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9화 7. 혼령의 나룻배 >
석문이 열리고 하얀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완전히 찬란한 백색 빛이라기보다는 살짝 그 빛이 바랜 듯한 회백색의 빛줄기.
그릉-.
쿠구궁-!
빛줄기가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커다란 굉음이 울려 퍼졌고, 일행의 시야에 짙은 보랏빛의 계단이 펼쳐졌다.
마치 맑고 고운 자수정처럼, 투명한 빛을 영롱하게 뿜어내는 보랏빛의 계단.
그것은 지금까지 보아 왔던 혼령의 탑 다른 층의 계단들과 완전히 다른 화려함이었고, 때문에 이안을 비롯한 발러 길드의 원정대원들은 점점 더 설레기 시작하였다.
‘역시 보상 페이즈……!’
입구부터 이렇게 화려하게 치장해 놓은 곳이라면, 그 보상 또한 높은 가치를 지닐 것으로 기대되었으니 말이다.
하여 그들은 망설임 없이 계단을 밟기 시작하였다.
저벅- 저벅-!
이어서 모두가 계단을 전부 올랐을 즈음.
띠링-!
모든 파티원의 눈앞에, 동시에 기다렸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혼령의 탑 10층에 입장하셨습니다.
-‘혼령의 유적’이 개방됩니다.
* * *
“결국 성공했군.”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뭐, 충분히 예상했던 결과니까.”
“정말 팀장님 말씀이 맞았네요. 이안과 훈이 둘이 추가됐다고…… 바로 혼령의 탑이 클리어될 줄은 몰랐거든요.”
거의 1시간도 넘는 시간 동안, 손에 땀을 쥐고 혼령의 탑 공략 영상을 모니터링한 기획 3팀의 팀원들.
어찌나 집중했던지 팀원들은 전부 진이 빠진 표정이었지만, 사실 이번 모니터링은 완전히 업무의 일환이라고 하긴 애매했다.
솔직히 혼령의 탑 클리어 여부를 확인하는 데에는, 이렇게 모든 팀원들이 모니터링해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저 랭커들의 플레이와 영상미에 집중하여, 저도 모르게 다들 집중하여 시청했던 것뿐.
그 때문에 팀원들의 표정은 업무에 찌들어서 지친 표정이라기보다는 긴박한 영화를 본 뒤 진이 빠져 있는, 그런 표정이라 할 수 있었다.
“후후, 하지만 나도 마지막에 이안이 그런 식으로 보스를 파훼할 줄은 몰랐어.”
“역시 그렇군요.”
“지식전이를 활용해서 영혼잠식을 정면으로 돌파할 생각을 하다니…… 역시 이안은 이안이야.”
“아르케인의 대응도 엄청 좋았던 것 같아요.”
“그렇지. 만약 아르케인이 빠르게 반응해 주지 못했다면, 아무리 이안이 영혼잠식을 파훼했다고 한들, 단번에 제이칸을 처치하진 못했겠지.”
모니터링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나지찬.
그의 표정은 처음 이안과 훈이를 발견했을 때와 달리, 다시 여유를 찾은 표정이었다.
‘후후, 우연찮게 재밌는 구경을 했어.’
너무 의외의 인물들이 발러 길드의 영상에서 등장했기에, 처음에는 적잖이 당황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대응이 힘들 정도의 어떤 변수가 생긴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일단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이슈는 ‘혼령의 탑’이 클리어되었다는 점.
만약 발러 길드의 혼령의 탑 클리어가 2주일쯤 전이었다면, 이것은 엄청나게 급박한 이슈였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칼데라스 길드의 랭커들이 레테를 건너기 전이었으며, 그 말인 즉 발러 길드에서 망각의 강을 최초로 건너는 상황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아마 그랬더라면…… 혼령의 나룻배가 강을 건너는 동안, 난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야 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이미 망각의 강 너머 모든 콘텐츠가 준비되어있는 상황이었으니, 나지찬으로서는 크게 당황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혼령의 탑에서 쏟아져 나올 유물들이 발러 길드의 길드원들에게 전부 돌아가게 되었다는 부분은, 상위권 길드들의 전투력 밸런스에 약간의 특이점을 가져올 수도 있는 요소이긴 하였다.
