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604)

여긴 어디? 분명 신발을 벗을 때만 해도 우리 집 현관이었는데… 왜 내가 어느새 야외에 있는 거지? 이 거적때기 같은 코트는 또 뭐야? 알바비 모아서 산 내 코트는 어디 가고.

주위를 둘러보니 감히 예상도 못 할 장소에 내가 서 있었다.

땅덩어리 좁은 서울인데도 아파트 같은 고층 건물 하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탁 트인 전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낮은 층의 건물들.

아무리 개성이 중시되는 사회라지만 인디 문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이상한 옷차림…. 저거 설마 갑옷 아냐?

형형색색의 머리색과 피부색을 가진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 피부가 초록색이라고? 행위 예술이 아니라?

대체 여긴 어디? 위치 서비스라도 이용할 겸 핸드폰을 봤는데 결국 운명했는지 까만 화면뿐이었다. 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RPG 게임이나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장면들이 현실로 내 눈앞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핸드폰과 함께 내 머리도 맛이 간 건가…?

“뭐야? 손님이야? …아니면 영업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

아이고, 내가 한 건물의 입구를 막고 서 있었나 보다. 안에서 통통한 남자가 튀어나오더니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는 주먹을 흔들며 성을 내기 시작했다.

아재들 성질머리 하나는 안 바뀐 거 같은데. 어쨌든 저 커다란 주먹에 한 대 맞을 것이 두려워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피해도 거기가 거기였다.

“거지는 안 받아!”

“여기 이용료가 얼만 줄 알고 어슬렁거리는 거야!”

“우리 여관 문 앞에 서 있지 마! 오던 손님도 쫓아내겠다!”

“그 행색을 하고 방을 얻겠다고?”

워낙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내가 피하는 족족 건물의 입구를 막게 되다 보니 안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득달같이 튀어나왔다.

문을 막은 건 죄송한데 왜 자꾸 사람을 거지 취급하는 건지…? 남은 인류애마저 모두 소멸할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 나라가 이렇게 사람 사는 정이 눈곱만큼도 없이 야박했는지….

할 수 없이 빠른 걸음으로 정처 없이 피하다 보니 어느새 어두운 골목길에 서 있었다. 설마 여기서도 꺼지라는 소린 안 하겠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상황 파악을 위해 밝은 거리를 힐끔 내다보았다. 영화 세트장 같기도 한 거리에 특이한 옷과 외형을 한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시끌시끌하게만 느껴졌던 소음도 마음을 진정시킨 채 집중해서 들어 보니 뚜렷한 말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상점가보다 낮게 드려요! 하급 강화석이 10다이아!”

“무기 감정해 드려요! 파격 할인 3다이아!”

“직접 제조한 포션 챙겨 가세요! 연금 탑보다 싸게 드립니다! 병당 5다이아에 드려요!”

다이아? 내가 <무한 다이아>에 미쳐 버려서 환청이 들리나? 포션이 어쩌고 강화석이 어째? 게임에서나 들을 법한 용어들을 대체 왜 재래시장 속 고등어처럼 친숙하게 말하는데?

“아니 무슨 결혼반지 이야기할 때나 겨우 나올 법한 다이아가….”

[주인님!]

“악! 뭐야?”

꺼지라는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린 나머지, 갑자기 바로 옆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발작하듯 튀어 오르고 말았다.

주위에 나밖에 없는데? 어디서 말소리가 들린 거지? 귀신인가….

놀라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주인님! 다이아가 필요하세요?]

“왜 귀신도 다이아 염불을 외냐. 대체 어디서 들리는 거야?”

[주인님! 여기예요! 여기!]

여기라는 외침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기니 내 손에 곱게 들린 핸드폰에 다다랐다. 뒈진 핸드폰이 말을 한다.

“…헬로우 시리…?”

[주인님! 다이아가 필요하세요?]

“엥? 무한 다이아?”

뒈진 줄 알았던 핸드폰이 살아났고 무척이나 낯익은 화면이 보였다. <무한 다이아>의 게임 화면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열심히 곡괭이질을 하고 있어야 할 난쟁이들이 죄다 내 쪽을 바라보며 두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솔직히 소름 끼쳤다. 핸드폰이 살아났다는 희망만 아니었으면 진즉 내던졌다.

내가 반응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은 채 바라만 보고 있자 난쟁이들이 손을 흔들던 것을 멈췄다.

