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5화 5. 초월의 영역 >
거의 몇 달에 걸쳐 이뤄진 차원 전쟁 에피소드의 대장정.
성공적으로 그 모든 퀘스트를 완수해 낸 이안은 무척이나 뿌듯하였다.
‘결국 해 냈어……!’
지금까지 수많은 어려운 퀘스트들을 완수해 온 이안이었지만, 그런 그에게도 이번 차원 전쟁 에피소드는 결코 쉽지 않은 대장정이었다.
애초에 에피소드 자체가 기계문명에 유리하게 판이 짜여진 에피소드였으니 말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본다면, 어디 한 곳에서 조금만 삐끗했어도 절대로 깰 수 없었던 퀘스트.
‘진짜 빠듯했지.’
‘쉽지 않았다’라는 것은 퀘스트 과정에서의 전투 난이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안이 진행했던 퀘스트들 중, 전투 난이도가 낮았던 퀘스트는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다만 이번 퀘스트의 경우, 중간에 퀘스트 스텝이 조금만 꼬였어도 이안이 도착하기 전에 에피소드가 끝나 버렸을 테니, 여러 측면에서 지옥 같은 난이도의 에피소드였던 것이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난이도가 어려운 만큼, 받게 되는 보상은 확실하기 그지없었지만 말이다.
띠링-!
-기계문명의 지도자 ‘찰리스’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정령계 구원(에픽)(히든)(연계)’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셨습니다!
-클리어 등급 : SS
-명성(초월)을 50만 만큼 획득하셨습니다.
-‘구원자의 망토(신화)(초월)’ 장비를 획득하셨습니다.
-‘구원자의 머리장식(신화)(초월)’ 장비를 획득하셨습니다.
……중략……
-정령계의 모든 NPC와의 친밀도가 +15만큼 상승합니다.
-정령왕 ‘트로웰’과의 친밀도가 +30만큼 상승합니다.
-정령왕 ‘엘리샤’와의 친밀도가 +30만큼 상승합니다.
-특수한 퀘스트를 완수하여, 정령 마력과 소환 마력이 영구적으로 증가합니다.
……중략……
-‘정령계의 구원자’로서 완벽에 가까운 자격을 달성하셨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어, ‘정령계의 구원자’ 칭호가 영구적으로 유지됩니다.
-퀘스트 클리어 등급(SS)에 따라, ‘정령계의 구원자’ 칭호의 효과가 변경됩니다.
-‘정령계의 구원자’ 칭호의 모든 효과가 –25%만큼 감소합니다!
……후략…….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들을 확인하면서, 이안은 저도 모르게 히죽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한 보상에는 이제 별 다른 감흥도 없는 이안이었건만, 이번에 획득한 보상들은 이안으로서도 침을 질질 흘릴 만한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특히 이안이 가장 마음에 드는 보상은 ‘정령계의 구원자’칭호의 효과였다.
‘-25% 선에서 유지가 되다니……!’
퀘스트 한정으로 사기적인 스펙이 부여된 칭호가 바로 ‘정령계의 구원자’였는데, 이 칭호가 영구 보존되면서도 사 분의 일 수준밖에 능력치가 깎이지 않았으니.
이것은 정령술사로서 이안의 능력치를 한 단계 정도는 강화시켜 주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좋은 장비야 파밍으로든 경매장에서든 구할 수 있지만…… 이런 칭호는 얻을 방법이 없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상을 확인하며 실실 웃고 있는 이안의 앞에, 트로웰과 엘리샤가 다가왔다.
-이안, 정령계의 구원자시여.
-감사합니다, 이안 님. 이안 님 덕에, 정령계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어요.
트로웰과 엘리샤의 말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던 이안은, 순간 아직 통제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 머쓱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 아직 끝난 게 아니었지.’
그리고 그런 이안을 대신하여, 이안의 AI가 둘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 정령왕께서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별말씀을. 이것은 저희의 일…….
-그대들의 일임과 동시에, 제 일이기도 하지요.
-……!
-정령은 저의 오랜 벗이니까요.
-아아……!
이야기를 하던 이안과 두 정령왕의 주변으로, 새하얀 빛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하얀 빛의 장막은, 무너져 내리는 균열 속에서 그들을 지켜 주었다.
쿠구궁-!
이어서 잠시 후, 어두컴컴하던 사위가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하였다.
차원의 균열이 무너지면서 뒤틀렸던 공간이 원상 복구되었고, 이안을 비롯한 모든 정령계의 인원들은 정령계의 따스한 햇살 아래로 돌아온 것이다.
-감격스런 날이로군.
-그러게요.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올 줄이야…….
감격에 말을 잇지 못하던 엘리샤는,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화를 찾은 정령계와 조우했다는 사실 자체도 감격적이었지만, 특히 그녀는 트로웰을 비롯한 다른 정령들보다도 더 감정이 벅차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다른 정령들과 달리, 정령계의 땅 자체를 수천 년 만에 밟아 보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아, 그래. 이런 곳이었지. 나의 고향…….
하지만 엘리샤의 감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가 개인적인 감정에 오래도록 젖어 있기엔, 너무도 많은 유저들이 에피소드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우우웅-.
이안의 앞에 천천히 다가온 엘리샤가, 가녀린 두 손을 자신의 하얀 목 뒤로 넘겼다.
이어서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새하얀 백색의 목걸이를 빼어 들었다.
-드디어 이 목걸이가 주인을 찾은 것 같군요.
-이 목걸이가 무엇인가요, 엘리샤 님.
-정령들의 진정한 친구. 그대를 위해 만들어진 물건…….
-……!
-이안 님이라면…… 이 목걸이의 주인이 되실 자격이 있을 것 같네요.
