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6화 7. 명왕의 기사 제이칸 (2) >
발러 길드의 마스터 아르케인은 지금 트라이 중인 이 ‘혼령의 탑’이 분명 망각의 강을 건너기 위해 클리어해야 하는 키 콘텐츠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근거는 지금껏 발러 길드가 수집해 온 정보들과 이안으로부터 얻은 ‘혼령의 날개’에 대한 정보였다.
‘고대 영웅 슈란은…… 분명 이 망각의 심연에서 얻은 아티펙트의 힘으로 레테를 넘었다 했었지.’
고대 영웅 슈란은 카이몬 제국의 역사서에 나오는 고대 영웅 중 하나였다.
전장에서 억울하게 전사한 뒤, 명계의 명왕에게 인정을 받고, 다시 인간계에서 부활했다는 신화를 가진 전설적인 고대영웅.
발러 길드가 찾아낸 고서에 의하면, 슈란은 이 망각의 심연에서 레테를 건널 수 있는 아티펙트를 얻었다 하였고, 망각의 심연 안에서 그러한 아티펙트를 얻을 수 있을 만한 곳은 이 혼령의 탑 한 곳뿐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의 근거라면 아르케인이 확신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마 고서에 나왔던 그 아티펙트가…… 혼령의 날개일 테고 말이지.’
그 때문에 9층 클리어의 고지를 목전에 둔 지금, 아르케인은 점점 더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정황상 혼령의 탑 최초 클리어는 자신들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혼령의 탑 난이도에 비벼 볼 수 있는 수준의 길드는 로터스와 칼데라스, 그리고 천웅과 다크블러드 정도였는데.
로터스는 알다시피 명계에 대한 정보가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으며, 천웅과 다크블러드 또한 현재 명계보다는 기계문명과 엘라시움의 콘텐츠들 위주로 진행 중이었으니, 아르케인의 판단으로는 만약 발러 외에 혼령의 탑을 깰 만한 길드가 있다면 칼데라스 한 곳뿐이었다.
하지만 그 칼데라스 또한 혼령의 탑을 공략하고 있을 확률은 희박하였다.
명계에서 칼데라스의 거점은 망각의 심연이 위치한 지역의 정 반대인 레테의 동쪽 끝이었고, 물리적으로 거점을 거기에 둔 상태로 혼령의 탑을 공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아르케인은 사실상 이 네 길드를 제외하고는 경쟁 상대로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으니,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 것이다.
‘후후, 드디어 명계 콘텐츠에서 칼데라스보다 앞서 볼 수 있는 기회야.’
하지만 이러한 정보들에 근거한 아르케인의 이 확신은 결과적으로 절반 정도만 맞는 것이었다.
칼데라스가 혼령의 탑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직 레테를 건널 단서를 찾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았지만, 칼데라스는 이미 2주 전쯤 레테를 건넜던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르케인의 예상이 빗나간 부분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그것은 발러 길드와 이안이 혼령의 탑 9층을 클리어한 직후 알게 될 사실이었다.
* * *
띠링-!
-파티 리더 ‘아르케인’이 다섯 번째 제단에 불을 붙였습니다!
눈앞에 번쩍 떠오르는 한 줄의 새하얀 시스템 메시지.
그것을 확인한 아르케인은 감격에 찬 표정이 되었다.
“드디어……!”
치열한 혈투 끝에 9층의 모든 명왕의 기사들을 잠재우고, 결국 9층의 다섯 개 제단에 전부 불을 붙이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었다.
게다가 이어진 시스템 메시지의 내용은 아르케인을 더욱 흥분시켰다.
-혼령의 탑에 존재하는 마흔 다섯 개의 제단이 전부 불타오릅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혼령의 제단 9층’을 성공적으로 공략하셨습니다!
혼령의 탑 마흔 다섯 개의 제단이 전부 불타오른다는 메시지가 떠오른 것으로 미루어볼 때, 10층에는 더 이상 관문이 없을 확률이 높았으니 말이다.
저 메시지의 내용대로라면, 9층의 다섯 번째 제단이 혼령의 탑 마지막 제단이라는 의미였으니까.
‘크…… 좋았어!’
하지만 이렇게 상기된 아르케인과 발러 길드원들의 표정이 구겨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일란의 시스템 메시지는 항상 끝까지 읽어 봐야 하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혼령의 제단 9층’에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들이 소멸됩니다.
……중략……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봉인된 명왕의 권능이 깨어납니다.
“응……?”
“끝이 아니었어?”
원래대로라면 클리어 메시지와 함께 클리어 등급이 노출되었어야 할 타이밍에, ‘봉인된 명왕의 권능’이 깨어난다는 생각지도 못했던 메시지가 떠올랐으며.
쿠쿵- 쿠쿠쿵-!
커다란 굉음과 함께 횃불이 붙은 9층의 마지막 제단에서 검붉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명왕 라타르칸’의 권능이 깨어납니다.
-라타르칸의 수석 기사단장이 봉인에서 해제됩니다.
쩌정- 쩡- 쩌어억-!
거대한 바위가 갈라지기라도 하듯 커다란 파열음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수석 기사단장이라고?”
“뭐……?”
쿠르릉-!
제단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점점 더 광포하게 회오리쳤다.
그리고 그 회오리로부터 뿜어 나오는 열풍(熱風)은 인근에 있던 유저들이 뒤로 밀려날 정도로 강렬하고 뜨거운 것이었다.
“으읍……!”
“뭐, 뭐야……!”
이어서 잠시 후, 제단에서 휘몰아치던 강렬한 불길은 그대로 천장까지 쏘아져 올라가며 거대한 불기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시뻘건 불기둥 안에서.
-내가…… 다시 눈을 뜨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철컹- 철컹-!
