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7화 8. 초월의 서(序) (2) >
새하얀 빛줄기가 휘몰아치며 이안의 시야를 가득 뒤덮었다.
시커먼 악령들이 득실거리던 에카리스의 신전은 점점 빛무리 속으로 묻혔으며.
자연스레 눈을 감았던 이안은 천천히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여기는…….”
그리고 눈을 뜬 이안은 주변을 둘러보며 눈을 끔뻑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공간은.
눈부신 섬광으로 가득 찼던 시야와 완전히 대비될 정도로,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아있는 공허의 공간이었으니 말이었다.
‘신뢰의 계승이라…… 마지막은 어떤 퀘스트일까?’
한 치 앞을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이안의 주변에 짙게 깔려있는 시커먼 어둠.
하지만 그 칠흑 같은 어둠이 그리 기분 나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처음 보는 공간에서 이안이 느끼는 감각은.
어머니의 태중(胎中)에 있는 아이가 느낄 감각처럼, 포근하고 아늑한 것이었으니까.
‘지혜의 계승만큼이나 전혀 감이 안 오는 퀘스트네.’
이안은 대충 확인했던 마지막 퀘스트의 정보 창조차 다시 열어 보지 않았다.
현자의 탑에서 그에게 주어진 모든 고난의 퀘스트들은.
그 정보 창 안에 퀘스트에 대한 어떤 정보도 담겨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정보 창을 분석하며 이어질 퀘스트에 대해 연구할 시간에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게 더 낫다고 느껴질 수준.
“…….”
그리고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잠시 명상 중인 이안의 눈앞에 낯선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저벅, 저벅.
이어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며.
이안은 천천히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이안은 그 그림자가 적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일단 그에게서 어떤 적의가 느껴지지 않기도 하였지만.
아무리 시련 퀘스트가 기상천외하다고 한들, 사전에 아무런 단서나 예고도 없이 다짜고짜 그를 공격하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안은 그림자의 대답을 듣는 순간.
그의 생각이 맞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는가?
외모는 완전히 달랐지만.
남자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그에게 시련 퀘스트를 준 고룡 드라키시스의 그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여 피식 웃은 이안은 드라키시스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게 마지막 시련을 주러 오신 겁니까?”
-그렇다, 초월의 길에 오른 자여.
이안과 드라키시스의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이어서 선풍도골 노인의 모습을 한 그를 이안은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신뢰의 계승이라…… 이번엔 어떤 시련입니까?”
이안의 질문을 받은 드라키시스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이안을 응시하기만 하던 그는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가 극복해야 할 마지막 고난은…….
뜸을 들이는 드라키시스를 보며 이안은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꿀꺽.
하지만 드라키시스의 말이 이어진 바로 다음 순간.
-어쩌면 지금까지의 그 어떤 고난보다 가장 어려운 시련일 수도 있으며, 반대로 가장 쉬운 시련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안은 벙한 표정이 되어 반사적으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예?”
그가 물은 것은 분명 퀘스트의 내용이었는데 드라키시스의 대답은 거의 동문서답에 가까운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는 시련의 종류를 물은 것이지, 난이도를 물어본 게 아닙니다만…….”
하지만 당황한 이안의 반문에도 불구하고 드라키시스는 그가 원하는 답을 해 주지 않았다.
아니, 해 주지 못했다.
-어떤 시련인지를 묻는다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는 별로 없다.
“그게 무슨……?”
-이 마지막 시련은 그대의 의지로 극복되는 시련이 아니기 때문이다.
드라키시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안의 머릿속은 점점 더 혼돈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아니, 뭐 이런 이상한 퀘스트가 다 있어?’
하지만 다음 순간.
이안은 이번엔 떨떠름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우웅-!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드라키시스가 예의 그 황금빛 게이트를 소환했으니 말이다.
-그대가 해야 할 것은 단 하나.
“……뭡니까?”
쥐고 있던 나무지팡이를 치켜 든 드라키시스가 그것으로 황금빛 게이트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저 반대편으로 다시 나오는 것뿐이다.
“…….”
도무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라키시스의 퀘스트 설명에, 이안은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뭐 이런 퀘가 다 있어?’
하지만 npc는 결국 기획된 대로 움직이는 존재일 뿐이었으니.
이안은 너무 깊게 생각지 않기로 하였다.
일단 그가 하라는 대로 움직인다면 분명 어떤 시련이 나타날 테니 말이다.
‘말해 주기 싫으면 그냥 그렇다고 얘기하면 되지…….’