하지만 이 또한 크게 판도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칼데라스나 로터스에서 독식한 것보다야 낫지, 뭐.’
다만 한 가지 나지찬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역시 이안과 관련된 이슈였다.
현존하는 그 어떤 유저보다도, 가장 ‘초월’의 영역에 가까운 랭커인 이안.
그가 과연 혼령의 탑에서 ‘날개’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가 그의 가장 큰 관심사였던 것이다.
문득 이안을 떠올린 나지찬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애초에 이안이 발러 길드 원정대에 합류한 이유가, 아마 혼령의 날개 때문이었겠지.’
나지찬이 웃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순간 혼령의 탑 10층에서 혼령의 날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할 이안이 떠올랐던 것이다.
‘흐흐, 아마 거의 확신을 하고 올라왔을 텐데…….’
나지찬은 이안을 제외한 그 누구보다도, 이안에 대한 히스토리를 낱낱이 꿰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안이 혼령의 날개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유추하는 것은 그에게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안이 ‘고대 전장의 영웅 Ⅰ’ 퀘스트를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나지찬이 파악하고 있던 부분이었으니 말이다.
하여 나지찬은 혼령의 날개에 대한 이안의 기대감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때문에 그 허탈감까지도 예상이 되었으니, 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거기에 혼령의 날개에 대한 단서가 있는 건 맞으니…… 한번 잘 찾아 보라고 이안.’
서류 뭉치들을 빠르게 정리한 나지찬은 시계를 한번 확인한 뒤 사무실을 나섰다.
생각 같아서는 이안의 모니터링을 좀 더 하고 싶었지만, 어느새 오전 보고를 올려야 할 시간이 다 되었으니 말이었다.
‘이안이 혼령의 날개를 찾기 시작했으니…… 이제 슬슬 신규 프로젝트 론칭을 준비하면 되려나……?’
뜻밖의 재밌는 구경을 한 탓인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사무실을 나서는 나지찬.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알 수 없었다.
보고가 끝나고 돌아온 기획 3팀의 사무실이 초토화되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었다.
* * *
혼령의 탑 10층은 말 그대로 보물 창고였다.
‘혼령의 유적’이라는 그 이름에 걸맞게 강력한 아티펙트와 장비, 희귀한 아이템들이 즐비했던 것이다.
‘역시 유적은 배신하지 않아.’
하지만 아쉬운 것은, 이 유적들을 마음대로 다 쓸어 담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
하여 10층에 도착한 원정대원들은 쉽게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유적의 유물들을 가져가기 위해 필요한 ‘재화’는 한정되어 있었는데, 가지고 싶은 물건은 너무도 많았으니, 다들 선택장애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9개씩 지급된 혼령의 구슬과, 명왕의 군단 처치 시 드롭으로 획득할 수 있었던 명왕의 징표.
이안을 비롯한 모두가 예상했듯, 이 아이템들을 화폐로 유물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와……! 대박! 대체 뭘 골라야 되는 거야?”
“후우, 구슬이랑 징표 열 개씩만 더 있으면 좋겠다.”
“뭐? 양심 어디 감? 난 딱 세 개씩만 더 있어도…… 헤헤.”
그리고 이렇게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유물 사이를 돌아다니는 발러 길드의 원정대원들 가운데, 그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비슷한 모양새로 어슬렁거리고 있는 이안.
하지만 이안은 더 좋은 유물을 얻기 위해 고심하는 일반 원정대원들과 조금 다른 상황이긴 하였다.
그래도 유물 한두 개 정도는 골라서 픽스한 다른 이들과 달리, 이안은 가장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유물을 한 개도 고르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행복에 겨운 다른 이들의 표정과 달리, 이안의 표정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혼령의 날개……! 혼령의 날개가 없잖아?’
이안이 아직 유물을 고르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의 유물이 아무리 좋다 한들, 이안에게는 혼령의 날개가 최우선이었으니 말이다.
무조건 1순위로 혼령의 날개를 교환해서 얻은 뒤에, 남은 자원으로 유물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유적의 어디를 봐도 날개 비슷한 물건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안만큼은 아니지만, 옆에 있는 아르케인의 표정도 제법 심각하였다.