시뻘건 안광을 빛내는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지옥의 기사 ‘제이칸’이 깊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제이칸/신화(초월) Lv.1
* * *
혼령의 탑에 입장한 이안과 발러 길드의 원정대는 총 30명이었다.
그리고 9층의 마지막 페이즈인 ‘지옥의 기사 제이칸’을 만나기까지, 이 30명은 단 한 명의 낙오 없이 전원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꿀꺽-.
아르케인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신화 등급의 보스라니…….”
10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나타난 ‘제이칸’의 위용이, 지금껏 보지 못한 수준의 것이었으니 말이었다.
-망각의 저주를 넘으려는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쿠쿵- 쿠쿠쿵-!
-내 친히 그대들을 이 레테의 심연 안에 영원히 묻어 주리라.
고오오오-!
모두에게 공평한 망각의 저주 앞에선, 제이칸의 레벨 또한 초월 1레벨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지금껏 명왕의 기사들을 경험한 이안과 아르케인은 그 초월 1레벨에 큰 의미를 둘 수 없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레벨은 숫자에 불과할 뿐.
저 ‘제이칸’이 다른 명왕의 기사들보다 훨씬 강할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 때문에 제이칸을 확인한 이안과 아르케인의 시선은 동시에 훈이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훈이라면 혹시 ‘지옥의 기사’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훈이는 ‘제이칸’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그 제이칸이 맞다면…… 역시나 위험한 녀석이야.”
“네가 아는 제이칸이, 어떤 제이칸인데?”
이안의 물음에 훈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신의 주인, 라타르칸을 배신했던 배덕의 기사.”
“음……?”
“라타르칸을 배신하여 그를 소멸시키고, 자신이 칠대명왕의 일좌에 앉으려 했던 기사단장.”
“오호……?”
하지만 훈이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고오오오-!
그의 말을 들은 제이칸이 더욱 분노하기 시작했으니 말이었다.
-놈……! 하찮은 중간자 녀석이, 대체 뭘 안다고 그 입을 놀리는가!
“……!”
-내 친히 네놈의 그 하찮은 영혼부터 갈가리 찢어 주리라!
대신 이안을 비롯한 원정대원들은 이로서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제이칸이 맞네.”
“그러게.”
분노한 제이칸의 반응으로 미루어 볼 때, 훈이가 알고 있는 그 기사단장 제이칸이 눈앞의 이 녀석이 맞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최대한……! 최대한 보수적으로 움직여야 해 모두!”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녀석은 강화된 ‘영혼잠식’을 사용하거든.”
“영혼……잠식이라고?”
훈이의 이야기를 들은 이안은 살짝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영혼잠식은 이안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고유 능력이었으니 말이다.
“발록이 쓰는 그거…… 맞아?”
“그래. 그거 말하는 거야.”
이안의 마수인 크르르도 가지고 있는 발록의 대표적인 고유 능력인 영혼잠식.
<영혼잠식>
-강력한 마력을 뿜어내어, 일시적으로 범위 내에 있는 허약한 대상의 영혼을 잠식시킵니다. 피아 구분 없이 생명력이 5% 이하로 떨어진 대상에게 시전 할 수 있으며, 잠식에 성공할 확률은 대상과 시전자의 ‘지능’ 능력치에 따라 결정됩니다. (시전자의 지능/대상의 지능×100)%
지속 시간 동안 대상은 시전자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게 되며, 모든 공격 능력이 30%만큼 강화됩니다. 또, 시전자가 사망할 때까지, 영혼이 잠식된 대상은 ‘무적’ 상태가 지속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 120분
-지속 시간 : 30분
게다가 ‘강화된’ 영혼잠식 이라는 훈이의 말로 미루어 볼 때, 제이칸의 이 고유 능력이 발동하기 시작한다면 원정대는 그대로 전멸할 게 분명하였다.
보수적으로 움직이라는 훈이의 말은 최대한 생명력을 뺏기지 말라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강화된 영혼잠식이면…… 시전 조건이 완화되는 거야?”
이안의 물음에 훈이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나도 그거까진 몰라. 다만 잠식된 영혼의 강화 효과는 두 배도 넘게 강력할 거야.”
훈이의 답을 들은 이안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였다.
최대한 근접하게 영혼잠식의 스펙을 짐작해야, 이 마지막 관문을 클리어할 수 있을 테니 말이었다.
‘이 혼령의 땅 안에서는 생명력이 5% 미만으로 떨어지면 밖으로 튕겨 나가게 돼. 그러니 강화된 영혼잠식의 발동 기준은…… 무조건 5%보다 더 높은 수준일 거야.’
그리고 이안이 머리를 굴리는 동안, 분노한 제이칸이 훈이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하였다.
쿵- 쿵- 쿵-!
이어서 등 뒤에 메고 있던 거대한 대검을 뽑아 든 제이칸이 허공으로 크게 검을 치켜들며 커다랗게 포효하였다.
-나의 기사단이여……! 죽음의 맹약에 응답하라!
검붉은 기운을 한 가득 머금은 제이칸의 검이 바닥에 힘껏 내리박혔다.
콰콰쾅-!
이어서 제이칸의 주변으로 낯익은 실루엣을 가진 그림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었다.
우웅-! 우웅-!
그리고 그 면면을 확인한 아르케인의 표정은 살짝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명왕의 기사들……!”
제이칸조차 얼마나 강력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 판국에, 강력한 명왕의 기사들이 열 기나 소환되었으니 말이었다.
쩌정-!
하지만 어쩐 일인지, 아르케인과 달리 이안의 표정은 오히려 살짝 밝아져 있었다.
“……!”
저 견고해 보이는 제이칸을 파훼할 방법이 순간 머릿속에 떠올랐으니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