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1화 7. 혼령의 나룻배 (3) >
* * *
까만 어둠에 가까운 짙은 청자색 빛의 어스름.
한 치 앞을 확인하기 힘든 심연의 땅 안에, 이질적인 새하얀 빛이 번쩍인다.
우우웅-!
이어서 그 찰나의 섬광과 함께.
“커헉.”
까만 그림자 하나가, 심연 아래로 가라앉았다.
열 구도 넘어 보이는 사체들 사이에서, 세 자루의 대검을 두른 채 어둠 속을 응시하는 남자.
척-!
한쪽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린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지……? 고작 이 정도 전력으로 날 노린 건가?”
이안은 무척이나 상기된 표정이었다.
겉으로는 무척이나 여유로운 듯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사실 여유를 찾은 것은 조금 전이었으니 말이다.
처음 혼령의 땅에서 홀로 나와 마족들의 기습을 받았을 때에는 그조차도 충분히 위험했으니까.
‘이런 짜릿함은 또 오랜만인걸.’
모두가 초월 1레벨로 고정된다는 특수한 맵의 속성.
그에 더해, 생각지도 못했던 타이밍의 날카로운 기습.
이안을 기습한 마족들은 분명 괜찮은 실력을 보유한 유저들이었고, 그 숫자가 족히 서른은 넘는 수준이었으니, 아무리 이안이라 해도 위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큰일 날 뻔했어. 여기가 명계라는 사실을 항상 자각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말이지.’
유저끼리의 교전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정령계와 달리, 명계는 무법 지대나 다름없다.
인간과 마족, 양 진영이 공존하는 필드이다 보니, 언제든 이런 기습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안이 기습을 예상하지 못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는 지금 이안이 공략 중이던 필드가 유저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최상위 필드였으며, 둘째로는 명계에 너무 오랜만에 와 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실상 이안이 안일(?)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자신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이안의 입장에서 이 시점, 그에게 위협이 되는 마족은 이제 단 한 명도 없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만약 이곳이 망각의 심연이 아니었고 지상 필드였다면, 아마 훨씬 더 수월하고 빠르게 그를 기습한 마족 유저들을 제압했을 것이었다.
“아직 남은 친구들이 있는 걸 아는데…… 언제까지 숨어 있을 건가?”
이안이 다시 입을 열었지만 심연은 여전히 고요하였다.
하여 이안은 다시 한번 말하였다.
“나타나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찾아보지.”
카일란에서는 맵의 특성에 따라, 확보 가능한 시야가 천차만별로 제한된다.
평범한 평원 같은 맵에서야 수십 미터 떨어진 곳까지도 가시권으로 볼 수 있지만, 어둡거나 안개가 끼는 등의 특수한 환경이라면, 그 가시거리가 훨씬 줄어들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 ‘망각의 심연’은 수중 맵인데다 무척이나 어두컴컴한 필드였기 때문에, 5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의 대상도 제대로 확인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특수한 환경이 이안에게는 무척이나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다수를 상대로 하는 전투에서 몸을 숨길 수 있는 환경이 존재한다는 것은 변수를 창출하는 데 무척이나 유용했으니 말이다.
모두를 1레벨로 평등하게 만들어 버리는 맵의 속성은 이안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지만, 반대로 유리하게 작용한 전투 환경이 어느 정도 그 불리를 상쇄시켜 줬던 것이다.
하여 이제는 완벽히 승기를 잡은 이안이 역으로 사냥을 시작하였다.
띠링-!
-고유 능력, ‘약점 포착’을 발동하였습니다.
약점 포착은 인근에 존재하는 적들의 약점을 붉은 빛으로 보여 주는 고유 능력이다.
그 숙련도에 따라 더 넓은 반경에 있는 적들의 약점을 찾아 주는, 이안이 가장 애용하는 고유 능력.
그리고 오늘 이안은 이 약점 포착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어스름에 가려 정확히 보이지 않는 적들의 위치까지도, 약점 포착이 알려 주었으니 말이다.
평소에야 시야 범위보다 약점 포착의 발동 범위가 훨씬 좁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활용할 일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주 유용하게 활용되는 것.
촤아아-!
허공으로 도약한 이안의 검이 물살을 가르고 뻗어 나가자, 이안의 뒤에 있던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따라 전방으로 튀어나온다.
캬아아오-!
시퍼렇게 두 눈을 빛내며 거대한 날개를 펼치는 이안의 소환수.
오랜만에 드래곤으로 현신한 뿍뿍이의 커다란 입이 쩍 하고 벌어졌고, 그 입에서 강력한 심연의 소용돌이가 뿜어 나왔다.
콰아아아-!
그리고 그 강렬한 소용돌이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마족들에게 무척이나 치명적인 것이었다.
-마족 ‘???’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마족 ‘???’의 생명력이 10,912만큼 감소합니다.
-마족 ‘???’의 생명력이 13,092만큼 감소합니다.
……중략……
-마족 ‘???’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마족 ‘???’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명성(초월)이 500만큼 증가합니다.
……후략…….
수비적으로 움직이던 이안이 본격적으로 전장을 휩쓸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쓸려 나가는 마족 랭커들.
하지만 그런 이안의 폭주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잠깐……!”
“……?”
이안의 검이 다시 날뛰려던 그 순간,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으니 말이었다.
“혹시 너…… 이안인가?”
