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내가 꼭 필요해서 그래. 아직 궁금한 걸 다 해결하지도 못했고.”
“제가 내일 아침 일찍 올게요!”
“그래, 그거! 아침 일찍!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내가 사실 아침잠이 많아서 좀처럼 일어나지를 못해. 누가 옆에서 깨워 주지 않으면 하루 내내 잘 거야. 내일은 정말 내게 중요한 날인데 난 자느라 시간을 날려 버릴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정말 큰일 아니니?”
“그… 그렇죠?”
“그래서 내가 널 필요로 하는 거야. 고용! 그래! 아르바이트! 아르바이트가 뭔지 알지?”
나는 마음이 급해져 되는대로 지껄였다. 그런데 우리 말을 듣고 있던 주인이 대뜸 중재를 위해 다가왔다. 내가 수상한 사람인 줄 알고 신고하면 어떡하지?
“이 애를 아르바이트생으로 쓰겠다고요? 이 앤 정말 그냥 마을에서 떠돌아다니는 아이라 전문 인력을 쓰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제가 인력 사무소를 추천해 드릴 수도 있는데.”
“그런 거창한 건 필요 없고 전 그저 바로 옆에서 소소한 것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면 돼요.”
“아! 저 알 것 같아요! 드루이드님은 곱게 자라셨다고 하셨으니까 옆에 항상 시종을 두신 거죠? 저 동화책에서 봤어요! 시종이 필요하신 거죠? 헙!”
아이는 황급히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내가 비밀이라고 당부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대충 지껄인 설정이라 들켜도 상관은 없는데. 귀엽기도 하지. 여관 주인은 파닥대는 데이지를 빤히 바라보다가 내게 말했다.
“손님이 얼마 없어 본의 아니게 듣게 되었는데, 귀하신 분 같은데 어찌 이리 누추한 곳에….”
“사정이 있어서요! 그래요, 사정! 원래 다들 하나쯤 사정을 가지고 있잖아요?”
이게 무슨. 쪽팔려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 맞는지. 내 언어 구사력은 이것뿐인지….
여관 주인은 그래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제가 생각해도 좀 이상하긴 해요. 그런데 더 둘러댈 말이 없는데 대충 이해해 주시면 안 될까요? 흑흑.
“무엇보다도 이 아이가 무척이나 착하고 친절해서 같이 있으면 제가 편해서 그래요.”
내 난데없는 칭찬에 데이지의 얼굴이 빨개졌다. 여관 주인은 내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지가 착하긴 하죠. 그런데 저 혹시… 알아보신 건가요?”
“네? 뭘요?”
딱히 놓친 대화도 없는 것 같은데 여관 주인은 이상한 질문을 했다. 뭘 알아봤냐는 걸까?
“음, 아니에요. 그럼 데이지도 여관에 묵게 하실 건가요? 추가금이 발생해요.”
“전 괜찮아요! 그럼 여관 문밖에서 잘게요! 아침에 올라가서 깨울게요!”
오, 셈이 빠르시군! 나는 다급히 주머니에서 대충 다이아 다섯 개를 꺼냈다. 다이아를 본 주인과 아이 모두 눈이 커졌다. 말 바꾸기 전에 신속히 처리해야 했다.
“이 아이가 묵을 방과 내일 아침, 그리고 물 세 병 값을 치를게요.”
“그건 안 돼요! 제가 받기에는….”
데이지가 고개와 손을 마구 젓기 시작했다.
“이분의 말을 따르는 게 좋겠구나.”
여관 주인은 황급히 다이아를 받아 갔다. 그러곤 데이지의 거듭되는 거절에 다이아를 다시 돌려줘야 하는 상황이 올까 봐 날 두둔해 주기 시작했다. 영리하시네!
“회관은 춥기도 하고 좁아서 제대로 누워 자기 힘들지 않니? 바닥도 딱딱하고. 넌 일어나면 당장 그날 식사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니 이 상냥하신 드루이드님께서 호의를 베풀 때 받거라. 이분도 너의 도움이 필요하시다고 하니 과한 처사는 아니라고 생각되는구나.”
