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낯선 곳에 떨어지면 집에 돌아갈 걱정을 먼저 해야 되는데… 이게 게임 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까 이 미친놈의 호기심이 불쑥 내 가설이 확실한지를 확인해 보고 싶어 했다.
살면서 누가 이런 신기한 경험을 해 보겠어? 응? 믿어 줄진 모르겠지만 이거 완전 자소서에 쓰면 대박감이잖아?
순식간에 바닥을 보이는 그릇을 보며 슬금슬금 내 몫의 고기를 퍼 넘겨주었다. 데이지는 보는 사람이 절로 흐뭇할 정도로 잘 먹었다.
“여기 물도 한 잔 주세요!”
그러고 보니 보통 식당에 가면 기본으로 주는 물조차 없었다. 손을 들어 카운터의 주인을 부르니 그녀가 대뜸 곤란하다는 얼굴을 했다.
“아이고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우리 마을이 요즘 물이 부족해서 말이야. 물 한 병을 시키려면 추가금이 붙는데….”
데이지가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불’ 때문에 우물들이 메말라 가고 있다고 했던가.
“얼마 드리면 돼요?”
주인은 슬쩍 손가락 한 개를 펴 보였다. 다이아 한 개라는 건가? 나는 주머니에서 다이아 한 개를 꺼내서 그녀에게 주었다. 그리고 물 한 병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병 콜라 크기의 병에 미지근한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뒤이어 컵 한 개가 함께 내어졌다. 나는 컵에 물을 따라 데이지에게 건넸다. 체할 수도 있으니 천천히 물도 마셔 가며 먹으라고 하자 데이지는 자신에게 컵을 건넬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서 마셔.”
재촉을 해도 데이지는 컵을 노려보기만 할 뿐 선뜻 손을 대지 못했다.
“제게 너무 과분해요. 저는 오늘 마을의 울타리를 하루 종일 수리하시는 분들보다 과한 대접을 받았어요….”
“너는 내게 그보다 더한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 괜찮아.”
아이는 컵에 손을 대는 것은 성공했지만 좀처럼 마시지는 못했다. 오히려 부담이 가득한 얼굴이 되어 우리 사이에 어색한 기류만 흘렀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
나는 일부러 카운터를 힐끔 쳐다보며 아이에게 몸을 가까이했다. 그러곤 손을 둥글게 모아 입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무한 다이아’ 게임에서) 엄청 부잔데, (‘무한 다이아’ 게임에서) 모아 놓은 다이아만 쓰며 생활하다 보니 (특히 이 세계의) 세상 물정을 몰라. 내가 좀 곱게 자랐거든 (무한 다이아에서 터치만 했지).”
“그… 그러신가요?”
“내가 아는 것이 없어서 사기를 당할 수도 있잖아? 네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에게 이걸 부탁했는데 그 사람이 욕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내 다이아를 노리고 날 해하면 어쩌겠니?”
“그… 그럼 큰일이죠!”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널 굉장히 귀찮게 할 것 같거든. 그래서 미리 잘해 주는 거야.”
“귀찮다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전 그냥 아는 것만 설명해 드리면 되는 걸요!”
그렇지, 그렇지. 데이지가 날 바라보는 눈빛이 좀 바뀐 것 같지만 이 정도면 내 주머니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다이아도 대충 설명이 되겠지. 어느새 텅 비어 버린 데이지의 그릇과 내 가득 찬 그릇을 슬쩍 바꿔치기했다.
“말을 많이 하려면 체력이 필요할 테니까 양껏 먹어 두렴.”
“네! 많이 먹고 드루이드님께 도움이 될게요!”
데이지는 그제야 물도 마시고 다시 스푼을 열심히 놀리기 시작했다. 그릇을 다 비워 갈 때쯤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집이 어디니? 날이 어두워지면 부모님이 걱정하실 텐데 미리 연락을 하거나 그 근처에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전 집도 없고 부모님도 없어요. 잠은 근처에 있는 마을 공동 회관에서 자니까 괜찮아요. 저처럼 고아인 애들을 위해서 문을 항시 열어 두거든요.”
