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이밍 마스터-1024화 (1,024/1,027)

< 1024화 7. 첫 번째 고난 (2) >

* * *

카일란의 세계관 안에 있는 여러 중간계들은.

사실 완전히 평행한 격(格)을 가진 동급의 차원계들이 아니었다.

중간자의 위격만 가지고도 입성이 가능한 평범한(?) 중간계들이 있는가 하면.

성운을 밟을 자격을 충족하여야 입성할 수 있는 상위 중간계들이 따로 있었으니 말이다.

전자의 경우 이안이 지금까지 활약해 온 중간계인 정령계와 라카토리움.

또, 용천의 하위 차원계인 소천과 중천 등이 있었으며.

후자의 경우 이안이 퀘스트를 통해 잠시 가 볼 수 있었던 차원계인 ‘근원의 숲’과, 그조차도 아직 밟아 보지 못한 땅인 태천(太天)등을 꼽을 수 있었다.

또한 유저들에게는 아직 공개된 적이 없었지만 스틱스강 너머의 명계에도 태천과 비슷한 격을 가진 ‘하데스’라는 차원계가 존재하였다.

(카일란의 세계관에서 하데스는 죽음의 신을 부르는 명칭임과 동시에, 스틱스 강이 휘감고 있는 명계의 최심부를 일컫는다.)

그리고 지금 이안이 ‘용맹의 계승’ 퀘스트를 하면서 처음 접하게 된 차원계인 ‘악령의 땅 이블리스’도.

태천이나 하데스와 마찬가지로 성운을 밟고 올라서야만 도달할 수 있는 최상위 중간계였다.

게다가 이블리스의 경우 명계나 용천처럼 반쯤 성운 아래에 걸쳐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지금껏 단 한 번도 유저들의 발길을 허락한 적 없는 곳이었다.

심지어는 현 시점에서 가장 콘텐츠 진행 속도가 빠른 이안도 이름조차 들어 본 적 없는 생소한 곳이 바로 이블리스였던 것이다.

‘스토리에 따르면, 여긴 악령의 땅 이블리스 라는 곳인데…… 내가 여태껏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중간계가 존재할 줄이야.’

때문에 이안은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더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악령의 땅에 대해 모르니 이곳에서 등장하는 악령이라는 존재들에 대한 정보도 있을 리 없었고.

그것은 절대적인 전투 난이도와 별개로, 많은 변수를 창출할 수 있는 위험 요소였으니 말이다.

‘다행히 이번 임무엔 시간제한은 없는 것 같으니…….’

신전에 진입한 이안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신전 내부의 악령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가장 안전한 자리를 확보하고, 신전 내부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무식하게 싸울 게 아니라, 우선 계획부터 짜야겠지.’

안전해 보이는 자리로 빠르게 몸을 움직인 이안은 임무 메시지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새로이 떠오른 임무 B의 내용 또한, 첫 번째 임무와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간단하였다.

-임무 B : 신전 안의 에카리스 신단을 찾아, 그 곳을 지키는 제사장을 처치하십시오.

-시간제한 : 없음

-임무 B를 완수할 시, 마지막 임무가 부여됩니다.

하지만 이 간단한 내용 속에서, 이안은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결국 이 레무스라는 용사가 여기 온 이유는 용천주를 되찾기 위함일 테니, 마지막 임무라는 건 아마 그게 될 테고…….’

한 차례 고개를 주억거린 이안은, 신전 측면의 복도를 따라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이번 임무에 명시된 제단이라는 곳에 용천주가 봉인되어 있을 확률이 높겠군.’

따로 미니 맵 같은 것이 제공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안은 어렵지 않게 신전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신전이 그렇듯 이 에카리스 신전 또한 완벽히 대칭형으로 설계된 건물이었고.

건물의 뻥 뚫린 중정을 기점으로 탁 트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양 측면의 복도를 따라 쭉 이동하여 계단을 타고 오르면 넓게 트인 공간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으니.

이안은 그 ‘제단’이라는 곳의 위치가 어딘지 금세 알아낼 수 있었다.

‘결국 저 가운데 보이는 원형 계단을 올라야겠군.’

신전의 3층으로 이어지는 원형 계단을 확인한 이안은,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제 저 계단실을 지키는 악령들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었다.

‘조금 더 적응할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손에 든 대검을 붕붕 휘둘러 본 이안은, 긴장 어린 표정으로 계단실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키에에엑-!

새카만 몸에 시뻘건 눈빛을 가진 악령들이 이안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 * *

LB사는 커다란 회사의 사옥 한 층을 전부 기획 팀에 할애한다.