그러곤 다이아 수레에 엉금엉금 올라가더니 양손에 다이아를 하나씩 들고 다시 흔들기 시작했다. 뭘 어쩌라는 건지….

“포션 두 병 주세요.”

“앗 여기 있습니다! 다 해서 10다이아 입니다!”

마침 쩌렁쩌렁한 호객 행위 속에 상인 한 명이 거래에 성공했다. 몇 캐럿짜리 반짝반짝 다이아몬드가 오가는 다이아 거래인지 너무 궁금해서 황급히 그곳을 바라보았다.

액체가 든 병 두 개를 소중히 안고 있는 사람이 주머니에서 건넨 것은… 시퍼런 색 다이아였다. 그러니까 저거, 내 핸드폰 화면 속에서 난쟁이들이 양손에 쥐고 흔드는 그것과 똑같이 생겼다.

“저거… 저거….”

[주인님! 다이아가 필요하세요? 수레에 산더미만큼 있어요!]

[주인님! 지하 창고에도 산더미만큼 있어요!]

[주인님! 분수대에도 자갈 대신 다이아가 산더미만큼 깔려 있어요!]

상인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푸른 다이아를 한 번, 난쟁이들이 야광봉처럼 흔드는 푸른 다이아를 한 번 보았다. 둔한 머리가 생각을 멈춰 버려서 두 눈을 끔벅끔벅….

야, 근데 너희 언제부터 나한테 말도 걸 수 있었냐? 도트 주제에….

“내가 그 다이아를 뭐 어찌할 수가 있어?”

[마음껏 가져가세요! 이곳의 다이아는 전부 주인님 거예요!]

[주인님! 삽으로 퍼 드릴까요?]

[주인님! 양동이로 퍼 드릴까요?]

도트 새끼들이… 상식적으로 그래픽에 불과한 다이아를 어찌하라는 건지….

“너흰 대체 뭐야? 언제부터 인공 지능이었어? 대답하는 거 보면 너희가 시리보다 똑똑한 것 같은데.”

[여긴 주인님의 월렛 안이에요!]

[모험을 떠나시려면 다이아가 많이 필요해요! 다이아는 많이 있어요!]

[어서 다이아를 가져가세요! 옷도 사고 무기도 사고 용병도 사고 숙식도 해결하세요!]

나란 멍청이, 근본부터 멍청한 쓰레기. 지금 다이아나 귀신 들린 것 같은 핸드폰 화면이 문제가 아니었다.

“너희 설마 지금 여기가 어딘 줄 알아?”

대체 여기가 어디냔 말이다. 느낌상 서울이 아닌 건 알겠다. 그런데 외국어가 들리는 건 또 아니라 한국이 아예 아니라고 단정 짓지도 못하겠고.

내 질문에 좀 전까지 참새처럼 잘만 재잘거리던 난쟁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서로를 쳐다보며 수군거리기도 하고 어깨를 으쓱하기도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짓기도 했다.

[주인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있는 여기가 지금 어딘지 아냐고!”

[저흰 잘 모르겠어요! 저흰 주인님의 충실한 월렛일 뿐이에요! 다이아를 쓰세요! 궁금한 것도 다이아로 해결하세요!]

세상이 무슨 <무한 다이아>인줄 알아? 다이아로 모든 것이 통용되던 게임 속인 줄 아냐고! 속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이런 내 속도 모르고 난쟁이들은 연신 다이아를 쓰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좋아, 알았어. 그래, 다이아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데?”

[꺼내 가세요!]

내 손에 들린 것이 단종된 시리즈의 핸드폰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던졌다. 무슨 핸드폰에서 다이아를 지갑에서 지폐 꺼내듯 꺼내 가라고 여상하게 말하고 있어.

열 받아서 핸드폰 화면을 뒤집고 손바닥에 탁탁 두드리자, 미친, 알약 쏟아지듯 푸른 다이아 대여섯 개가 굴러떨어졌다.

도트 그래픽의 다이아가 아닌, 진짜 다이아가 내 손바닥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손을 꽉 쥐니 정십이면체의 작고 딱딱하고 차가운 돌들이 만져졌다.

[주인님! 더 가져가세요! 겨우 그거론 모자라요!]

시험 삼아 다시 손바닥에 대고 자일리톨 껌 꺼내듯 살짝 핸드폰을 터니 다이아 두어 개가 더 굴러 나왔다.

