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3화 8. 신이 되고 싶었던 남자 (2) >
* * *
아직까지 대부분의 유저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지상계에 국가가 있고 왕이 존재하듯 명계에도 나라가 있으며, 그들을 다스리는 ‘왕’ 또한 존재한다.
말 그대로 명계의 왕. 명왕.
칠대명왕이라는 수식으로 불리는 일곱 명의 명왕들이, 바로 그들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해 보면,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다섯 줄기의 강을 제외하고는 어떤 경계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 미개척의 땅 명계에, 대체 어떤 국가가 존재하며 그 국가를 다스리는 왕이 존재할 수 있는지가 말이다.
그러나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다.
애초에 유저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려진 명계는 에레보스뿐이었으며, 명왕들이 다스리는 일곱 개의 국가는 에레보스 너머에 존재했으니 말이었다.
에레보스의 너머. 즉,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너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
“내가 지금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글쎄, 아마도 아주 정확하게 들었을걸?”
“후우, 명왕성에 가겠다니 제정신인거야?”
“물론.”
“하, 대체 무슨 자신감…… 아니, 그 전에 명왕성이 어디 있는지 알긴 해?”
명왕이 다스리는 일곱 개의 국가는, 낙원의 들판인 엘리시움과 무한지옥이라 불리는 타르타로스에 존재하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음, 난 모르지.”
“뭐……?”
“하지만 알 수 있는 방법은 있어.”
“후우, 이 형이 대체 뭐라는 거야.”
선문답 같은 이안의 화법에 어이없는 표정이 된 훈이.
하지만 이안은 그런 훈이를 무시한 채, 갑자기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내기 시작하였다.
“……?”
그리고 잠시 후.
철컥-.
우우웅- 철커덕-!
이안의 복장이 순식간에 바뀌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말하다 말고 장비는 왜 바꾸는……?”
답답한 표정으로 이안을 향해 이야기하던 훈이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장비를 싹 바꿔 착용한 이안의 복장이 너무도 낯익은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그, 그 복장……! 어디서 난 건데?”
“징표랑 바꿔 온 거지.”
“미친……!”
혼령의 탑 9층에서 발러 길드의 원정대를 상대로 미친 듯이 날뛰었던 보스 제이칸.
그가 착용하고 있던 복장과 무척이나 흡사한 복장을, 이안이 풀 세트로 착용하고 있었으니, 훈이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근데 명왕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이 장비들은 갑자기 왜……?”
“그야, 당연히 연관이 있으니 그런 거지.”
“아……?”
그리고 카일란 콘텐츠에 한해서만큼은 머리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는 랭커답게 훈이는 금세 상황을 이해하였다.
“형이 착용한 그 복장이…… 명왕성으로 가는 데 필요한 열쇠인가 보네.”
“정답.”
하지만 대략적인 상황을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훈이에게는 한 가지 궁금증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콘텐츠가 이어지는 거야?”
“뭐가?”
“그 갑옷을 착용하면, 명왕성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거야?”
히든 피스라고는 해도 어쨌든 착용 장비의 성격을 가진 아이템들이 어떤 식으로 명왕성 콘텐츠와 이어지는 건지 짐작이 잘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훈이의 그 의문은 더 이어질 수 없었다.
이안이 질문에 뭐라 대답하려던 순간.
고오오오-!
“으응……?”
그가 착용한 갑주가 검붉은 빛으로 빛나기 시작하더니, 두 사람의 앞에 반투명한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
이어서 그 의문의 그림자를, 상반된 표정으로 지켜보는 두 사람.
“뭐야, 무서워 형. 이게 뭐야.”
“오, 이게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거였군?”
그리고 잠시 후.
훈이는 이안의 대답을 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의문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뭐야, 얘가 거기서 왜 나와?”
둘의 앞에 나타난 반투명하고 검붉은 그림자의 존재는 다름 아닌 ‘제이칸’의 혼령이었던 것이다.
라타르칸의 기사단장 출신(?)인 제이칸이라면, 명왕성의 위치를 모르는 게 더 이상할 터.
