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604)

우린 빠르게 타협점을 찾았다.

아이가 처음에 내걸었던 조건처럼 내가 물건을 사서 그 일부를 아이에게 주는 것으로 말이다.

아이는 이곳 시장은 여행자들이 많이 몰리는 곳이라 단가가 비싸다며 마을 외곽으로 날 안내했다.

가는 길에 생소한 풍경 때문에 미친 듯이 고개를 휙휙 돌리는 날 보며 “처음 오신 곳이라 많이 신기하시죠? 그래도 이곳은 세계수의 가지가 영향을 주는 곳이라 사정이 나아요.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 활기에 가득 차 있죠.”라며 웃었다.

세계수는 대체 뭘까? 오래 굶었는지 몫으로 건네준 빵과 우유를 허겁지겁 먹는 소녀의 모습이 너무 짠해 보여서 차마 바로 물어보질 못했다.

이 마을에선 예상했던 대로 다이아를 화폐로 사용했다.

아이가 안내해 준 빵집에선 다이아 하나로 빵 세 개와 우유를 두 병을 구입할 수 있었다. 미친 물가…. 코트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다이아 뭉텅이를 생각하니 어쩐지 겁이 났다.

큰돈을 무방비 상태로 들고 다니는 것과 다름없잖아? 심지어 내 핸드폰엔….

“더 먹을래…?”

갑자기 긴장이 되어 어쩔 줄 모르겠는 상태가 되자 괜히 옆의 아이에게 잘 대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믿을 건 오늘 처음 봤지만 어쩐지 너뿐일 거라는 강한 믿음이 든다, 얘야.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한 일에 비해 받는 보상이 너무 과하다며 거절했다.

그럼 배는 안 고픈데 남은 건 어떻게 처리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아이가 여상스레 “주머니에 넣으면 되잖아요? 나중에 드세요.”라며 말했다.

아니 이 작은 주머니에 이게 어떻게 들어가 하며 넣는데… 잘 들어간다.

안에 미지의 공간이 있는 것처럼 넣어도 주머니가 볼록해지거나 하지 않았다. 심지어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 자꾸 현실과 멀어지는데…?

“여기예요. ‘과수원’과 멀지만 싼값에 좋은 방을 구할 수 있어요. 하지만 좀 일찍 일어나셔야 될 거예요.”

아이는 내가 혼란에 빠진 동안 한 여관 앞으로 착실히 안내해 주었다.

내가 아는 모텔 같은 개념이 아니라 진짜 판타지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목조 여관이었다.

1층은 식당으로 쓰고 2층은 숙박업소로 쓰는 진짜 그런 여관. 왠지 용병들이 와서 술잔을 기울이며 중요 정보를 토해 내는 그런 곳 말이다.

나는 점차 이곳이 어쩌면 한국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저는 가 보겠습니다. 음식을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드루이드님의 앞길에 행운이 깃들기를 빌게요!”

“잠깐, 잠깐. 나를 위해 더 일해 줄 생각 없니? 네 도움이 좀 필요해. 대가는 얼마든지 줄게.”

“음, 제가 할 수 있는 일인가요? 전 별다른 능력이 없어서 마을의 곳곳을 소개해 드리는 일밖에 할 줄 몰라요.”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내가 너 말고 다른 지나가는 누군가를 붙잡고 ‘님, 대체 여기가 어디예요?’ 할 순 없잖아? 난 지금 이곳에서 완전 문외한 상태라 내 의심을 확실시하기 위해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애가 나돌아다니면 얼마나 위험한데!

그러나 아이는 내 말에 도리어 경계하는 표정이 되어 주춤 뒤로 물러났다.

“드루이드님 같은 분이 저같이 능력도 없는 어린 여자애의 도움을 꼭 필요로 하신다고요?”

무얼 걱정하는지 알겠다. 그놈의 드루이드란 호칭이 대체 뭔지 모르겠지만 나 같은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좀 이상하지. 꼭 납치범들 수법 같잖아.

“아 일단 여관을 소개해 준 건 고마워. 그런데 내가 이 마을에 대해 좀 궁금한 게 많아서 그래. 넌 이 마을에 대해 잘 알잖아? 혹시 걱정이 된다면 여기 여관 식당에서 대화하는 게 어떨까?”