엘리샤는 마치 이안을 감싸 안듯, 양손을 그의 목에 둘러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그리고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이안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AI의 통제하에 있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녀의 새하얀 피부와 아름다운 얼굴이 순간적으로 코앞까지 다가오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엘리샤로 인한 당황도 잠시뿐.
띠링-!
떠오른 한 줄의 시스템 메시지에, 이안의 두 눈은 다시 반짝였다.
-정령왕 ‘엘리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원소의 목걸이’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원소의 목걸이……!’
정신 없이 퀘스트를 진행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하지만 결국 이 정령계에서 어떻게든 구했어야만 하는 아이템.
‘원소의 목걸이’라는 이름이, 그의 눈에 번쩍 들어왔으니 말이었다.
-이건…… 무슨 목걸이인가요?
-저도 어떤 의미를 담은 목걸이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정령들의 진정한 친구가 나타난다면, 이 목걸이의 주인이 되리라 신탁을 받았을 뿐이지요.
이안의 AI가 무슨 목걸이냐고 물어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안은 이 목걸이의 용도를 잘 알고 있었다.
‘이제 한 피스만 더 모은다면…… 성운을 밟을 수 있겠군.’
중간자를 초월하기 위해 건너야 하는 징검다리이자, 신계로 이어진 계단이나 다름없는 성운.
그것을 밟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아이템 중 하나가 바로, 이 원소의 목걸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명계만 남은 건가?’
용천에서 얻을 수 있었던 용비늘 신발과, 엘리샤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원소의 목걸이.
마지막으로 명계 어딘가에 있을 ‘혼령의 날개’까지 얻어 낸다면, 이제 중간계를 넘어설 수 있는 발판이 비로소 마련되는 것이다.
원소의 목걸이를 받은 뒤, 엘리샤와 몇 마디를 더 나누는 이안의 AI.
이어서 둘의 대화가 끝나자, 옆에 있던 트로웰이 낮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를 만날 수 있어서 영광이었소. 구원자시여.
-별말씀을.
-하지만 아쉽게도 이제, 나 또한 신께서 정하신 섭리를 따라야 할 시간이 온 것 같소이다.
-그게 무슨……?
-찰리스가 그랬듯 나 또한, 지금껏 신의 섭리를 거스르고 있었으니 말이오.
-……!
-트로웰 님, 설마……!
이안과 엘리샤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인 트로웰의 신형이, 점점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의 대사를 통해, 이안은 그가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지 대략 이해할 수 있었다.
‘트로웰 또한 찰리스처럼…… 죽음의 섭리를 거스르고 있었던 거였군.’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안은 처음 트로웰과 계약할 때 들었던 그의 말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후후, 그렇다면 자네가 승낙하였으니, 한동안 잘 부탁하도록 하지.
-예……? 한동안……요?
-이 전쟁이 끝날 즈음, 난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
-그건 또 무슨 말이십니까?
-과거 정령계의 몰락을 막기 위해, 주제넘게 신의 흉내를 내었던 업보라고 알고 계시게나.
-……?
찰리스의 봉인에 의해 강제적으로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엘리샤와 달리, 트로웰은 정령계의 몰락을 막기 위해 강제적으로 자신의 수명을 늘려 왔다.
그리고 그 의도가 어찌 되었든.
이것은 ‘신’이 만든 ‘죽음의 섭리’를 거역한 것.
하여 트로웰 또한, 소멸의 길을 걷는 것이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소멸되는 트로웰을 응시하는 엘리샤와, 그녀의 옆에 담담한 표정으로 선 이안.
-아, 트로웰 님…….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정령계의 에피소드도 완전히 종료되었다.
띠링-!
-모든 에피소드가 종료되었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새로운 에피소드가 생성되었습니다.
-‘정령계의 새로운 생명’ 에피소드가 시작됩니다.
-‘차원 전쟁’과 관련된 에피소드에 관여했던 유저들은, 참여할 수 없는 에피소드입니다.
-‘기계문명 재건’ 에피소드가 시작됩니다.
-‘차원 전쟁’ 에피소드의 관여 여부와 관계 없이, 모든 유저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후략…….
수많은 시스템 메시지들이 다시 이안의 눈앞에 떠올랐지만, 이것들은 대부분 모든 유저들의 눈앞에 보이는 글로벌 메시지였다.
다만 한 가지.
띠링-!
마지막으로 떠오른 개인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은, 저도 모르게 다시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정령왕 ‘엘리샤’가 여전히 당신과 함께하길 원합니다.
-정령왕 ‘엘리샤’와의 계약이 정식으로 이어집니다.
트로웰과 달리 엘리샤는 이안의 곁에 남았고, 이것 또한 그 어떤 보상과 견주기 힘들 만큼 강력한 보상이었으니 말이다.
‘크……! 이건 기대도 안 했는데…….’
하여 모든 에피소드가 마무리된 뒤, 이안은 그 어느 때보다 기분 좋게 정령계를 나설 수 있었다.
‘이제 중간계 콘텐츠도…… 거의 끝이 보이는 건가?’
힘들었지만, 그만큼 만족스러운 보상을 얻었고, 또 다음 에피소드를 향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방향성 또한 얻었으니 말이었다.
이안이 중간계에서 가장 처음 밟았던 차원계였지만, 반대로 아직까지 가장 진행도가 낮은 차원계이기도 한 명계.
그곳으로 향하기 전, 이안은 며칠 정도 정비의 시간을 가질 예정이었다.
차원 전쟁 에피소드에서 얻은 보상들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으며, 몇 가지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단서들도 조사해 볼 시간이 필요했으니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