그러곤 물 세 병은 방으로 올려 보낼게요, 하고 빠르게 사라졌다. 예쓰! 이걸로 됐다! 안절부절못하는 데이지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들어 보니 아이가 이곳에서 묵는 것이 더 나아 보이니까 괜찮겠지.
“너무 다이아를 많이 쓰셨어요….”
“괜찮아. 나 다이아 많아.”
썩어 넘치지. 슬리프 상태인 핸드폰을 깨우니 <무한 다이아> 게임 화면이 바로 떴다. 난쟁이들이 굴러다니다가 나를 보고 양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다이아 소지 개수 999,999,999,999,988개.
딱 내가 꺼냈던 만큼 수가 줄어 있었다. 그마저도 수레를 터치하니 8이 9로 바뀌었다. 이것 봐, 이거 여기서 평생 펑펑 써도 다 못 쓸 것 같은데.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로또에 백 번 당첨돼도 이 금액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루아침에 벼락부자, 아니 억만장자? 그래! 조만장자가 된 거 아냐?
게임 아이템 구매할 때도 5만 원이 넘어가면 벌벌 떨던 내가, 이젠 <무한 다이아>에서처럼 구매 버튼을 무한 터치해도 전혀 아깝지 않은 지경이 된 것이다.
짜릿해! 빨리 돈 쓰고 싶다! 펑펑 쓰고 싶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두렵던 마음도 ‘어차피 여긴 게임이니까’ 하는 생각에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나는 데이지가 보는 앞에서 손바닥에 핸드폰을 몇 번 탁탁 털어 주었다. 다이아가 와르르 굴러 나왔다. 야이씨, 갑자기 이렇게 많이 나오면 어떡해! 넘칠세라 멈췄다. 화면을 보니 난쟁이들이 작정하고 삽으로 다이아를 내 쪽으로 퍼서 던지고 있었다.
“필요한 만큼만 쓸 거야! 필요한 만큼만!”
[주인님! 더 가져가세요! 수레가 가득 차서 저희가 일을 할 수 없어요!]
나는 다이아가 떨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내 주머니에 던져 넣고는 여봐란듯이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데이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데이지를 간신히 2층 방으로 올려 보냈다. 방을 두 개 준비한 것이 아닌 한 방에 침대가 두 개 있는 2인용 방을 배정받았다.
데이지는 푹신한 침대에서 자 보는 것은 처음이라며 정말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 후로 내가 아이에게 이것저것 질문하는 일은 없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순식간에 피로가 몰려오는 바람에 눈이 가물가물했기 때문이다.
“대가를 제대로 주는 분은 드루이드님이 처음이에요…. 아니 실은 더한 것을 주셨죠. 다들 제가 어리다고 도움만 받고 떠나 버리셨거든요. 부당해도 전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데이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나는 조금 눅눅한 냄새가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감기려는 눈에 순응했다.
“드루이드님이 아니셨다면 전 정말 당장에 내일 아침을 걱정해야 했을 거예요. 아픈 곳 없이 눈을 떴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물을 얻기 위해 새벽이슬이 맺힌 유리창을 떠돌아다녔을 거예요. 전 지금이 정말 꿈만 같아요.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너무 늦게 가면 앞서 나간 아이들에게 목 축일 물도 다 빼앗겨 버렸겠죠.”
데이지는 이불을 소중히 꼭 쥐고 천장을 바라보며 재잘재잘 말했다. 그래, 좋아 보이니 나도 좋다.
데이지는 정말 챙겨 주고 싶은 아이란 생각이 새삼 들었다. 순전히 내 이익을 위해 이용당한 것뿐일 텐데. 잠깐 같이 지냈다고 정이 들었는지 이마저도 양심이 콕콕 찔려 온다.
“안녕히 주무세요, 드루이드님! 내일 아침 꼭 일찍 깨워 드릴게요!”
그래, 하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난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
“…드루이드님!”
10분만… 시리, 알람 10분 뒤로 맞춰 줘. 진짜 10분만. 내가 어제 좀 늦게 잔 거 같아. 머리 안 감을 생각이니까 좀 더 자도 돼.
“드루이드님! 아침이에요!”
“싀리이….”
아니 그냥 오늘 자체 휴강할래. 강의가 뭐 있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요 근래 잘 나갔으니 괜찮을 거야. 뭣하면 학과실 가서 휴강 사유서라도 끊자….