애초에 회사 규모 자체가 그 어떤 게임사보다 거대하기도 했지만 그 규모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기획에 남다른 투자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특히 기획 층 로비에 있는 커다란 사내 카페는 타 층의 직원들도 모여들 정도로 쾌적한 휴게 공간이었다.

음료의 질도 좋은 편인데다 가격도 저렴하고, 무엇보다 여느 대형 커피숍 못지않을 정도로 넓고 커다란 공간이었기에.

협력사와의 미팅이나 내부 기획 회의조차도 이곳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무척이나 많을 정도였다.

그리고 카페의 한쪽 구석에서 3팀의 팀장 나지찬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입사한 지 몇 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중고 신입(?) ‘김지안’ 사원이 마주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팀장님, 결국 이 초월자의 콘텐츠라는 건…… 진짜 수지 타산 안 맞는 기획이군요.”

나지찬이 업무 시간에 신입과 함께 커피숍에 앉아 있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최근 진행 중인 초월자의 콘텐츠.

즉, ‘성운’ 이후의 콘텐츠들에 대해, 신입에게 인수인계를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제까지는 아무도 그 영역에 발을 딛지 못했기에 인계의 필요성이 없었지만.

‘이안’이라는 괴물이 그 시작점에 발을 들인 이상.

기획 마감은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초월 콘텐츠의 기획 콘셉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수지 타산이라…… 괜찮은 비유네.”

“그렇죠?”

“소수를 위한 콘텐츠지만, 그 어떤 콘텐츠보다 개발 공수가 많이 들어가니…… 표면적으로 접근하면 지안이 네 말이 맞군.”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초월자의 콘텐츠는.

결국 중간계의 최상위 콘텐츠들부터 신계까지 이어지는 카일란 최상위 콘텐츠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 명명된 이 콘텐츠의 프로젝트 네임은, [Nobless Project]였다.

“노블레스 프로젝트라는 파일명을 보고 뭔가 했는데……. 이제 확실히 이해가 되네요.”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최상위 귀족들. 결국 그들을 타깃으로 맞춰진 콘텐츠들이니까.”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이 초월자의 콘텐츠는 지금까지 카일란의 콘텐츠들과 아예 성격 자체가 달랐다.

처음부터 모든 유저들이 즐기길 바라며 만든 콘텐츠가, 절대로 아니었던 것이다.

수백, 수천만이 넘는 카일란 유저들 중, 가장 특별한 몇몇만을 위해 만들어진 콘텐츠인 것.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위 말하는 ‘고인물’만을 위한 콘텐츠는 아니었다.

기획 팀에서 생각하는 그 ‘특별함’의 기준이라는 것은.

플레이타임이나 자원보다는 오롯이 게임에 대한 이해도와 실력이었으니까.

“초월의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는 유저가…… 현 시점에서 몇 명이나 될 거라고 보세요, 팀장님은?”

김지안의 질문에, 나지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이것은 처음 이 초월 콘텐츠를 기획할 때부터 그가 항상 생각해 왔던 의문이었으며.

그와 동시에 무척이나 흥미로운 주제였으니 말이다.

하여 나지찬의 입에서는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올 수 있었다.

“글쎄, 대략 셋 정도?”

그의 대답을 들은 지안은,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 되었다.

초월 콘텐츠의 난이도가 지옥 같은 수준이라는 것은 기획서를 봐서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지찬의 입에서 나온 셋 이라는 숫자는 너무 적었으니 말이다.

“그, 그 정도 난이도에요?”

“일단, 내가 생각하기론 그래.”

김지안은 잠시, 나지찬의 머릿속에 있을 그 셋이 누구일지 유추해 보았다.

“세 명이라면…… 이안과 카이는 일단 포함되겠고…… 나머지 하나는 누구일까요? 류첸? 아르케인?”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 나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글쎄, 한 명 빼곤 다 틀렸어.”

“네에……?”

“카이, 류첸, 아르케인…… 셋 다 아마 초월의 길은 곧 걷게 되겠지만, 그 끝까지 닿을 만한 유저는 아니야.”

나지찬의 말이 끝나자 김지안의 두 눈이 또 다시 휘둥그레졌다.

기획된 초월 콘텐츠의 허들을 넘을 수 있는 유저가 셋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보다도 훨씬 더 놀란 표정이 된 것이다.

“류첸이나 아르케인은 몰라도…… 카이도 아니라고요?”

