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9화 망각의 강 레테(Lethe) (2) >
플레게톤과 레테의 사이.
에레보스의 제3구역이라 불리는 죽음의 땅.
아르케인은 이곳을 ‘지옥 같은 곳’이라 표현하였고, 이안은 처음에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었다.
지옥 같다는 표현을 하기엔, 이안과 훈이는 발러 길드의 도움을 받아 너무도 순조롭게 망각의 강까지 도착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혼령의 탑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안은 아르케인의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확실히 이 정도 난이도면…… 지옥이라고 얘기할 만하네.’
이안이 체감하는 명계 3구역의 난이도는, 정령계의 최상위 필드인 비터스텔라와 비교해도 훨씬 더 높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3구역 안에서도 지역에 따라 난이도 차이가 극심하다는 점이었다.
갓 플레게톤을 넘은 초반부 필드는 오히려 2구역보다 약하게 느껴질 정도로 낮은 난이도였으나, 망각의 강에 가까워질수록 그 난이도는 급증하였고.
그에 더해 망각의 강을 따라 북서쪽으로 이동할수록 난이도 증가폭이 더 급격히 상승하였으니, 지금 이안의 스펙으로도 쉽게 생각하기 힘든 수준까지 올라온 것이다.
‘물론 찰리스의 지하뇌옥과 비교하면 쉽긴 하지만……. 그쪽 난이도를 여기에 대입하는 건 무리가 있겠지.’
기계문명의 지하뇌옥을 떠올린 이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곳은 이안조차도 정령신의 가호를 비롯한 에픽 퀘스트 버프 덕에 공략 가능했던 곳이니 말이다.
물론 ‘엘리샤’라는 최강의 정령은 이안의 곁에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특수 던전과 일반 필드의 난이도 단순 비교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해서 이안은 지금껏 그가 생각해 왔던 명계에 대한 이미지를 전면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모든 중간계 중에, 명계가 가장 상위 콘텐츠였을지도.’
사실 이안은 처음에, 명계가 다른 차원계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동등한 난이도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가 용천을 공략하고 정령계에서 활약할 무렵.
이미 발러나 칼데라스 같은 길드는 3구역에 발을 디딘 상태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랄프나 이니스코같은 좀 덜떨어진(?) 랭커들도 플레게톤을 넘었을 정도였으니, 어떤 면에선 오히려 정령계보다 더 난이도 낮은 차원계가 명계라고 이안은 생각했었던 것이다.
물론 급격히 상승한 3구역의 난이도에 많은 랭커들이 다른 차원계로 방향을 선회했었지만, 이안으로서는 실제로 체감해 보지 못한 난이도였기에 얼마나 어려울지 예측할 수 없었다.
‘후후, 역시 아직까지도 망각의 강에 막혀 있었던 이유가 있었네.’
발러 길드의 길드원들과 함께 3구역의 언데드들을 상대하며 길을 뚫던 이안의 입에, 미소가 점점 짙어지기 시작하였다.
처음 명계에 올 때만 해도 이안의 목적은 그저 혼령의 날개 하나뿐이었는데, 의외의 난이도에 마주하니 좀 더 흥미가 동한 것이다.
‘그래. 좀 어려워야 재밌지. 그래야 보상도 셀 테고.’
이안과 훈이를 포함한 발러 길드의 원정대는, 빠르게 언데드들을 정리하며 파죽지세로 이동하였다.
처음에는 버벅였지만 슬슬 손발이 맞기 시작하니.
이안과 훈이의 도움과 발러 길드의 경험이 시너지를 내기 시작하며, 점점 더 사냥 속도가 빨라진 것이다.
“확실히 이안 님과 함께하니 훨씬 안정적이군요.”
“후후, 제 능력보단 이번에 얻은 정령왕의 힘에 가깝지요.”
“겸손은…….”
하지만 사람이 많으면 모두의 생각이 같을 수 없는 법.
이안과 훈이의 합류를, 달갑지 않게 보는 인물도 분명히 있었다.
그 두 사람 덕에 원정대에서 빠져야 했던,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는 말이다.
* * *
발러 길드의 길드원인 세르누크는 최근 무척이나 심기가 불편하였다.