이건 예상 못 했던 답인데. 찬물로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혹시 데이지의 상처를 건든 거면 어떡하지?
“어…. 미안하다.”
“아니에요. 마을엔 저 같은 아이들이 많아요. 다들 불 때문에 부모를 잃었거든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 불에 대해서 내가 좀 들어도 될까? 네가 아는 모든 것을.”
이건 상식이 맞았나 보다. 아이의 얼굴이 순간 멍청해졌다. 왜 그런 당연한 것을 묻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슬쩍 그 눈을 피했다. 어떻게 질문을 더 포장해야 하지? 좀 더 돌려 말했어야 했나?
다행히도 아이는 적당히 머릿속에서 나의 질문에 대해 알아서 결론을 내렸나 보다. 아이는 입맛을 다시며 스푼을 내려놓고 내게 해 줄 말을 정리하기 위해 흠, 콧소리를 냈다.
“여긴 세계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마을이라 불의 습격이 덜해요. 하지만 마을 밖으로 조금만 나가도 불이 습격할 거예요. 불을 잡을 수 있는 건 세계수에서 태어난 드라이어드들밖에 없는 건 알고 계시죠?”
“알지, 알지. 드라이어드.”
모르지, 드라이어드. 드라이아이스는 아는데…. 하지만 난 원래 드라이어드를 알고 있었던 척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시방편으로 마을 주위에 해자를 파고 불에 타지 않는 금속으로 울타리를 둘러 두었지만 말 그대로 임시방편일 뿐이에요. 매번 드루이드님들께서 드라이어드들을 이끌고 불을 퇴치하여 수를 줄여 주지 않으면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어요. 저도 들은 건데 이미 여기서 조금 떨어진 옆 마을은 불에 당해서 다 타 버렸대요.”
불이 ‘Fire’가 맞긴 하나 보네. 근데 불을 무슨 몬스터처럼 이야기를 하지. 헐, 정말 몬스터 같은 개념인가? 진짜 게임 같다.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왜 드라이어드들만 불을 퇴치할 수 있는 걸까? 아, 이건 정말 지식 탐구적인 입장에서 궁금한 거야. 오해하지 마. 내가 원래 이런 생각을 잘해.”
“그거야 세계수에서 태어났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보통 식물은 불을 이길 수 없지만 세계수에서 태어난 드라이어드들은 특수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드라이어드가 내가 친구 핸드폰에서 본 사전 예약 페이지의 그 화려한 일러스트 캐릭터들 같은 건가? 뽑기로 나오는 용병 같은 것 말이다.
오, 그렇게 대입하니 말이 된다. 여긴 뉴비들의 스타트 마을 같은 거고. 애초에 게임 시스템으로 생각하니 내겐 게임 막 시작한 뉴비의 생소함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와, 심장이 마구 뛰었다. 내가 카드 뽑기 게임은 안 좋아해도, 애초에 게임 자체는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보니 흥분이 되었다.
나 여기서 막 레벨 업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야? 완전 설레네. 최종 목표는 뭘까? 업적도 있나? 보스도 때려잡아야 하나? 심지어 난 돈도 많잖아?
이거 완전 치트 키 써서 다이아 소지 수 무한대 찍어 놓고 플레이하는 버그 유저 아냐? 와 씨, 생각만 해도 짜릿하네. 여기에 담배만 딱 하나 물고 허공에 주먹질만 할 수 있으면 더 대박인데.
흥분을 가라앉히려 입을 틀어막고 끙끙거렸다. 몬스터 때려잡으려면 뭐부터 해야 하지? 스킬도 배울 수 있나? 누구한테 배울 수 있지? 나 손에서 막 불도 뿜고 물도 쏘고 그럴 수 있는 거야?