“혼령의 날개가…… 없군요, 이안 님.”
“후우, 그러게 말입니다. 여기에 있으리라 확신했었는데…….”
그저 행복한 일반 길드원들과 달리, 길드 마스터인 아르케인에게 또한 혼령의 날개는 중요했다.
그것이 있어야 이 망각의 강을 건널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으니, 아무리 좋은 유물이 존재한다고 해도 심각한 표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혹시 10층의 유적 다음에도 어떤 콘텐츠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음…… 설마……?”
고민에 빠져 이런저런 가정을 세우며,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이안과 아르케인.
그런데 잠시 후, 그런 그들의 귓전에 놀란 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엇! 이게 여기에……?”
* * *
혼령의 탑 9층에서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던 지옥의 기사 제이칸.
그는 본래 훈이가 알고 있던 것처럼, 명왕 라타르칸의 기사단장이었다.
명계의 그 어떤 기사단장보다 용맹하고 뛰어난 ‘죽음의 기사’로 평가받았던, 라타르칸의 충성스런 수석 기사단장.
하여 명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그는 명계의 모든 전쟁에 항상 선봉으로 임명되었고, 전쟁에서 승승장구할수록, 제이칸의 힘은 점점 더 강대해져 갔다.
그리고 그 결과, 제이칸은 결국 초월의 영역을 넘볼 수 있게 되었다.
중간자의 한계를 넘어 초월자.
즉 입신(入神)의 경지에 닿을 만큼, 강력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가진 강함의 원천은 탐욕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었고, 때문에 결국 제이칸은 배덕의 기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제이칸…… 그 강대한 힘을 가지고 일개 기사단장으로 남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강함에 대한 욕망 하나로 초월의 힘을 손에 넣은 제이칸에게, 악신의 유혹은 너무 달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개 기사단장이라…… 이곳 명계 최고위(位)의 무사(武事)를 그리 표현하다니, 나는 이미 정점에 도달했다. 이 위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대는 어찌하여 왕(王)이 될 생각을 하지 않는가.
-……!
-그대는 이미…… 엘리시움이나 타르타로스의 한 곳을 다스릴 만한 자격을 갖고 있지 않은가?
제이칸은 탐욕스러웠지만, 그와 별개로 명왕의 권속이었다.
그 때문에 이제껏 아무리 큰 탐욕을 가지더라도 주인인 명왕의 위(位)를 넘볼 생각은 하지 못하였는데.
가슴 속 깊숙한 곳에 억눌려 있던 그 욕망을 악신이 꺼내놓은 것이다.
라타르칸을 배신하고 그를 처단하여, 칠대명왕의 자리를 손에 넣으라는 달콤한 유혹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게 된 것.
-그대의 기사단과 함께, 다시 레테를 넘어 회군하라.
하지만 배덕의 마음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이칸에게는 마지막 한 가지 제어장치가 남아있었다.
-라타르칸님의 허(許)가 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레테를 넘을 방법이 없지 않은가.
망각의 강 레테는 아무리 명왕의 기사단이라 해도 함부로 넘나들 수 없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신격을 가진 자를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존재라 할지라도.
명왕의 허락이 떨어져 ‘권능의 다리’가 레테의 수면 위로 떠오를 때에만, 이 망각의 강을 건널 수 있었으니.
당장이라도 회군하고 싶었던 제이칸은, 한 번 더 그 배덕의 욕망을 참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마지막 제어 장치 또한, 악신의 유혹을 막을 수 없었다.
-제이칸, 죽음의 기사여…….
-……?
-그대는 혹시, 혼령의 나룻배에 대해 알고 있는가?
-그, 그건……!
찰랑-!
제이칸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악신이 자신의 품속에서 자그마한 유리병을 꺼내어 들었고, 그는 그 호리병이 무엇인지.
아니, 호리병 안에 갇혀 있는 작은 나룻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내, 내게는…….
-그대의 욕망을 내게 보여라, 제이칸.
-……!
-내 친히 그대에게, 지옥의 기사의 힘을 허하겠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