그러니 그를 소환할 수 있는 매개체가 이 갑옷이라면,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의문이 풀린 훈이와 별개로 제이칸의 혼령과 눈이 마주친 이안.
“하이, 방가 방가.”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드는 이안을 보며, 제이칸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거, 건방진 인간 놈……! 네놈이 대체 왜 여기 있는 건가!
“글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텐데.”
-설마, 네놈……! 망령의 봉인을……!
“빙고!”
-크아아악!
어쩐 이유에서인지, 이안을 앞에 두고 부들부들 떠는 제이칸의 혼령.
그리고 그런 그를 응시하는 이안의 눈앞에는 다음과 같은 시스템 메시지들이 떠올라 있었다.
띠링-!
-완성된 ‘망령의 봉인’을 해제하였습니다.
-죽음의 기사단 세트에 봉인되어 있던, 고대의 원혼을 소환합니다.
-라타르칸의 기사단장 ‘제이칸’의 원혼을 소환하였습니다.
……중략……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소환된 원혼을 복종시키시겠습니까? (Y/N)
-만약 대상을 제압하는 데 실패한다면, 원혼이 방생됩니다.
* * *
이안과 제이칸이 언급한 망령의 봉인.
그것은 무척이나 재밌는 개념이었다.
<망령의 봉인>
-명왕이 죄인에게 내릴 수 있는, 명계에서 가장 강력한 형벌입니다. 형벌을 받은 혼령은 자신이 가장 아끼던 세 가지 물건에 의해 영혼이 봉인 당하게 되며, 기약 없는 억겁의 시간 동안 참기 힘든 고통을 받게 됩니다. 형벌이 내려진 순간, 망령이 깃든 물건들은 명계의 어딘가로 흩어지며, 혼령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누군가 이 세 가지 물건을 다시 한자리에 모아 봉인을 해제해 줘야만 합니다.
*만약 봉인을 해제한 이가 원혼의 자유를 원치 않는다면, 그를 제압해야만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를 제압하지 않는다면, 다시 봉인됩니다.)
*만약 그를 제압하는 데에 실패한다면, 그의 권속이 되어야 합니다.
이안이 손에 넣은 죽음의 기사단장 세트는 제이칸의 원혼이 봉인되어 있던 히든 피스였다.
그리고 그를 제압하여 권속으로 만드는 것이 숨겨진 콘텐츠로 가는 열쇠였던 것.
그렇다면 이안은 제이칸을 소환해 보지 않았던 시점에서, 이것이 명왕성과 이어진 콘텐츠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던 것일까?
그 이유는 사실 간단하였다.
이안은 망령의 봉인을 해제하기 전, 이미 히든 퀘스트를 받은 상태였으니 말이었다.
<배덕의 기사단장(히든)(에픽)(연계)>
-명왕 라타르칸의 기사단장이자 그를 배신한 배덕의 기사인 제이칸. 그가 라타르칸을 배신한 이유는, ‘초월의 길’을 가기 위해서였다.
중간자의 위격을 넘어 입신(入神)의 경지에 발을 딛고자 하는 초월자에 대한 열망과 탐욕이 배신을 낳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실패하였고, 라타르칸에 의해 ‘망령의 봉인’ 형벌을 받게 되었다.
……중략……
당신은 그의 원혼이 봉인된 세 가지 세트 피스를, 전부 손에 넣는 데 성공하였다.
하여 다시 완성된 망령의 봉인을 해제한다면, 형벌로 인해 허약해진 그의 원혼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명왕성에 숨겨진, 초월의 길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자.
만약 그 정보를 토대로 ‘라타르칸의 명왕성’에 잠입할 수 있다면, 제이칸이 가고자 했던 ‘초월의 길’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퀘스트 난이도 : SS+
-퀘스트 조건 : ‘중간자’의 위격을 가진 자, 제이칸이 봉인된 ‘망령의 봉인’을 완성한 자
-제한 시간 : 없음
-보상 : ‘죽음을 초월한 자’ 연계 퀘스트 발동, ‘죽음의 기사단장’세트피스 티어 상승, 명성(초월)+5,000
*만약 제이칸의 원혼이 방생된다면, 퀘스트는 소멸됩니다.