“음……?”
“그대가 이안이냐고 물었다.”
“설마, 모르고 공격한 건가?”
“…….”
어이없는 표정이 된 이안의 앞에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온다.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게스토 길드의 마스터 카브리엘.
물론 그는 이안의 정체를 알고도 공격한 것이었지만, 이안의 물음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나는 발러 길드를 습격했던 것일 뿐, 이안이 여기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지금 그가 나타난 이유는 이안과 협상을 하기 위함이었고, 때문에 이실직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침중한 표정의 카브리엘과 눈이 마주친 이안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그럴 수도 있겠군.”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텐데?”
“그, 그건…….”
“이곳에서 마족과 인간이 만난다면, 싸우는 게 너무 당연한 것 아냐?”
“물론 그렇지만…….”
“그대들이 날 공격했다 해서 악감정 같은 것은 없다. 당연한 일이니까.”
“…….”
“다만 나 또한 적 진영의 유저들을 만났기 때문에 공격하는 것일 뿐.”
“후우…….”
이안의 말에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에, 카브리엘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게 아닌데…….’
만약 이안이 이 자리에서 끝까지 검을 휘두른다면, 이제와 퇴각한다고 해도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을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때문에 마스터인 그의 입장에서는 이제라도 이안과 협상하여 이 대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했다.
하여 카브리엘은 다급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의 말이 전부 맞다.”
“역시 그렇지? 그럼 다시 친다?”
“아, 아니 잠깐!”
“또 뭔데?”
“그대의 말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악감정이 없다.”
“같은 말을 왜 또 하는 건데?”
“그 말인 즉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협상……?”
“이안, 그대와 협상을 하고 싶다.”
카브리엘의 말에 이안의 눈이 살짝 빛났다.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만, 그와 별개로 협상이라는 단어가 무척이나 흥미로웠으니 말이다.
‘협상이라, 무슨 카드를 꺼내려는 거지?’
이안은 게스토 길드에 대해 전혀 모른다.
기사대전에서도 만난 일이 없는 길드였던데다 평소에 관심두지조차 않았던 영세한(?) 길드였으니, 지금 이안의 눈앞에 있는 카브리엘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것이다.
때문에 그가 협상 테이블에 어떤 카드를 꺼내 들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흠, 협상이라…… 물론 가능이야 하겠지. 내가 혹할 만한 무언가를 그대들이 제시할 수만 있다면 말이야.”
이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안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카브리엘의 표정을 살폈다.
카브리엘의 얼굴에 마지막까지도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히 보였으니 말이다.
이어서 잠시 후, 적막을 깨고 이어진 카브리엘의 말은 무척이나 놀라운 것이었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죽음의 기사단장 갑주.”
“음……?”
“여기서 그대가 공격을 멈춰 준다면 그것의 나머지 피스를 그대에게 주도록 하겠다.”
* * *
카브리엘의 말을 듣자마자 이안이 놀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내게 기사단장의 갑주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아는 거지?’
카브리엘이 말한 죽음의 기사단장 갑주는 이안이 남은 명왕의 징표로 쓸어 담은 잡템(?) 중에 하나였고, 그것은 지금 그의 인벤토리 안에 들어 있었으니, 그 존재를 어떻게 안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곧바로 카브리엘에게 묻지 않고 말을 아꼈다.
뭔가 본능적으로, ‘정보’의 냄새가 났으니 말이다.
‘일단 저놈의 말을 들어 보자. 다 듣고 나서 궁금증을 풀어도 늦지 않아.’
그리고 그러한 이안의 판단은 무척이나 옳은 것이었다.
“기사단장 갑주의 나머지 피스라…….”
“그렇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겐 대검과 투구가 있지.”
“흐음…….”
“유적에서 기사단장 갑주를 선택했다는 건, 이 물건들의 가치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라는 말.”
카브리엘의 말을 듣는 이안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카브리엘의 말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지만, 그 안에서 어떤 단서를 찾아내야 했으니 말이다.
‘그 고철덩어리 갑옷이 히든 피스라도 되는 건가?’
이안은 재빨리 인벤토리를 열어 ‘죽음의 기사단장 갑주’를 확인하였다.
처음 선택할 때에는 대충 읽었던 아이템의 정보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
이안은 놀란 표정을 숨기느라 애를 써야만 했다.
아이템의 정보 창을 확인한 순간, 카브리엘이 어떻게 이 장비의 존재를 알았는지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죽음의 기사단장 갑주>
-분류 : 중갑
-등급 : 전설 (초월)
-착용 제한 : ‘중간자’의 위격 달성
-방어력 : 1,728
-내구도 : 551/551
-옵션 : 모든 전투 능력+40(초월), 물리 공격력+625, 어둠 속성 피해 흡수+10%, 모든 종류의 물리/마법 공격력+5%, 모든 종류의 어둠 속성 공격력+5%
……중략……
*갑주에 잠든 기사단장의 원혼이, 인근에 느껴지는 죽음의 기운에 감응합니다.
-죽음의 기사단장 대검
-죽음의 기사단장 투구
(모든 장비를 착용한다면, ‘라타르칸의 명왕성’에 입장할 수 있습니다.)
‘이거였어……!’
이어서 모든 궁금증이 풀림과 동시에 머리가 맑아진 이안의 두 눈이 다시금 반짝이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