1층의 식당은 그렇게 넓지도 않고 탁 트여 있으며 카운터에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상시로 서 있는 것 같으니 아이도 안심하지 않을까?

다행히 아이는 “아, 그런 거라면 제가 도와 드려야죠!” 하면서 내 요청을 승낙해 주었다.

“오, 데이지! 오랜만이구나. 세상에 손님을 데려온 거니? 이제 너도 다 컸구나. 아유, 어서 오십쇼!”

이 애 이름이 데이지였구나. 여태 이름도 모른 채로 함께 다녔네. 시장 쪽의 여관 주인들이 꺼지라고 욕하는 등 괴팍했던 것에 비하면 이곳의 주인은 정말 친절했다.

어린 데이지에게도 잘 대해 주는 모양인지 아이의 얼굴이 무척 편안해 보였다. 검증된 좋은 곳을 안내해 준 데이지가 마냥 고마웠다.

요리는 달리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으니 주인이 추천하는 음식으로 나와 데이지 몫까지 2인분을 주문했다. 숙박도 대충 하루 묵겠다고 말했다. 비용으로 다이아 두 개를 치렀다.

주인은 기분 좋은 얼굴이 되어 주방이 훤히 보이는 창을 향해 “여기 양고기 스튜 둘!” 하고 소리쳤다.

그나저나 데이지는 빵이랑 우유도 먹었는데 더 먹을 수 있으려나? 걱정과 다르게 아이는 무척이나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자랐구나….

“요리를 대접해 주셔서 감사해요! 여기 여관 음식은 엄청 맛있어요. 주인아주머니께서 절 자주 챙겨 주셨거든요.”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엄청 기대된다.”

“뭐든 물어보세요! 최선을 다해 알고 있는 모든 걸 설명해 드릴게요!”

자리는 카운터와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 지금부터 물어볼 질문이 이곳에서 상식 수준인 지식이면 저 사람들이 많이 이상하게 볼 것 같으니까.

이곳의 화폐가 다이아임을 감으로 때려 맞힌 내가 어느 선까지가 상식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데이지가 편히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해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최대한 간단한 질문들을 할 생각이었다.

아까 빵 먹을 때 보니까 오죽 급하게 먹어야지. 음식이 나오면 먹느라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좋아, 일단 뭐부터 질문할까?

“여긴 어디야? 아, 질문이 조금 이상했다. 이 마을은 이름이 뭐야?”

“여긴 ‘세계수의 26번째 테라리움’이에요. 가끔 드루이드님처럼 숫자를 헷갈려하시는 분들이 계시긴 해요.”

크흠, 한국치고 생소한 지명 맞지…? 나 정말 이상한 곳으로 온 것 같은데. 여기서 집엔 어떻게 돌아가야 하지? 그나저나 테라리움은 어디서 들어 봤는데… 어디서 들어 봤더라?

“음… 숫자에 달리 의미가 있나?”

“세계수의 26번째 가지가 닿는 곳이란 뜻이죠. 숫자가 작을수록 세계수에 가까워진다고 해요.”

나에 대한 경계가 완전히 풀린 데이지는 자신이 아는 지식을 모두 내게 전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음식에 대한 보답 외에도 자신이 어리긴 하나 정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무척이나 뽐내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얀 볼에 홍조가 올라올 만큼 흥분하여 쉬지 않고 입을 움직였다.

아이의 말로 인해 마을들의 작명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세계수의 N번째 테라리움, 세계수의 영향을 받는 곳은 이렇게 이름을 짓고 N은 세계수에서 뻗어 나온 가지에 따라 이름이 지어진다고 한다.

N의 숫자가 작을수록 세계수에 가까워지고 클수록 멀어진다. 또한 세계수에서 멀어질수록, 세계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일수록 ‘불’에 대한 피해가 크다고 한다.

사실 뭔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세계수는 뭐고 ‘불’은 내가 아는 그 ‘Fire’가 맞는지… 그런데 이걸 묻기에는 너무 당연한 상식으로 보여서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와, 정말 똑똑하구나. 아는 게 정말 많은걸?”

