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6화 5. 초월의 영역 (2) >
* * *
정령계와 기계문명의 대전쟁이 막을 내리자, 중간계는 무척이나 평화로워졌다.
용천과 엘라시움 간의 전쟁도 어느 정도 소강상태가 된 데다, 명계는 언제나 전쟁과 무관한 차원계였으니.
차원계 간의 전쟁 콘텐츠들이 이제, 크게 일단락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저들이 심심해 진 것은(?) 아니었다.
전쟁 콘텐츠가 끝나며 그에 파생된 새로운 에피소드들이 열렸고, 그 에피소드들에 연계된 수많은 에픽 퀘스트들이 새로이 탄생했으니 말이다.
일단 정령계와 라카토리움의 경우 전쟁으로 피폐해진 차원계를 재건하기 위한 퀘스트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으며.
특히 라카토리움은 ‘찰리스’라는 지도자가 몰락하면서 춘추전국시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 오히려 유저들의 입장에서는 할 거리가 훨씬 더 많아진 것이다.
어느 정도 중간계에서 자리를 잡은 중상위권의 유저들은, 각자 자신에게 맞는 학파를 찾아 퀘스트를 진행하였으며.
“나 이번에 메트 학파의 용병으로 고용됐어.”
“메트 학파? 거긴 또 어딘데?”
“루탄 구석에 있던 작은 학파인데, 이번에 독립했나보더라고.”
“아하.”
“너도 이쪽으로 올래? 내가 추천해 줄 수 있는데.”
“음, 큰 학파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아냐. 꼭 대형 학파에 소속되는 게 좋지만은 않더라고.”
“그래? 왜?”
“큰 학파일수록 대접받기도 힘들고, 경쟁이 엄청 치열하잖아.”
“하긴…….”
“신생 학파 퀘스트가 공헌도도 많이 주고 키워 가는 맛도 있고, 꽤 괜찮은 것 같아 나는.”
“좋았어. 그럼 나도 한번 가 볼까?”
이미 기계문명의 진행도가 높은 최상위권 유저들의 경우, 찰리스의 ‘안배’라는 것을 찾기 위해 콘텐츠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전쟁 에피소드의 마지막에서 찰리스가 의미심장하게 던졌던 한마디.
-나는 여기서 소멸하지만, 나의 안배는 아직 남아 있을 테니 말이지.
-그게 무슨…….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거든.
-……!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찰리스가 남긴 ‘안배’라는 이 한마디가, 랭커들에게는 엄청나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스터, 찰리스가 남겼다는 그 안배를 어떻게든 찾아야만 합니다.”
“찰리스의 안배라…….”
“그것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우리 크리쳐 길드에서 라카토리움에 대제국을 세울 수 있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급변하는 중간계의 정세에도 불구하고, 며칠째 길드 거점에 틀어박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인물도 한 명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이 상황을 만들어 낸 장본인.
바로 이안이었다.
“이 형은 대체, 거점에 틀어박혀서 뭐 하는 거야?”
훈이의 투덜거림에, 옆에 있던 카노엘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벌써 이틀이나 됐는데…… 피곤해서 쉬고 있는 건 아닐까?”
“형, 이안 형이 게임하다 피곤해하는 거 본 적 있음?”
“그, 글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다들 엄청 바쁘게 움직이는데, 우리만 조용하니까 뭔가 불안하네.”
이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헤르스가, 피식 웃으며 대꾸하였다.
“쓸데없는 소리들 말고, 오늘 자 길드 퀘나 싹 클리어할 준비 해.”
“헤르스 형, 우린 뭐 안 해?”
“뭘 해?”
“정령계 재건 퀘스트라든가…… 뭐, 그런…….”
“의미 없어.”
“응?”
“이번 전쟁 에피소드에서 받은 공헌도만 해도, 정령계 쪽 공헌도는 넘쳐흐르는데 무슨…….”
“드디어 카일란에서도 할 게 없어지는 날이 온 건가…….”
“그럴 리가.”
“……?”
“훈이 너는 곧 빡세게 굴릴 거라고, 이안이가 아예 엄포를 놓던데?”
“잠깐. 헤르스 형……! 방금 그 말, 제발 못 들은 거로 하면 안 될까?”
이안이 폐관 수련(?)에 들어간 로터스 길드 거점은 며칠 동안 무척이나 조용했다.
다들 각자의 개인적인 퀘스트를 하며 정비의 시간을 갖다보니, 거점은 조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조용한 거점의 한편에서, 이안은 투닥투닥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 * *
고된 여정으로 지쳐 휴식기(?)를 가진다는 유신의 생각과 달리, 거점 구석에 틀어박힌 이안은 여느 때처럼 무척이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무조건 성공해야 해.”
