전광판 뜨면 긴장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뽑으면 등급이 높은 건 어떻게 알지?

“구경 가 볼래?”

나는 혹시 데이지가 시무룩한 게 좋은 구경거리를 놓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아이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그냥 여기서 나와 함께 있고 싶다고 했다.

나와 같이 있고 싶다니? 혹시 나를 의지해 주는 건가?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찡했다.

“관둘래! 그냥 내년을 노리는 게 낫겠어. 유니크라니. 사실 레어 등급만 얻어도 상관없지만 왠지 기운이 좋지 않아.”

혼자 떠들던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이쯤 되니 대체 뽑기에 다이아가 얼마가 필요한지 궁금해졌다. 나는 사람들이 열매를 선택할 때까지 멀뚱히 서 있는 안내원에게 손을 들었다. 나를 방으로 데려왔던 그는 한달음에 다가왔다.

“다이아는 언제 지불하면 돼요?”

“먼저 열매를 따신 후 개수에 맞춰 지불하시면 됩니다. 물론 미리 지불하셔도 됩니다. 다이아는 전부 과수원의 유지비로 사용된답니다.”

“아, 네.”

그래서 얼마냐고 물으려던 순간 누군가 값을 치르는지 다른 안내원이 들고 온 상자에 다이아를 와르르 쏟아 내는 것이 보였다.

상자에 적힌 숫자는 300, 그 자의 손에 들린 열매는 한 개. 뽑기 한 번당 다이아 300개군. 그래서 아까 땅을 팔아서 모았다고 했구나. 확실히 여기 사람들 입장에선 겁날 만큼 큰 액수긴 하지. 빵 세 개와 우유 두 병을 1다이아로 살 수 있었으니 300다이아면 빵 900개와 우유 600병을 살 수 있으니까.

좋아, 가격도 알았고 방식도 알았다. 나는 데이지의 손을 잡아끌고 가지 아래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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