좀 국어책 읽기 톤으로 말이 나오긴 했는데, 난 온 힘을 다해 데이지를 칭찬해 주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들뜬 아이가 이것저것 덧붙여서 떠들어 줬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확실히 데이지는 흥분하니 말이 정말 많아졌다.

“그런데 왜 날 드루이드라고 부르는 거야?”

이건 상식 아니겠지? 제발, 제발….

“그야 모험을 떠나시려고 이곳에 오셨기 때문이죠. 아니신가요? 다들 불 때문에 위험해서 다른 마을에 잘 오지 않거든요. 거기다 세계수의 가지가 열매를 맺는 시기를 맞춰서 오셨기에 넘겨짚었는데…. 혹시 제가 틀린 건가요?”

“아냐, 아냐. 나 드루이드 맞을 거야. 아마?”

와, 나는 아이가 대답하자마자 불현듯 떠오른 가설 하나 때문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여기 혹시 <테라리움 어드벤처> 아니야? 동기가 사전 예약하라고 보여 줬던 그 게임 말이다.

다만 그땐 <무한 다이아> 서버 종료 걱정하느라 게임을 제대로 살펴보진 않았는데, 이곳이 묘하게 RPG 게임을 떠올리게 하는 배경이었기에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생각이라고 본다. ‘테라리움’이나 ‘드루이드’ 같은 단어는 사전 예약 성공 문자에서도 봤고….

근데 내가 왜 아직 오픈도 안 한 게임 안에 있느냔 말이지. 아직 현재엔 소설 속에나 등장하는 가상 현실 게임이 발명되지도 않았잖아? 아니 심지어 <테라리움 어드벤처>는 그냥 모바일 게임인데.

[???] 업적을 완료하고 받은 보상에서 이상한 열쇠가 튀어나왔고, 열쇠 때문에 핸드폰이 맛이 가더니 갑자기 흰 빛이 날 덮쳤고… 정신 차려 보니 집이 아닌 이상한 곳에 떨어졌고. 아, 담배 당겨.

난 슬리프 상태인 핸드폰을 꺼내 착잡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꿈인가? 꿈이기엔 묘하게 현실감 있지?

“너 혹시 이게 뭔 줄 알아?”

데이지가 핸드폰을 알아봐 줬으면 좋겠다. 만약 데이지도 핸드폰이 있다면 좀 빌려 쓸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여관에서 전화라도 쓸 수 있을지도 몰라. 내 핸드폰은 맛이 가서 깨우면 난쟁이들이 또 다이아 염불을 욀 거 같은데.

“그거 월렛이잖아요?”

“그래… 월렛. 혹시 너도 있니?”

“아뇨, 전 월렛이 필요할 만큼 다이아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한 개도 없거든요.”

망했어. 내 상식으론 이건 핸드폰인데 이쪽에선 월렛인가 봐. 난쟁이들도 월렛이라고 하더니.

나는 심호흡을 했다. 이제 그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였다.

솔직히 난쟁이들이 나한테 말 걸고 핸드폰에서 다이아가 튀어나올 때부터 예상은 했잖아? 내가 아는 현실과는 뭔가 많이 다른 세계란 걸.

지금이라도 몰래 카메라였다고 주방에서 사람들이 손뼉 치며 뛰어나와도 곱게 받아들일 텐데.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좌절하고 있는데 음식이 나왔다. 데이지는 그릇에 푸짐하게 담긴 고깃덩어리들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먼저 먹으란 뜻으로 손짓했다.

“하지만… 돈을 지불하신 드루이드님이 드시지 않는데 제가 먼저 먹어도 되는 걸까요?”

“난 사실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아. 그런데 여기 요리사가 열심히 만든 요리를 안 먹고 남기면 그가 매우 슬퍼할 거야. 나는 완전 나쁜 사람이 되겠지. 그러니 네가 좀 도와줄 수 있지?”

궤변이지만 통했다. 내 부탁은 물고기에게 물에서 수영해 줄래? 정도의 레벨이었는지 데이지가 신이 나서 스푼을 놀렸다. 잘 먹네. 식성도 정직해서 고기부터 집중 공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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