에피소드 클리어로 인한 보상을 정리하고 장비와 소환수들을 재정비하는 데만 거의 하루의 시간이 걸렸던 데다, 에피소드가 끝나기만 하면 가장 하고 싶었던, 한 가지 ‘작업’을 시작했으니 말이었다.
‘이제 레시피는 완벽하고…… 이번에도 실패하면 확실히 숙련도 부족이야.’
이안이 하고 싶었던 작업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정령계의 에피소드를 진행하던 도중, 덤으로 얻게 된 콘텐츠인 고대의 마수 연성술.
그리고 마족 진영의 연성술사인 ‘엘던’을 돕다가(?) 얻게 된 레시피인 ‘고대 파괴의 발록’레시피.
이것들을 이용해 크르르를 신화 등급의 마수로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이야말로, 이안이 가장 하고 싶었던 콘텐츠였고.
그것이 벌써 며칠째 그를 길드 거점에 박혀 있게 한 이유였던 것이다.
균열에서 전투하는 와중에도 한 번씩 생각날 정도로 신화 등급의 고대 발록 연성은 매력적이었으니, 이안이 명계에 가기 전 어떻게든 연성을 해내려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자, 이번에야말로……!”
우우웅-!
연성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준비한 이안은 또다시 구슬땀을 흘려 가며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벌써 연성 실패만 일곱 번째.
다행히 이제까지의 관록(?)이 있어 대실패는 피할 수 있었고, 덕분에 본체인 크르르를 날려 먹는 대참사는 아직 없었지만, 그래도 마법진을 그릴 때마다 초긴장 상태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협회에서 엘던의 연성진을 그려 줄 때에는 어떻게 한 번에 성공했었는지 몰라도, 고대의 연성술 난이도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구웅- 쿠구궁-!
하지만 난이도가 어렵다고 해서, 그것이 이안을 포기하게 만들 이유는 되지 않았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항상 확실한 리턴값이 돌아오는 것이, 카일란 콘텐츠의 특징이었으니 말이다.
고오오오-!
하여 이안은 수억에 가까운 재화를 소모하면서도 끈질기게 도전하였고.
띠링-!
그 결과, 결국 고대의 발록을 연성해 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동안의 실패를 보상하기라도 하듯 잭팟이 터지면서, 마법진의 완성도가 거의 100%에 가깝게 붙은 것이다.
-연성의 재료들이 성공적으로 감응하기 시작합니다.
-마법진의 완성도 : 99.97%
-레시피에 맞는 재료들이 융합되었습니다.
99.97이라는 마법진 완성도 수치는 어지간히 쉬운 마법진에서도 만들어 내기 힘든 것이었고, 때문에 메시지를 확인하는 이안의 두 눈은 점점 더 휘둥그레졌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마법진이 강렬한 마기에 휩싸입니다!
-고대의 마수 연성술에 성공하셨습니다!
-‘고대의 마수 연성’을 성공적으로 완료하셨습니다!
-연성 기여도 : 100%
-마수 연성 기여도에 비례하여, 마수연성술의 경험치가 증가합니다.
……중략……
-칭호 ‘발록 창조자’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연성 등급의 결과가 1티어 추가로 상승합니다.
-연성 등급 : SS
-연성 등급이 A등급 이상이므로, 마수의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신화 등급의 마수, ‘고대 파괴의 발록’이 탄생했습니다.
-S등급 이상의 연성 등급을 달성하여, ‘마수 연성술’의 숙련도가 추가로 15%만큼 상승합니다.
완벽에 가까운 마법진 완성도에 ‘발록 창조자’ 칭호까지 시너지를 내면서, 지금까지 손에 꼽을 정도로 보기 힘들었던 SS라는 연성 등급이 만들어진 것이다.
“크……!”
이안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고, 그런 그의 반응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더욱 거대하고 늠름한 외형으로 탈바꿈된 크르르가 이안을 향해 그르렁거렸다.
크르르르-!
스하아-!
이어서 그런 크르르와 눈이 마주친 이안은, 무척이나 감격에 겨운 표정이 되었다.
‘드디어 우리 크르르도 신화 등급……!’
신화 등급 소환수들 때문에 주전(?) 자리에서 항상 밀려나던 크르르가, 이제 다시 밥값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도 기뻤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감격도 잠시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은 이안은, 다시 멍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고대 파괴의 발록(크르르)’/Lv.1(초월)
크르르를 어떻게 전투에서 써먹을 수 있을지 온갖 상상을 하고 있던 그의 눈에, 순간적으로 레벨 1이라는 글씨가 들어찼으니 말이다.
‘하, 맞다…… 다시 키워야지.’
한편 그런 주인의 허탈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흡족한 표정으로 이안의 앞에 다가온 크르르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화 등급으로 진화된 덕인지, 크르르도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크르르…… 그대가 원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리라……!