“그래, 오히려 카이보다는 류첸이 더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겠어.”

“어째서요?”

“카이가 갖춘 건, 압도적인 피지컬뿐이니까.”

“으음……?”

“압도적인 피지컬과 카리스마만으로도 이 정도 위치에 오를 수 있을 만큼 그 장점이 대단하긴 하지만…… 결국 그뿐이야.”

잠시 뜸을 들인 나지찬의 입이 다시 천천히 떨어졌다.

“초월자의 길을 걸을 땐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시점이 여러 번 오고…… 조력자 없는 카이는 결국 벽을 넘지 못할 거야.”

“그런……가요?”

“카이의 게임 이해도는 최상위 랭커들 기준으로 보면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거든.”

물론 지금까지 랭커들이 쌓아 온 명성과 재화, 그 모든 스펙들이 초월의 길에서 아예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다.

카일란은 결국 rpg게임이었고.

그 시스템 안에서 일궈 낸 것들이 무용해지는 것은 기획 팀도 결코 원치 않는 결과였으니 말이다.

오히려 쌓아온 스펙이 부족한 유저라면, 애초에 초월의 길의 시작점에조차 도달할 수 없는 것.

다만 그렇게 쌓아 온 스펙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로지 플레이 능력으로만 해결해야 하는 과정들 또한 시험의 길 곳곳에 존재할 뿐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지금 이안이 도전하고 있는 고난의 과제들부터가 스펙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콘텐츠가 아니네요.”

“그렇지.”

“처음 기획서를 읽었을 땐 별 생각 없었는데, 팀장님 말씀 듣고 보니 확실히 그렇게 짜여졌군요.”

김지안의 말을 들은 나지찬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지안이가 이해가 빨라서 좋아.”

“하핫…… 감사합니다.”

지금 이안이 도전중인 첫 번째 고난인 용맹의 계승.

이안은 지금 이 퀘스트를 플레이하면서 자신이 아닌 완전히 다른 npc에 빙의하여 있다.

심지어는 소환술사도 아닌 고대 용사의 몸을 가지고, 용천주를 되찾아 오라는 고난이도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용맹의 계승 고난은.

어떤 ‘현자’에게 퀘스트를 받느냐에 따라 누가 퀘스트를 수령하였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였다.

누가 되었든 자신이 아닌 별개의 npc에 빙의하여 그의 용맹을 계승해야 하며.

그 npc는 플레이어가 가진 클래스가 아닌 완전히 다른 클래스의 npc일 것이라는 임무의 방향성 말이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레벨과 히든클래스, 장비 등을 다 떠나서 그냥 게임을 ‘잘’해야 극복할 수 있는 고난인 것이다.

“그나저나 팀장님 말씀대로라면…… 초월의 길 허들이 너무 높은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어째서?”

“극소수만이 즐길 수 있는 콘텐츠라면, 다른 유저들이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김지안의 걱정 어린 이야기에, 나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충분히 기획자로서 할 법한 걱정이었으니까.

하지만 나지찬이 생각하기에 지금 김지안은 이 기획의 목적을 절반 정도만 이해하고 있었다.

“지안이 너, 혹시 조금 아까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뜬금없는 나지찬의 물음에 김지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하였다.

“팀장님이 하셨던 말이요?”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기획이라는 네 이야기에 내가 절반 정도만 동의했었잖아.”

“절반이라면…… 아! 표면적으로는 ‘그렇겠네.’라고 하셨던 것 같네요.”

“맞아, 그렇게 말했었지.”

나지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이 마지막 콘텐츠는 결코 개발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기획이 아니야.”

“어째서…… 그렇죠?”

“실질적으로 초월의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는 유저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겠지만, 그 끝이 또 새로운 콘텐츠의 시작이거든.”

“음……?”

이해하기 힘든 선문답 같은 나지찬의 이야기에, 고개를 다시 갸우뚱하는 김지안.

그를 향해, 나지찬이 씨익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초월의 길을 끝까지 걸은 유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콘텐츠가 될 거야. 그리고 그 콘텐츠는……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콘텐츠지.”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기획서를 끝까지 다 인계받으면, 아마 이해할 수 있을 거야.”

“후우…… 뭔가 많이 어려워 보이네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음료를 입에 가져다 대는 지안.

그런 그를 향해 나지찬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지안아.”

“네……?”

“너무 걱정하지 마.”

“……?”

더욱 미묘한 표정이 된 김지안을 향해 나지찬이 씨익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신’을 보면서 박탈감을 느끼는 인간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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