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7화 5. 초월의 영역 (3) >
* * *
띠링-!
-‘다크 어비스(Dark Abyss)’에 도착하였습니다.
-망자의 땅에 입장하였습니다.
-‘중간자’의 위격을 가졌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후략…….
음습한 기운이 도처에 깔려 있는, 채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짙은 회색 빛깔의 대지.
오랜만에 명계의 땅을 밟은 이안은 살짝 들뜬 표정으로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캬, 진짜 오랜만이잖아?’
지금 이안과 훈이가 도착한 ‘다크 어비스’는 명계에 처음 도착한 이들이 밟게 되는 초입부였다.
본격적인 명계의 콘텐츠가 시작되는 에레보스에 진입하기 전, 그러니까 비통의 강 아케론(Acheron)을 건너기 전의 모든 지역을 통칭하는 것이, 바로 다크 어비스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안이 이곳에 도착하여 감상에 젖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과거에 고작 초월 2레벨로 처음 명계의 땅을 밟았던 시절이 익숙한 풍경으로 인해 새록새록 기억났으니 말이다.
“와, 뭔가 많이 바뀌었네.”
이안의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훈이가 고개를 피식 웃으며 답하였다.
“당연하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명계에서 상주하는 유저들만 만 단위가 넘을걸?”
훈이의 대답을 들은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지난 몇 개월 동안, 정말 단 한 번도 명계에 발 디딘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안이 오지 않은 그 최근의 시간들이 명계에 가장 변화가 많았던 시간들이었으니, 명계가 천지개벽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자, 그럼 움직여 볼까?”
“어딜 가는 건데?”
“당연히 에레보스로 가는 거지.”
“그럴 거면 굳이 다크어비스로 온 이유가 뭐야? 에레보스 안에 길드 게이트로 가면 됐을 텐데.”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음……?”
의아한 표정이 된 훈이를 뒤로하고, 이안은 길을 따라 빠르게 걷기 시작하였다.
이안과 훈이가 도착한 워프 게이트는 수많은 유저들이 사용하는 소르피스 내성부터 이어진 공용 게이트였고, 이곳에서 아케론강까지 이어진 길은 단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이안의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감 넘치게 걸음을 옮기던 것도 잠시 뿐.
5분 정도가 지났을까?
이안은 다시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길을 따라 왔다고 생각했는데, 머릿속에 있던 풍경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저쪽이 아케론강인 것 같은데…… 나루터는 왜 안 보이는거지?”
이안의 중얼거림에 훈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나루터라면…… 혹시 카론을 찾는 거야?”
“당연하지. 그 아재를 찾아야 강을 건널 거 아냐.”
이어서 이안의 말을 듣던 훈이는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 대꾸하였다.
“나, 참…… 누가 보면 초짜 뉴비 한 명 데려온 줄 알겠네.”
“음……?”
“하루에 아케론 건너는 사람이 몇 명인데, 카론이 혼자서 그 일을 다 하겠어?”
“그, 그럼……?”
“저 쪽을 한번 봐.”
“응?”
“이제 나루터가 아니라, 거의 항구나 다름없다고.”
“……!”
훈이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이안의 두 눈이, 휘둥그레 확대되었다.
더 이상 나룻배가 아닌 커다란 목조 선박 여러 대가, 강가에 정박해 있었으니 말이다.
‘카론 이 아재…… 그새 자본주의에 물들어 버린 건가?’
작은 나룻배 한 대를 운영하며 5데스 코인씩 벌던 영세업자 카론은, 이안이 다른 차원계에서 머물던 사이 기업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뭐, 어찌됐든 상관없겠지. 난 강만 건너면 되니까.’
하여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이안은 훈이와 함께 선박에 올라탔다.
그래도 다행히(?) 변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뱃삯이 5코인이라는 부분이었다.
띠링-!
-‘카론의 선박’에 올라탔습니다.
-‘데스 코인’을 보유하고 있지 않으므로, 뱃삯을 차원 코인으로 대체합니다.
-뱃삯 5차원 코인이 차감되었습니다.
이안과 훈이가 올라타자, 잠시 후 선박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배에 오른 이안은 다시 흥미로운 표정이 되어 있었다.
‘신기한 NPC들이네.’
