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0화 7. 혼령의 나룻배 (2) >
찰랑-!
이안과 아르케인의 시선이 훈이의 손에 들린 작은 호리병의 앞에 모아졌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맑고 투명한 유리병 안에, 반쯤 들어차 있는 보랏빛 액체.
그 위에 떠 있는 작은 나룻배 한 척이 두 사람의 시선을 동시에 사로잡은 것이다.
“제이칸이 이곳에 있을 때부터 혹시나 하긴 했지만…….”
“음……?”
“이거, ‘악신의 호리병’이라는 거야.”
“악신의…… 호리병?”
“아마도 이게 있으면…… 망각의 강을 건널 수 있을 테지.”
“……!”
훈이의 설명에 동시에 눈이 휘둥그레진 이안과 아르케인.
훈이는 그런 두 사람에게, 자신이 들고 있는 호리병의 정보를 확인시켜 주었다.
<악신의 호리병>
-등급 : 신화(초월)
-분류 : 잡화
-악신의 권능이 담긴, 탐욕의 호리병입니다. 이것을 깨뜨린다면, ‘혼령의 나룻배’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혼령의 구슬 9개로 교환할 수 있습니다.
훈이는 제이칸의 히스토리에 대해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작은 나룻배가 떠 있는 호리병을 본 순간, 이것이 악신의 호리병이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챈 것이다.
그리고 훈이의 설명과 함께 호리병의 정보 창을 확인한 이안 또한, 다시 눈이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이거 재밌네.’
만약 호리병마저 찾지 못하고 유적들로 만족해야 했다면, 이안은 우울했을 것이다.
아무리 혼령의 유적들이 좋아도 정령계에서 얻었던 유적들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수준이었고, 그에 반해 빠르게 진행될 줄 알았던 명계 콘텐츠가 턱 막히는 상황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혼령의 나룻배’로 망각의 강을 건널 수 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혼령의 날개에 대한 단서는…… 망각의 강 너머의 콘텐츠에서 찾아야 하는 건가?’
어쨌든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보 전진 그 이상이라 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정공법으로 명계를 뚫었다면 한 달은 넘게 걸렸을 콘텐츠를 고작 하루 만에 돌파해 버린 것이었으니까.
하여 이안은 망설임 없이 아르케인과 훈이에게 이야기했다.
“이 호리병, 내 구슬을 써서 가져갈게.”
“이안 님의 구슬을 사용하신다고요?”
“정말?”
“물론 발러 길드의 원정대와 함께 레테를 건널 테니, 그에 대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안의 말을 들은 훈이와 아르케인은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물론 이 혼령의 나룻배가 무척이나 중요한 아이템이기는 하였지만, 반대로 레테를 건널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을 제외하면 아무 쓸모도 없는 아이템이었으니 말이다.
굳이 자신의 구슬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이가 태워 주는 나룻배에 오르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데, 자진해서 자신의 구슬을 소모하겠다고 하니, 두 사람 모두 의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내심 자신이 구슬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던 마스터 아르케인은 기쁠 수밖에 없었다.
“크……! 이 형이 무슨 일이지? 웬일로 이렇게 이타적이야?”
“그렇게 해 주신다면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아르케인의 감사 인사에 씨익 웃으며 자본주의(?) 미소를 보이는 이안.
“발러 길드에 진 신세도 갚을 겸…… 어차피 명왕의 징표도 가장 많이 얻은 사람이 저니까요.”
물론 이안은 정말 이타적인 마음에서 그런 결정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굳이 혼령의 나룻배를 선택한 데에는 확실한 이유가 존재했으니 말이다.
‘발러 길드야 한 번에 원정대가 전부 넘어가면 거점을 세울 수 있겠지만…… 나는 퀘스트를 위해 레테를 여러 번 건너며 왕복해야 할 수도 있을 테니까.’
이안으로서는 아예 나룻배를 소유하는 것이 마음 편했으며, 어차피 구슬로 바꿔 먹기에 크게 탐나는 유물이 있지도 않았으니 당연한 선택을 한 것이었지만.
그러한 꿍꿍이를 선의로 포장하는 것은 나쁠 것이 없었으니, 굳이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진 않은 것이다.
하여 두 사람의 동의(?)를 얻은 이안은 망설임 없이 호리병을 교환하였다.
띠링-!
-‘혼령의 구슬’을 9개 소모하였습니다.
-‘악신의 호리병(신화)(초월)’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이어서 호리병을 조심스레 품속에 집어넣은 이안은 이제 행복한 고민을 시작하였다.
‘자, 이제 명왕의 징표만 소모하면 되는 건가?’
정확히 몇 개나 얻었는지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인벤토리에 쌓인 명왕의 징표들.
-명왕의 징표 x 127
그것을 확인한 이안은 이제 마음 편해진 표정으로 유적들을 하나씩 쓸어 담기 시작하였다.
두 번, 세 번 확인해도 혼령의 날개는 보이지 않았고, 악신의 호리병도 손에 넣었으니, 유물 쇼핑에 자연스레 관심이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제까지의 유물 쇼핑과 달리 이안의 선택이 뭔가 저렴(?)하다는 점이었다.
-‘명왕의 징표’를 1개 소모하셨습니다.
-‘데스나이트의 견갑(전설)(초월)’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명왕의 징표’를 1개 소모하셨습니다.
-‘명왕 기사단의 머리장식(전설)(초월)’을 획득하셨습니다.
-‘명왕의 징표’를 1개 소모하셨습니다.
……후략…….
평소 같았더라면 최대한 많은 징표를 소모하여 가장 좋은 장비를 골랐을 이안이었건만, 어쩐 일인지 가성비 좋은 잡템(?) 위주로 쓸어 담고 있었으니 말이다.