사실상 발러 길드가 처음 창립되었을 때부터 함께해 왔던 초기 멤버임에도 불구하고, 길드 내에서 그의 입지가 계속 좁아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르케인 형은 진짜 너무한단 말이지.”
사실 세르누크의 입지가 좁아지는 이유는, 무척이나 간단하였다.
처음부터 가입 자격에 조금 미달됨에도 불구하고, 아르케인의 지인이라는 이유로 길드에 들어올 수 있었던 그였기에, 발러 길드의 길드원이 늘어나고 점점 더 최상위권 길드로 자리 잡아 가면서, 능력이 부족했던 그는 자연히 도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르케인은 무척이나 딱 부러지는 인물이었고, 지인이라 하여 편의를 더 봐주거나 하는 성품이 아니었으니, 세르누크의 입장에서는 점점 더 서운함이 쌓여 갈 수밖에 없었던 것.
그리고 그렇게 쌓여 오던 서운함이 폭발한 것은 얼마 전의 일 때문이었다.
“세르누크, 이번 원정에서는 빠져야겠어.”
“형, 그게 무슨 말이야?”
“아마 며칠 뒤에 혼령의 탑 공략 갈 것 같은데, 최상급 전력으로 움직이려 하거든.”
“내가 50명 안에 들기 힘들 정도로 부족하다는 거야?”
“아니. 이번에는 30명 정예로 움직일 거야. 지난번에 혼령의 탑 가 봐서 알잖아? 네 실력으로는 아직 힘들어 세르누크.”
세르누크의 초월 레벨은 70레벨대 후반 정도로, 사실 낮은 레벨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 80후반~90레벨 정도로 구성된 발러 길드의 정예 멤버들에 비교했을 때에는, 확실히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 것.
게다가 실질적인 문제는 세르누크의 레벨이 아니었다.
아르케인이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세르누크의 레벨이 70 후반이다 될 수 있었던 것은 길드 파티의 버스를 탔기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세르누크의 부족한 실력은 사실, 레벨과 별개로 고난이도 던전에서 리스크일 수밖에 없었던 것.
이안까지 함께하기로 한 이 기회에 혼령의 탑을 정복하려는 계획을 세운 아르케인의 입장에선, 아무리 지인이라 해도 짐이 될 게 분명한 세르누크를 데려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르케인의 마지막 말에, 세르누크는 서운함이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형, 심연에서는 레벨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레벨 문제가 아니라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후우…… 그렇게 말하면 할 수 없지만…….”
“제2원정대에 넣어 줄게. 이번에 한 텀 쉬면서, 실력 좀 키워 둬, 세르누크.”
아르케인이 말한 제2원정대란, 발러 길드의 2군과도 같은 파티였다.
그 때문에 아르케인의 말을 들은 세르누크는, 자신이 아예 2군으로 밀려났다고 지레짐작해 버린 것이다.
‘저 형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
물론 아르케인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다.
세르누크는 아르케인과 가장 오래 게임을 함께한 지인 중 한 명이었고, 때문에 그에 대한 애정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길드 내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그가 실력을 더 쌓아서, 다른 길드원들의 인정도 받으면서 1군 원정대에 합류하기를 바랐을 뿐.
하지만 이미 자격지심에 사로잡힌 세르누크는, 아르케인의 의도를 곡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 기회에 날 아예 2군으로 보내겠다는 거지. 1군 원정에 방해만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의 레벨과 실력이 1군에 속하기 애매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세르누크 본인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그것을 안다고 해서 이제껏 쌓인 서운함이 사그라질 수는 없는 것.
때문에 세르누크의 불만과 서운함은 폭발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던 와중에 한 가지 결정적인 사건이 추가로 터졌다.
같은 발러 길드 소속의 동료로부터,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된 것이다.
“올리버 형한테 들은 이야긴데, 이번 원정에서는 아마 혼령의 탑을 확실히 공략해 낼 모양이더라고.”
“지난번에 절반도 오르지 못했잖아?”
“그랬었지.”
“그때보다 크게 스펙 업이 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이건 비밀인데, 이번 원정대에 이안이 합류하기로 했대.”