속으로 툴툴거리며 천천히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떼는 이안.
“여하튼 저 안으로 들어가면 드라키시스 님이 안배한 마지막 시련을 치를 수 있게 되는 거죠?”
그에 대한 드라키시스의 대답은 무척이나 간결하였다.
-그렇다.
그리고 그 답을 들은 이안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저 안에 들어가면 뭔가 새로운 에피소드에 떨어지는 건가? 또 뭔가랑 싸워야겠지?’
하지만 그 또한 잠시뿐.
이제 완전히 머릿속의 혼란을 비운 이안은 망설임 없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래,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고 그렇게 황금빛 포탈 앞까지 다가선 이안은 그 안으로 스르륵 발을 내딛었다.
* * *
크르릉-!
오늘도 평화로운 카이론 분지.
회색늑대 라이는 오늘도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하였다.
‘크릉, 햇살이 따뜻한 게 잠을 좀 더 자고 싶긴 하지만…….’
라이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동료 늑대들을 보며 활기찬 하루를 시작하였다.
뭔가 조금 기분이 묘하고 몽롱했지만.
그는 분명 카이론 분지의 회색늑대, 라이였다.
‘크릉, 크릉! 그나저나 오래 자서 그런지 배가 무척 고프군.’
푸른 초원을 뛰어다니며 허기를 달래기 위한 먹잇감을 찾는 라이!
그러던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등에 활을 메고 있는, 약해 보이는 인간이었다.
‘크릉! 오늘의 사냥감은 너로 정했다!’
인간의 앞에 다가간 라이는 기선 제압을 하기 위해 으르렁대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 카이론 분지의 회색늑대들 중에서도 대장을 할 정도로 뛰어난 늑대!
이런 허약한 인간 따위, 그의 상대가 될 리 없었으니 말이다.
크릉- 크르릉-!
하지만 그의 앞에 나타난 인간은 라이가 생각지도 못 했던 반응을 보여 주었다.
“이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
마치 꿀밤을 먹이기라도 할 모양새로 주먹을 번쩍 치켜들며, 라이를 향해 피식 웃는 희한한 인간.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라이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크릉? 어어……?’
분명 오늘 처음 만났다고 생각한 이 요상한 인간의 얼굴이, 갑자기 낯이 익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크르릉……!
라이는 잊고 있던 기억이 모두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크릉? 주인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니, 그 전에……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라이는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수년 동안 이안과 함께 모험하며 이미 늑대들의 제왕 ‘소버린 펜리르’까지 진화한 그가.
대체 왜 과거의 상황에 놓인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크릉, 꿈인가?’
하지만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별개로.
라이는 지금 그가 뭘 해야 할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크르릉. 당장 튀거나 주인에게 포획되거나…… 둘 중 하나를 해야 해.’
라이의 기억 속에서 지금 이 순간.
이안에게 죽기 직전까지 맞았던 기억이 번뜩 떠올랐던 것이다.
‘크르릉! 일단 튀자! 주인에게 맞는 건 너무 아플 테니까.’
이안의 매운 주먹맛을 떠올린 라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 바로 다음 순간.
‘크릉, 그런데 잠깐. 만약 여기서 내가 도망치면 다시 주인을 만날 수 없게 되는 건가?’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른 라이는 이안의 앞에서 갈등하기 시작하였다.
* * *
꾸르륵.
심연의 호수 깊숙이 존재하는 어두운 동굴.
머리가 유난히 큰 거북이 한 마리가 어둠 속에서 헤엄쳐 밖으로 빠져 나왔다.
뿍- 뿍-.
그의 정체는 심연의 호수를 수호하는 어비스 터틀 뿍뿍이!
오늘은 오랜만에 섬으로 올라가서 맛있는 별식인 심연의 이끼를 뜯어먹을 계획이었다.
‘뿍! 쫀득하면서도 입 속에서 녹아내리는 부드러운 이끼를 잘 찾아야겠뿍!’
이끼의 쫀득한 식감을 떠올린 뿍뿍이는 벌써부터 행복한 표정이 되어 엉금엉금 뭍으로 기어 올라갔다.
‘오늘은 좀 더 멀리 모험을 떠나야겠뿍.’
그는 원래부터 게으른 성격 때문에 멀리 움직이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오늘은 더 맛있는 먹이를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모험을(?) 좋아하는 멋진 거북이였으니까!
뿍- 뿍-.