“저…. 드루이드님. 막상 모험을 떠나시려니 두려우신 마음이 드는 건 이해해요. 하지만 이건 드루이드님들의 숙명 같은 거겠죠? 저는 드루이드님들의 그런 숭고한 마음을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내 행동을 오해한 데이지가 아주 귀여운 소리를 했다. 나는 침착하게 심호흡을 했다. 정신 나간 여자로 보일라.
“큼큼. 그래, 너 말처럼 조금 두려워지기도 하네. 그런데 말이야. 내가 너무 두려워서 좀 정신이 없는 상태라 그런데, 난 내일 뭐부터 해야 할까?”
데이지가 분명 내일이 적기라 했지. 세계수가 뭔 열매를 맺는 날이 내일이라 했으니까. 그럼 모험의 시작이 내일부터란 소린데, 초보 퀘스트 주는 NPC는 누굴 찾아가면 되는 거니. 아니 혹시 기초 스킬부터 배워야 한다거나.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과수원에 가셔야죠.”
그 과수원이 내가 아는 과수원은 아니겠지. 사과 따고 배도 따는 그런 과수원은 아닐 거 아냐? 이 게임이 알고 보니 농장 운영 게임이라 다이아가 아니라 과일을 키워서 수확해야 되는 건가?
“물론 그렇겠지? 내가 과수원에서 꼭 해야 되는 일이 있으니까. 하지만 과수원에서 뭐부터 해야 되는지 헷갈려서 그래. 오해하지 마. 내가 이 마을의 과수원은 처음이잖니? 길도 모르고.”
“아, 그렇죠! 제가 실수했어요. 여기도 다른 마을의 과수원들과 크게 다르진 않을 거예요. 번호표를 받으시고 대기하시면 돼요. 길은 제가 내일 알려 드릴게요!”
거기서 설명이 끝나면 안 되지! 난 최대한 열심히 돌려 말했는데 그렇게 다 잘라먹으면 어떡하니. 번호표 받고 대기하는 건 은행에서도 해 봤는데, 내가 과수원까지 가서 돈을 예금하진 않을 거 아니니. 내 속도 모르고 데이지는 정말 화사하게 방실방실 웃었다.
“더 궁금한 건 없으세요?”
물어봐야 할 건 산더미같이 있는데 정작 뭘 물어봐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애초에 게임 막 시작한 뉴비한테 온갖 FAQ나 가이드를 들이밀어도 그게 눈에 들어오겠는가.
출시되는 게임은 수백 가지고 거기서 사용하는 용어도 같은 뜻이라 해도 제각각이니 직접 겪고 의문이 생기기 전까진 모르지. 그렇다고 이 기회를 날려 버릴 순 없었다.
만약 내가 데이지를 돌려보냈는데 갑자기 궁금한 게 생기면 어떡하지? 난 지금처럼 데이지가 알아서 떠들고 거기서 건진 키워드로 질문하는 것이 편한데.
“네 말처럼 내가 갑자기 좀 피곤하네. 그런데 아직 궁금한 게 많아서 말이야. 네 도움이 많이 필요한데….”
난 슬쩍 운을 떼었다.
“그럼 궁금한 게 생기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아니 그러기엔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잖니. 어린애 혼자 밤에 돌아다니면 좀 위험하지 않을까?”
“전 괜찮아요!”
이 마을 치안이 좋나? 아니 그래도 여러 나라를 통틀어 치안이 좋다던 우리나라도 그렇게 흉흉한 사건 사고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데.
“혹시 오늘 네가 말한 마을 회관으로 꼭 돌아가 봐야 하는 일이 있니?”
“음, 그건 아니에요.”
“그럼 나랑 같이 이 여관에 하루 묵는 건 어때?”
아이고, 제안이 좀 셌나 보다. 아이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나쁜 어른이 된 것 같다.
그래도 다 같이 생활하는 마을 회관보다 여기가 좀 낫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