와 진짜 이거…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리얼한데.

난쟁이들이 이것도 가져가라며 양손에 든 다이아를 더 힘차게 흔들었다. 난 내 손에 들린 다이아 한 움큼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저… 저기요.”

“미친… 이게 진짠가? 대체 어떤 핸드폰이 그래픽을 4D로 구현할 수 있지. 나도 모르는 사이 미래로 온 건가?”

“저기요…. 실례합니다.”

“헐, 그럼 미래 사람들은 다 저렇게 갑옷 입고 다니고 그러는 거야, 막?”

“저기요! 드루이드님!”

또 핸드폰 화면 속 난쟁이들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 무시했는데 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웬 작은 꼬마 여자아이가 골목 입구에 서 있었다.

넌 언제부터 거기 있었니? 혹시 나 혼잣말하는 것도 봤니? …쟤도 외형이 특이하네.

아이는 탈색 서너 번은 해야 나올 것 같은 새빨간 머리에 대충 천을 기워 만든 듯한 꾀죄죄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내가 잔뜩 경계하고 바라보자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드루이드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 마을에서 안내를 해 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만약 여관을 구하시는 거라면 제가 괜찮은 곳을 아는데 저에게 안내를 맡겨 주시면 안 될까요?”

치마 양 끝을 잡고 살짝 다리를 굽혔다 편다. 저 인사법, 중세 영화에서 본 것 같다. 오, 특이하다. 내가 답이 없자 어떻게 해석했는지 아이가 급하게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지금 시기에 시장 주변의 여관을 구하면 덤터기를 쓸 가능성이 커요! 여행을 떠나시려는 드루이드님들이 몰리니까요. 조금 멀지만 마을 변두리 쪽 여관으로 가시면 훨씬 싼값에 숙박을 해결하실 수 있어요! 대가는 많이 안 바랄게요! 그저 드루이드님께서 식량을 구매하시고 거기서 조금만 저에게 떼어 주시면…. 그저 빵 한 개 정도만….”

이거 꼭 그거 같다. RPG 게임 시작할 때 튜토리얼(Tutorial, 사용 지침 따위의 정보를 알려 주는 시스템). 처음 시작할 때 ‘안녕하세요! 용사님!’ 하는 페어리 같은 거 말이다.

“여관?”

“네, 내일은 세계수의 가지가 열매를 맺는 날이니 다들 늦지 않게 모이신 거잖아요? 이미 이 주변 여관은 포화 상태라 손님을 새로 받을 때 값을 많이 요구할 거예요. 이 마을에 처음 오시는 분들이라면 잘 모르시겠지만….”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확실히 내 핸드폰 속 난쟁이들보다 저 여자애가 백배 천배 더 도움이 될 거란 건 알겠다.

이렇게 생판 모르는 낯선 곳에서 나에게 말을 건 사람이 어린 데다 나와 같은 여자애란 점에서 경계가 풀렸다. 다른 상황이었으면 ‘뭐야, 저 사기꾼 새끼는?’ 하고 생각했겠지.

“혹시 빵 대신 다른 것도 받니?”

“어…. 깨끗한 물 몇 모금도 괜찮아요. 지금 마을 우물들이 ‘불’의 영향으로 메말라 가고 있거든요. 아니면 과일이나….”

워씨, 큰일이네. 난 지금 빵도 물도 과일도 없는데. 아니 근데 무슨 요구하는 조건이 돈도 아니고 먹을 거람? 나는 혹시나 해서 내 손에 들린 한 움큼의 다이아 중 한 개를 꺼내 아이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이런 것도 받니?”

아이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두 눈은 미친 듯이 흔들렸고 당황하여 마구 손사래를 치기 시작했다.

“과해요! 제겐 너무 과해요! 전 그저 드루이드님이 구매하신 후 남는 것들 조금만 얻으면 돼요!”

그래, 이 다이아가 확실히 가치 있는 물건이라는 건 알겠다. 물건 살 때 화폐처럼 지불하질 않나 저 아이가 화들짝 놀랄 정도의 반응을 보이질 않나.

“이거 줄게. 대신 나 좀 도와줘.”

“저는 그걸 얻어도 지킬 능력이 없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탐은 나는지 내가 흔드는 다이아를 따라 시선이 움직인다. 하지만 내가 가진 건 핸드폰과 이상한 싸구려 코트와 핸드폰에서 굴러 나오는 다이아뿐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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