뿍뿍은 여느 때처럼 뿍뿍거리는 소리를 내며, 리듬에 맞춰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참 엉금엉금 기어가던 그는 멀리서부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뿍? 못생긴 인간이다 뿍!’
뿍뿍은 살짝 긴장했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 누구도 용맹한 심연의 거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잠시 후.
그 인간이 그에게 다가와 지팡이로 그의 등껍질을 건드렸다.
툭- 툭-.
‘뿍! 감히 날 건드렸뿍!’
찌릿!
인간을 한번 째려본 뿍뿍은 쏜살같이 등껍질 안으로 몸을 숨겼다.
“얘 뭐야?”
남자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되어 뿍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 지금 맛있는 이끼 먹으러 가야된다, 뿍!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지나가라 뿍뿍!’
뿍뿍은 남자가 얼른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투덜댔다.
그런데 남자는 지나가기는커녕, 갑자기 이상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포획!”
그리고 그의 손에서 뻗어나간 하얀 빛이 뿍뿍의 몸을 향해 다가왔다.
뿍뿍은 그 이질적인 기분이 마음에 안 들었다.
‘뿍! 귀찮뿍!’
그가 빛을 거부하자 그 빛은 허공으로 흩어졌고 남자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뿍뿍은 귀찮은 인간이 빨리 자신에게서 관심을 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남자가 자신의 지팡이를 들어 올리더니 뿍뿍의 등껍질을 내려쳤다.
퍽-!
그는 별로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상했다.
‘뿍! 감히 날 때리다니!’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더니 계속해서 등껍질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너무 약했나?”
퍽- 퍽- 퍽-.
하지만 뿍뿍이 느끼기에는 별 차이 없는 의미 없는 두들김이었다.
‘귀찮! 귀찮뿍!’
그러자 남자는 더욱 당황했다.
“뭐야 이거?”
그리고 오기가 생겼는지 또다시 지팡이를 휘둘렀다.
퍽-!
하지만 지금까지와 별 다를 것은 없었다.
“이거 뭐 하는 녀석이야?”
남자가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늑대도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르릉-?
“라이야 한번 물어봐.”
그가 말하자, 늑대는 뿍뿍에게로 다가와 등껍질을 깨물었다.
크릉-!
그에 뿍뿍은 분노했다.
‘내 명품 등껍질에 기스 난다, 뿍! 누가 이것들 좀 데려가라 뿍뿍!’
하지만 그의 등껍질은 단단했다.
등껍질을 물은 늑대만 오히려 이빨이 아픈지 낑낑거렸다.
이 쯤 되었으면 포기할 법도 했는데 인간은 갑자기 뿍뿍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얘는 안 가고 뭐 하냐뿍!’
눈앞에 쫀득하고 야들야들한 이끼가 아른거리는데 이상한 인간 때문에 껍질 속에서 나갈 수 없자 뿍뿍은 짜증이 났다.
그런데, 그때.
쪼그려 앉아서 뭔가를 생각하던 인간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가방 속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킁, 킁킁.
이어서, 뿍뿍의 코 안으로 향긋한 냄새가 스며들어오기 시작했다.
‘뿍-? 이, 이 냄새는……!’
향긋한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들어온 그 순간.
뿍뿍이는 뭔가 몽롱한 기분이 되었다.
“뿍……?”
그리고 마치 번개라도 맞은 듯.
머릿속 어딘가에 꼭꼭 숨겨져 있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뿍, 이건 무슨 상황이냐뿍. 내가 왜 여기 있냐뿍.’
수많은 기억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하자 뿍뿍이는 당황하였다.
하지만 그 또한 잠시뿐.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바로 그 냄새에 뿍뿍이는 일단 등껍질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야 했다.
그리고 그 곳에는.
무척이나 낯익은 동그란 고깃덩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거북아, 이거 진짜 맛있는 거야. 안 나오면 후회할걸?”
남자. 아니, 이안은 뿍뿍이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유혹에 그는 다시 고민을 시작하였다.
‘치, 침샘이 폭발한다뿍. 마약미트볼을 먹으면 행복해질 것 같다뿍!’
하지만 뿍뿍이는 미트볼을 향해 가지 않고, 계속 그 앞에서 갈등했다.
‘뿍! 먹고싶뿍!’
당장이라도 고개를 내밀어 향긋한 마약미트볼을 입에 한가득 물고 싶었지만.
엉뚱한 생각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뿍. 혹시 지금이라면 주인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뿍.’
어찌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지금 이안의 소환수가 되기 전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저 마약미트볼을 물지 않는다면.