“형, 그건 어디에 쓰려고……?”
“왜?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데?”
“아니, 물론 좋은 아이템이긴 하지만…… 형한텐 쓸모가 없어 보이니까…….”
“흠, 아니야. 다 쓸데가 있다고. 흐흐.”
그리고 이안이 이렇게 잡템을 쓸어 담는 데에도,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눈 씻고 봐도 메인 장비 바꿔 줄 만한 건 한두 피스뿐이니……. 나머지는 가성비로 챙겨서 싹 다 팔아먹어야지.’
어차피 눈에 차는 장비가 없다면 적당히 좋은 가성비로 싹 다 가져와서, 차원 코인으로 바꿔 놓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최상위 유적을 클리어하고 이런 사고를 할 수 있는 유저는, 카일란에 오직 이안뿐일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크, 이정도면 20만 코인은 거뜬하겠는데……?”
어지간한 랭커는 평생 만져 보지도 못할 수준의 액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리며, 기분 좋은 표정이 된 이안.
“자, 그럼 저는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예, 이안 님. 저희도 곧 따라 나가겠습니다.”
그렇게 순식간에 모든 징표를 전부 다 소모한 이안은 망설임 없이 유적의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볼 장은 다 봤으니, 탑의 마지막 포탈을 향해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성큼성큼 포탈을 향해 이동하는 이안을 향해, 아르케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마 탑 바깥으로 이동되는 포탈이겠죠?”
“그렇지 않을까요?”
“그럼 일단 밖으로 나가서 정비하고…… 바로 망각의 심연 바깥에서 모이도록 하죠.”
“좋습니다. 이렇게 된 김에 곧바로 레테를 건너도록 하시죠.”
이어서 이안의 시원한 대답에, 더욱 기분이 좋아진 아르케인과 발러 길드의 원정대원들.
“크……! 드디어 레테를 넘는 건가?”
“역시 이안갓……!”
그리고 가장 먼저 걸음을 옮긴 이안이, 곧바로 포탈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위이잉-!
-‘혼령의 균열’에 발을 딛었습니다.
-‘혼령의 땅’ 바깥으로 이동됩니다.
하지만 모든 콘텐츠를 클리어하고 포탈을 타는 이 순간, 이안이 짐작조차 하지 못한 사실이 무려 두 가지나 있었다.
첫째는, 이안이 쓸어 담은 잡템들 중에 생각지도 못 했던 물건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었으며.
두 번째는 바로.
우우웅-!
-‘망각의 심연’에 입장하였습니다.
포탈을 타고 혼령의 땅 바깥으로 나온 그의 눈앞에, 예상치 못했던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 말이었다.
“음? 마족……?”
이안을 향해 사방에서 쏟아지는 차갑고 끈적끈적한 수많은 살기(殺氣)들.
짙은 어둠이 내리깔려 있는 망각의 문 주변으로, 시뻘건 그림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 * *
-그럼…… 그때까지만 해도 혼령의 탑을 가장 많이 클리어 했던 길드가, 게스토 길드였다는 말입니까?
-그렇죠. 사실 이안과 간지훈이가 아니었다면, 발러 길드는 그날까지도 8층에 머물러야 했을 테니 말입니다.
-게스토 길드의 입장에서는 정말 아쉬웠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날 세르누크라는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혼령의 나룻배를 손에 넣어 레테를 건널 생각에 우리 모두가 들떠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마스터 카브리엘의 계획대로 되었다면 큰 이득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 계획은 어째서 실패해 버린 건가요?
-후우…….
크게 한숨을 내쉰 크리스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잇지 못하였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처음부터 이 계획을 반대했습니다.
-왜요?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싸움 아니었나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당연하죠. 망각의 심연에서는 모두가 1레벨이라면서요.
-그건 그렇죠.
-아무리 발러 길드라 하더라도 모두가 1레벨인 상황에서 기습을 당한다면…… 게스토 길드에도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이니까요.
-후우…….
-왜 그러시죠 크리스 님?
-애초에 문제는 발러 길드가 아니었으니까요.
-예?
-제가 반대했던 이유는 오로지 이안이었습니다.
-이안이야 당연히 강력한 랭커지만…….
-그에 대한 표현이 한참 잘못됐군요.
-예?
-그는 강력한 랭커라는 수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그냥 ‘재앙’ 그 자체죠.
-…….
랭커 크리스는 두 눈을 감고, 다시 한번 크게 한숨지었다.
-마족 진영에서 플레이하는 입장에서…… 이안은 재앙이라는 단어 말고 다른 말로 설명이 안 되네요.
-그럼 그날 게스토 길드가 전부 전멸해 버린 것도…….
-예, 맞습니다. 그날 저희는 그냥…… 재앙을 만났던 것뿐이죠.
-크리스 님 말씀대로라면, 게스토 길드에서는 거의 재앙을 마중나간 셈이로군요.
-그렇죠. 마스터께서 ‘재앙’을 제대로 경험해 보신 적이 있었더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선택이었죠.
너무도 우울해 보이는 크리스의 표정에, 인터뷰어는 한동안 다음 질문을 꺼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정해진 질문은 전부 해야 했기에, 그는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꼭 나쁘지만은 않은 선택이었잖습니까?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요?
-그, 그런가요?
-이안이 ‘그’ 아이템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저희는 그와 거래할 수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기엔…… 저희 길드원 절반이 그날 사망 페널티를 받았는데요?
-…….
-그냥 최악을 피한 정도라고,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게스토 길드의 랭커, 크리스의 인터뷰 중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