그리고 1레벨짜리 발록의 패기에, 이안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 *
성운(聖雲).
말 그대로 성스러운 구름이라는 뜻을 가진 이 성운은, 아직 카일란의 세계관 내에서 미지의 영역 같은 곳이었다.
중간계를 일정 수준 이상 진행한 랭커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 보기는 했을 테지만, 그 누구도 아직 밟아 보지는 못한 영역이 바로 이 성운의 영역이었으니 말이다.
이안의 경우에도 특수한 퀘스트의 일환으로 잠깐 밟아 본 것이 전부인 이 성운.
때문에 이 성운에 대한 정보는 카일란의 커뮤니티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랭커들은 어렴풋이 성운의 개념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다.
성운이라는 이름과, 해당 이름이 언급되는 퀘스트의 맥락을 대조해 봤을 때, 이것이 보다 더 상위 콘텐츠로 가기 위한 통로라는 정도는 짐작이 가능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그 ‘짐작’을 가장 구체화시킬 수 있는 인물은 당연히 이안이었다.
그 어떤 랭커들보다도 성운에 대해 많은 단서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 바로 이안이었으니 말이다.
이안이 처음 성운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었던 콘텐츠는, 다름 아닌 ‘용천’의 메인 시나리오와 연계된 퀘스트였다.
당시 이안은 용천의 가문에 소속되어, 거신족과의 전투를 치르면서 압도적인 공헌도를 달성했었고.
그 과정에서 소속된 가문뿐 아닌 용천의 모든 가문에게 인정받아, ‘고대 전장의 영웅’이라는 퀘스트를 수령했었다.
그리고 이 퀘스트가 바로, 중간계의 위에 존재하는 상위 콘텐츠에 대한 최초의 단서라고 할 수 있었다.
<고대 전장의 영웅Ⅰ(히든)(에픽)>
-당신은 거신족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경이로운 공헌도를 달성하였다. 당신의 활약으로 거신족 대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균열 바깥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물론 거신들은 머지않아 또다시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볼 것이지만…….
……중략……
하여 중천의 가문들은 당신에게 용족이 아닌 동맹 세력 최초로 ‘현자의 탑’에 오를 자격을 부여하였다.
성운에 있는 현자의 탑으로 가서, 그곳을 지키는 고룡 ‘드라키시스’를 만나자.
그리고 그가 가진 지혜를 얻는다면, 그것은 당신의 영혼이 가진 위격을 한 단계 더 높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퀘스트 난이도 : 없음
-퀘스트 조건
‘중간자’의 위격을 획득한 자.
승천의 조건을 충족하여, 용오름을 오른 자.
중천의 동맹으로, 누적 공헌도 100만을 달성한 자.
중천의 가문 중 세 곳 이상의 수장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은 자.
-제한 시간 : 없음
-보상 :‘고대 전장의 영웅 Ⅰ’ 연계 퀘스트 발동, 명성(초월) +5,000
*거절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퀘스트입니다.
퀘스트를 받은 지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클리어할 수 없었던, 이안의 몇 안 되는 퀘스트.
사실 퀘스트의 내용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현자의 탑’에 가서 ‘드라키시스’라는 NPC만 만나면 클리어되는 중간 단계의 퀘스트였으며, 까다로워 보이는 퀘스트의 조건들도 이안은 이미 충족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다만 이 현자의 탑이 성운의 어딘가에 있는 곳이라는 사실, 이 하나 때문에 아직까지도 이안이 진행하지 못한 퀘스트가 바로 고대 전장의 영웅 퀘스트였다.
특별한 신탁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성운을 밟기 위해서는, 세 가지 신물이 필요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클리어 여부와 별개로, 이 퀘스트의 내용은 이안에 한 가지 확실한 단서를 주었다.
고룡 드라키시스를 만나 그가 가진 지혜를 얻는다면, 영혼의 위격을 한 단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
영혼의 위격이 높아진다는 것은 중간자보다 더 고차원적인 위격을 갖게 된다는 의미였고, 이것이야말로 가장 결정적인 단서였으니자보다 고차원적인 위격이란 신격을 의미하는 것일 테고…… 어쩌면 성운은 신계로 이어지는 통로일지도 모를 일이지.’
그리고 이러한 추측이 바로, 이안을 움직이게 한 가장 큰 동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고룡 드라키시스를 만나는 것이 신계 콘텐츠로 가는 열쇠임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으니.
현자의 탑으로 가기 위해.
성운을 밟기 위해, 필요한 마지막 열쇠인 ‘혼령의 날개’가, 이안에겐 가장 우선시 되는 목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가는 건데, 형?”
하여 불안한 표정으로 쫄래쫄래 따라오는 훈이의 물음에, 이안은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명계.”
“갑자기…… 명계라고?”
“응.”
모든 준비를 마친 이안이 곧바로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명계였으니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