선박에는 사공 카론 대신, 해골 유령 같은 외모를 가진 NPC들이 유저를 안내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선미에 올라서자, 이안은 또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배 성능 보소.’
이전에는 노를 저어 가며 한세월 이동해야 했던 아케론강 횡단이, 쏜살같은 목조 선박의 속력으로 인해, 순식간에 끝나 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나루터의 변화는 이안의 예상처럼 카론이 자본주의에 물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아케론강을 나룻배로 건너는 것의 불편함과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그 분위기로 인해, 수많은 민원이 LB사의 기획팀을 두들긴 결과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러한 이유와는 별개로.
고성능 목조 선박 덕에, 빠르게 아케론강을 건널 수 있었던 이안과 훈이.
띠링-!
-아케론(Acheron) 강을 횡단하였습니다.
-에레보스(Erebus)에 진입하였습니다.
먼저 선박에서 내린 이안은 누군가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흠, 아직 나오지 않은 건가?”
“뭘 찾는 건데?”
“만나기로 했던 사람이 있다니까?”
“그러니까 그게 누구……?”
이안에게 되묻던 훈이는 중간에 말을 멈추었다.
그가 물어보던 그 순간, 낯익은 얼굴 하나가 두 사람의 앞에 불쑥 나타났으니 말이다.
“오, 이안! 언제 도착한 거야?”
“하하, 방금 내렸어. 명계가 너무 많이 바뀌어서, 순간 잘못 찾아온 줄 알았네.”
이안과 훈이의 앞에 나타난, 검은 로브의 사내.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크 올리버였다.
* * *
처음 명계가 열렸을 때.
가장 먼저 명계의 수많은 콘텐츠를 선점했던 길드는 다름 아닌 로터스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처음 명계를 밟은 인물이 이안이었던 데다, 중간자의 위격을 얻기 전부터 에레보스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정보를 수집한 인물 또한 이안이었으니.
최상급의 전력을 가진 로터스에서 콘텐츠 선점을 못했다면, 그것이 오히려 의아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명계 콘텐츠의 진행도를 따져 본다면, 로터스 길드의 진행도는 무척이나 하위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하위’라는 기준이 최상위권 길드들과 비교하였을 때이긴 했지만 말이다.
“도와줘서 고마워 올리버.”
“별말씀을. 친구 사이에 이 정도 쯤이야.”
용천과 정령계의 콘텐츠를 독식하다시피 한 대신, 명계의 콘텐츠들은 어느 정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로터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바로, 이안이 올리버와 발러 길드에게 도움을 요청한 이유였다.
로터스가 명계에선 아직 에레보스의 세 번째 강인 플레게톤(Phlegethon)도 넘지 못한 상황인 데 반해, 마크 올리버의 소속 길드인 ‘발러’길드는 이미 마지막 강인 망각의 강 레테(Lethe)를 공략 중이었으니 말이었다.
그 때문에 옆집 친구(?)인 올리버와의 인맥을 동원하여 발러 길드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안은 자신의 목표인 ‘혼령의 날개’를 얻는 데까지,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으리라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발러 길드가 이렇게 쉽게 이안의 요청을 수락한 데에는, 이안이 미리 깔아 둔 밑밥의 효과도 분명히 존재하였다.
‘흐흐, 역시 발러 길드는 기브엔 테이크를 아는 친구들이란 말이지.’
정령계에 큰 지분이 없던 발러 길드를 차원 전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바로 이안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안이 에피소드 관련 퀘스트를 전부 클리어할 때까지 정령계가 버티기 위해서라도, 발러 길드의 지원군은 절실한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이안 덕에 발러 길드에서 얻어 간 것이 훨씬 많았으니, 확실한 빚을 지워 둔 셈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적어도 길드 마스터인 ‘아르케인’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차원 전쟁 에피소드에서 꿀 빨았는데, 이 정도 쯤이야 어렵지 않죠.”
“후후, 그래도 마스터께서 직접 나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뭐 겸사겸사…… 이안 님을 따라다니면 재밌는 일도 많이 생길 것 같아서 말이죠.”
하여 아르케인과 올리버를 비롯한 몇몇 길드원들과 인사를 나눈 이안은, 곧 그들을 따라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구불구불한 에레보스의 숲길을 따라, 점점 더 음침한 곳으로 이동하는 이안과 일행들.