‘결국 이 혼령의 탑에 중요한 단서가 있었던 건 맞았어.’
이안은 퀘스트에서 이야기하는 초월의 길이,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결국 그가 혼령의 날개를 얻고자 하는 것도 성운을 밟기 위함이었으며, 성운을 밟는 것이 상위 차원계로 가기 위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전제 조건이었으니 말이다.
‘에픽 연계 퀘스트인 것만 봐도 충분히 냄새가 나. 이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혼령의 날개에 대한 단서를 분명 찾을 수 있을 거야.’
물론 이 모든 단서를 명확히 얻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이안이, 소환된 제이칸의 원혼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이미 한 차례 제이칸을 제압했던 이안에게, 그것은 그리 어려운 조건이 아니었다.
심지어 이안이 제압했던 제이칸은 봉인되던 시점에 만들어진 제이칸의 환영이었고, 망령의 봉인이 해제되며 소환된 제이칸의 영혼은 형벌로 인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그의 원혼(原混)이었으니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제이칸이 식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하필 이 괴물 같은 인간에게……!’
억겁의 세월 동안 고통 받던 그의 입장에서, 망령의 봉인이 해제되는 것은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는데, 하필 봉인의 주인이 이안인 탓에 수천 년 만에 처음 온 기회를 날려 먹게 생겼으니 말이었다.
제이칸 또한 지금 시점에서 그의 힘으로, 이안을 제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으, 으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온 이 소중한 기회를, 그대로 발로 차 버릴 수는 없는 노릇.
간신히 충격에서 벗어난 제이칸은, 이안을 향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이안을 구슬려, 이 고통스러운 형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말이다.
-원하는 게 뭔가 인간.
제이칸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이안이, 피식 웃으며 대꾸하였다.
“지금 나랑 딜을 하려는 거야?”
-비슷하다.
“뭐 내가 원하는 거야 많지만……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건 하나야.”
-……?
“일단 널 내 권속으로 만드는 것.”
이안의 말을 들은 제이칸은, 다시 혼미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안의 권속이 되어 버린다면, 그에게 미래(?)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영겁의 고통에서야 어느 정도 해방되겠지만, 기약 없는 세월 동안 이안의 노예로 살아야 했으니까.
지금 제이칸이 원하는 가장 본질적인 것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보다도 영혼의 자유였다.
-그건…… 그럴 수 없다.
“그래……?”
-내가 줄 수 있는 다른 걸 이야기해 봐라 인간.
“내가 왜 그래야 하지?”
-……!
“네게 지금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안은 심판대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제이칸에게 다가갔다.
제이칸을 제압할 자신이 있는 이안의 입장에서는, 사실 그와 딜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재밌게도 이안의 그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제이칸에게는 이안이 생각지도 못했던, 한 가지 선택권이 존재했으니 말이었다.
-물론이다, 인간.
“뭐……?”
-네놈의 권속이 되지 않을 선택지가 내게 한 가지 정도는 있단 말이다.
“그게 뭔데……?”
-다시 봉인되는 것.
“……!”
영겁의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다시 망령의 봉인 안에 제발로 들어갈 수 있는, 이안으로서는 예상할 수 없었던 선택지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런 미친……!”
그리고 지금의 이 상황은 사실 이안이기 때문에 일어난 무척 특수한 경우였다.
만약 제이칸이 이안에 대해 몰랐거나 그를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존재할 수 없었던 선택지였으니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이칸이 이안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안으로서는 일이 꼬여 버린 것이다.
‘하,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하여 이안은 어쩔 수 없이, 제이칸과 딜을 해야만 했다.
“후,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뭔데?”
-그야 당연히…… 영혼의 자유.
이안과 눈이 마주친 제이칸이 다시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