뿍뿍이는 오래 전처럼 이 평화로운 심연의 호수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미트볼이 너무 먹고 싶지만…… 나는 자유로운 거북이고싶뿍!’
하지만 그와 동시에.
뿍뿍이의 머릿속에는, 다른 걱정도 들기 시작했다.
‘못생긴 주인의 마수에서 벗어나는 건 좋겠지만, 지금 주인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마약미트볼을 평생 먹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뿍.’
이제까지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마약 미트볼부터 시작해서 이안 덕에 만날 수 있었던 그의 여자 친구 예뿍이까지.
뿍뿍이의 소중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
‘뿍! 모르겠뿍!’
하여 난생 처음 겪는 선택장애 속에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드는 뿍뿍!
뿍뿍이의 걸음이 어디론가 천천히 떼어지기 시작하였다.
* * *
‘떡대’도, ‘할리’도, ‘핀’도.
‘빡빡이’도, ‘카르세우스’도, ‘닉’도…….
‘엘카릭스’, ‘루가릭스’, 그리고 까망이, 크르르까지.
이안의 소환수들은 모두 오래 전의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속에서 그들은.
한 가지 선택을 해야만 했다.
* * *
라이의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이어서 그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그리고 이안과 눈이 마주친 라이는.
결국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주인을 만날 수 없게 되는 건…… 싫다. 크릉!’
그동안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 버린 이안의 얼굴을 보니,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하여 라이는 뒤돌아 도망가는 대신, 이안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크릉-!
그리고 다음 순간.
“포획!”
익숙한 이안의 목소리가 다시 라이의 귓전으로 흘러들어왔다.
이어서 이안의 손에서 뻗어 나온 빛무리 속에 빨려 들어가면서 라이는 작게 으르렁거렸다.
‘크릉. 그래, 이 느낌. 익숙한 느낌이야.’
그리고 그렇게 라이의 시야는 까맣게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 * *
미트볼의 앞에 선 뿍뿍이는 미트볼과 이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 한 가지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미트볼을 한 입 베어 먹는다면.
걸어왔던 같은 길을 또 걷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뿌욱……!
하여 뿍뿍이는 그가 이안과 함께했던 지난 시간들을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그래, 주인이 조금 사악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쁜 주인은 아니다뿍. 주인이 아니었다면 나는 미트볼도, 예뿍이도 만날 수 없었을 거다뿍.’
그리고 마지막까지 갈등하던 뿍뿍이는 다시 고개를 쑥 내밀고 천천히 걷기 시작하였다.
뿍- 뿍- 뿌뿍-!
이어서 앞에 있던 미트볼을 크게 한 입 베어 문 뿍뿍이는 또다시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로 미트볼이 맛있기 때문은 아니다뿍. 주인 없이 호수에서만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심심할지도 모른다뿍.’
그렇게 뿍뿍이는 또다시 이안의 소환수가 되는 것을 선택하였다.
* * *
이안은 알지 못했다.
그가 이 황금빛 게이트를 밟은 순간.
그의 소환수들이 특별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그 게이트 안의 어두운 길을 걷는 동안.
이안은 왠지 모를 따뜻함을 하나둘 느낄 수 있었다.
‘이 밍밍한 기분은 뭐지?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리고 하염없이 어두운 길을 걷던 이안은 눈앞이 점점 더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어서 새하얀 광원에 걸음을 옮기자.
띠링-!
너무도 익숙한 시스템 알림음과 함께 이안은 다시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저벅.
그리고 이안의 눈앞에 어느새 나타난 드라키시스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첫발을 딛는 데, 성공하였군.
드라키시스는 무척이나 흡족한 표정이었지만 이안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성공하다니요?”
-말 그대로다. 그대는 나의 지혜를 얻기 위한 마지막 시련을 통과하였다.
“예……?”
당황한 이안은 반사적으로 반문하였지만 더 이상 드라키시스의 설명을 들은 필요는 없었다.
그의 말이 끝난 바로 그 순간.
시스템 메시지들이 주르륵 떠오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신뢰의 계승 (히든)(에픽)(연계)’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클리어 등급 : SS+
……중략……
-퀘스트를 완수하여, 클리어 보상을 획득합니다.
-‘신뢰의 머리 장식(초월)(봉인)’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모든 연계 퀘스트를 전부 클리어하였습니다.
이어서 그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는 이안을 향해.
드라키시스가 빙긋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대의 용맹과 지혜, 그리고 그대를 향한 신뢰라면…… 그대는 분명 초월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테이밍 마스터 2부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