“드루이드님! 아침 식사가 벌써 준비되었대요! 과수원은 여기서 멀어서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셔야 해요!”
과수원… 과수원… 드루이드… <테라리움 어드벤처>! 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게임 모험 시작하는 날!
“정말 못 일어나시네요. 저 10번은 넘게 깨운 것 같아요.”
“기특하구나. 보답으로 아침 식사는 물론 후식도 챙겨 줄게.”
“아니에요!”
아이는 새벽이슬을 적신 수건이라며 내게 건네고 황급히 아래로 뛰어갔다. 아침부터 힘도 좋다. 난 뒈질 것 같은데.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수건으로 얼굴을 벅벅 닦았다. 개운하게 세수를 하고 싶지만 물이 부족한 상태라고 하니 무리겠지?
어젠 입맛도 없고 배도 안 고팠는데, 계단을 타고 내려올 때마다 따라붙는 음식 냄새에 절로 침이 고였다. 냄새 하난 기가 막히네! 벌써 테이블에 앉아 미어캣처럼 목을 쭉 빼고 날 바라보고 있는 데이지가 보였다.
나는 데이지에게 곧장 가지 않고 주방으로 향했다. 여관 주인이 요리사와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다이아 하나를 꺼내서 바에 올려 두었다.
“어제 보니까 데이지가 먹는 양이 많더라구요. 음식을 좀 더 준비해 주세요.”
“값은 어제 치른 걸로 충분한데.”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다이아를 두 개 더 꺼냈다. 두 사람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럼 제가 떠난 후에도 데이지의 식사를 잘 챙겨 주세요. 아이가 너무 착해서 뭐라도 더 해 주고 싶어서요. 혹시 다이아가 더 필요한가요?”
“아유, 됐어요. 데이지의 점심을 가끔 내주는 건 순전히 다 우리 호의로 한 거지! 하지만 이건 고맙게 받을게요.”
다이아 두 개가 홀랑 주인의 앞치마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요리사는 다시 화로에 냄비를 올렸다.
“무슨 이야기 하셨어요?”
“별거 아냐. 식겠다. 어서 먹자.”
내가 포크를 들고 푸석한 샐러드를 한 조각 집어 먹자 그제야 데이지가 황급히 손을 놀려 음식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언제 봐도 먹는 모습이 복스럽다. 저렇게 식탐이 큰 사람이 보통 뭘 허겁지겁 먹으면 추잡할 정도인데, 데이지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천천히 먹어. 물도 마시고.”
어제 데이지는 물병에 손을 대지 않았는지 세 병 다 온전히 있었다. 나도 바로 잠들어 버렸고.
목이 마르면 그냥 마셔도 되는데. 컵에 물을 따라서 건네주니 눈치를 보면서도 잘 받아 마신다. 어휴… 어쩜 저리 귀여울까? 내게 동생이 있었다면 저런 느낌이었을까? 외동이라 형제 자매 있는 친구들이 마냥 부러웠었는데 대리 만족하는 기분이었다.
고기 조각을 조금씩 찍어 먹으며 데이지의 먹는 속도를 살폈다. 이대론 새 요리가 나오기도 전에 동날 것 같아서 내 몫으로 놓인 그릇과 접시들을 살짝 밀어 주었다.
“드루이드님은 안 드세요?”
“난 아침에 원래 많이 안 먹어.”
개뻥이었다. 난 아침에 삼겹살도 구워 먹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데이지의 먹는 모습만 봐도 어쩐지 배가 부르는 느낌이었다.
그 후로 때맞춰 줄줄이 나오는 요리들에 데이지는 이상함도 느끼지 못하고 잘 먹었다. 아이가 식기를 놓는 타이밍과 더 이상 요리가 나오지 않는 타이밍이 잘 맞았다.
“과수원은 여기서 얼마나 걸려?”
어젠 없었는데 주인이 슬쩍 건네준 냅킨에 입을 닦으며 물었다. 데이지는 입가에 양념 칠을 하곤 냠냠거리며 말했다.
“좀 오래 걸으셔야 해요. 어제 저희가 만난 곳에서 더 가야 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