그리고 그렇게 20여 분 정도를 움직였을까?
발러 길드의 안내를 따라 어딘가에 도착한 이안의 두 동공이, 살짝 확대되었다.
거대한 어둠의 힘이 일렁이는 기이한 구조물이 이안의 시야에 들어왔으니 말이었다.
“자, 이쪽으로.”
“이게 뭐죠……? 포탈 같은 건가?”
“뭐, 비슷한 개념입니다.”
“……?”
“다크 홀(Dark Hole) 이라고, 에레보스 내에서만 사용 가능한 워프 게이트니까요.”
시커멓게 솟아 있는 두 개의 거대한 바위기둥.
그 사이에 회오리치는 어둡고 음습한 안개와 기류들.
그 기괴한 외형에 잠시 마른침을 꿀꺽 삼킨 이안은, 곧 게이트의 안쪽으로 천천히 발을 딛었다.
그리고 이안의 발이 게이트의 안쪽에 닿은 순간.
띠링-!
-다크 홀에 입장하였습니다.
-죽음의 기류에 의해, 정해진 곳으로 이동됩니다.
고오오오-!
거대한 굉음과 함께, 이안의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 * *
“흐음, 오늘도 결국 실패인가.”
“어쩔 수 없습니다, 마스터. 일단 돌아가시지요.”
“조금만 더 하면 넘어설 것도 같은데…… 이거 아쉽게 되어 버렸군.”
“무리하다가 영혼의 안식에 빠지는 것보단…… 무조건 안전하게 움직이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마스터.”
“그래. 스리케스. 네 말이 맞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잠시 보는 것만으로도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착각이 드는 짙은 군청빛의, 고요하고 깊은 심연.
어두운 심연 앞에서 대화를 나누던 두 남자는, 걸음을 돌려 물 밖으로 헤엄쳐 나왔다.
띠링-!
-망각의 강 레테(Lethe)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습니다.
-모든 망각의 저주가 해제됩니다.
-초월 레벨이 원래대로 복구됩니다.
-모든 고유 능력의 정보가 원래대로 복구됩니다.
……후략…….
물 밖으로 빠져나와, 아쉬운 표정으로 걸음을 돌리는 두 남자.
그들의 정체는 바로, ‘게스토’길드의 길드 마스터인 카브리엘과 길드원 스리케스였다.
“후우, 그래도 이제 공략법은 어느 정도 감이 오는 것 같군.”
“맞습니다, 마스터. 늦어도 이달 내로는 충분히 넘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게스토 길드는 남미권 서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길드로서, 최상위권 랭커 길드 중 하나였다.
비록 기사 대전에서는 칼데라스를 상대로 만나 16강전에서 탈락해 버렸지만, 길드의 전력이나 포텐은 전 세계 랭킹 10위 안에 들 정도의 강력한 길드인 것이다.
게다가 명계에 거의 모든 전력을 몰빵해 온 게스토 길드는, 명계 콘텐츠 진행 속도만큼은 칼데라스에 비견될 정도로 빨랐다.
“카이보다 먼저 레테를 건너야 하는데…….”
“최대한 정보를 수집해 보겠습니다, 마스터.”
“요즘 인간 진영 놈들은 잘 안 보인다 했던가?”
“인간 진영 놈들이라 해 봐야, 여기까지 진행한 길드는 발러 놈들뿐인데…… 최근에 전부 다 차원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었습니까?”
“그랬지.”
“이제 슬슬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겠지요.”
한쪽 진영에 크게 치중되어 있는 다른 차원계들과 달리, 명계에는 인간 진영의 유저들과 마족 진영의 유저들이 거의 반반 수준으로 공존한다.
그 때문에 명계에서는, 콘텐츠를 진행할 때 가장 많이 신경 써야 할 것이 상대 진영 전력의 움직임이었다.
“놈들이 돌아오기 전에, 어떻게든 레테를 넘는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망각의 문을 놈들이 발견하기라도 하면, 생각보다 곤란해질 수도 있어.”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던 카브리엘과 스리케스는,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본 뒤 빠르게 스크롤을 찢었다.
촤악-!
그러자 두 사람의 그림자는 짙푸른 기류와 함께 오간 데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사라지자, 스산한 기류만이 남은 고요한 레테의 강변.
잠시 후 그곳에, 새로운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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