“이안……? 로터스의 그 이안을 말하는 거야?”
“그렇다니까.”
“……!”
“너만 알고 있어야 돼, 세르누크. 다른 길드원들한테 절대로 말하면 안 된다고.”
“그렇겠지. 이 이야기를 들으면, 다들 서운해할 테니까.”
혼령의 탑은 지금껏 발러 길드가 명계에서 찾은 콘텐츠 중에서도, 최상위 난이도와 티어를 가진 고급 콘텐츠였다.
그 때문에 이안과 함께 이 던전을 공략한다는 이야기는, 파티에서 배제된 길드원들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서운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 되는 콘텐츠의 최초 공략 보상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꼭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고.
때문에 길드원도 아닌 이안이 혼령의 탑 공략에 숟갈을 얹는다고 생각하면, 무척이나 배가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길드 내에서 어떻게든 공략해낼 수는 없었던 건가…….”
“글쎄, 사실 나는 마스터의 결정이 맞다고 보는 입장이야, 세르누크.”
“어째서?”
“최근에 칼데라스랑 게스토 길드 쪽에서, 슬슬 혼령의 탑 근처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음…….”
“게스토는 몰라도 칼데라스가 혼령의 탑 존재를 알게 되면, 최초 클리어를 뺏길 확률이 엄청 높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서 아르케인 형도, 아마 이런 결정을 했지 싶어.”
세르누크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준 길드원은 ‘파르토’라는 길드원으로, 아르케인, 세르누크와 오랜 친구이자 발러 길드의 최상위 랭커 중 한명이었다.
그 때문에 그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세르누크는 서운함이 누그러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원정대에서 배제된 자신과 달리, 파르토는 핵심 멤버로 함께할게 분명했으니 말이었다.
‘파르토, 저 녀석은…… 자기 일이 아니니 저렇게 말할 수 있겠지.’
하여 파르토와 헤어진 세르누크는 길드 거점에 혼자 앉아 씩씩거리며 분을 삼켰다.
‘다른 길드원들은 몰라도…… 나한테는 이러면 안 되는 거지 아르케인 형이.’
하여 혼자 계속해서 씩씩거리던 세르누크는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하였다.
아르케인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지만, 세르누크의 불만은 마치 심지가 달린 시한폭탄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 *
이안이 아직 제대로 공략해보지 못한 중간계는 알려진 곳 중에는 두 곳 정도였다.
이번에 처음 발을 디딘 에레보스 제3구역부터의 명계와, 용천의 최상위 콘텐츠이자 아직 아무도 밟아 보지 못한 땅인 태천(太天).
하지만 태천의 경우에는 ‘고대 전장의 영웅’ 퀘스트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실마리조차 없는 상황이었으니, 사실상 이안이 공략해 볼 만한 차원계는 명계의 후반지역뿐.
물론 이곳에서 ‘혼령의 날개’를 얻는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지겠지만 말이었다.
띠링-!
-‘숨겨진 망자의 심연’을 발견하셨습니다.
-명성(초월)이 15,000만큼 증가합니다.
-음울한 죽음의 기운이, 더욱 강렬히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안과 발러 길드의 원정대가 혼령의 탑에 도착하는 데까지 소모된 시간은 대략 반나절 정도였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혼령의 탑을 보며, 이안은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발러 길드가 아니었다면…… 혼령의 탑을 찾는 데에는 엄청 오랜 시간이 걸렸겠어.’
혼령의 탑이 위치한 곳은 평범한 곳이 아니었다.
구불구불 이어진 망각의 강을 따라 서쪽 끝까지 이동한 다음.
서쪽 강변에 존재하는 ‘망자의 심연’을 따라 수중으로 들어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망각의 강 레테 안에 수중 맵이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은 어지간한 노력으로 찾아내기 힘든 정보였고, 때문에 이안은 적잖이 흡족할 수밖에 없었다.
‘도움을 요청하길 잘했군.’
하지만 망자의 심연에 발을 들인 순간, 흡족하던 표정의 이안은 순간적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망각의 강에 발을 디뎠습니다.
-‘망각의 저주’가 전신에 내려앉습니다.
간결한 두 줄의 메시지와 함께,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으니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