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3화 4. 찰리스의 최후 (2) >
광역 침묵이 터지자마자 해설진이 언급했던 아이템인 해제 포션.
침묵뿐만 아니라 모든 상태 이상을 단번에 풀어 주는 이 해제 포션은 사실 그렇게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해제 포션의 등급에 따라, 해제 가능한 상태 이상의 범위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많은 유저들이 사용하는 해제 포션은 가장 기본적인 디버프만을 풀어 주는 포션이었고.
지금 정령계 진영을 뒤덮은 광역 침묵을 풀 수 있는 해제 포션은 최소 3단계 이상의 고급 해제 포션이었으니 말이다.
일반적인 상점에서는 구입하는 것 자체도 불가능할뿐더러, 최상급의 사제 클래스가 아니라면 제작하기 힘든 고급 잡화 아이템.
당연히 가격 또한 어지간한 장비 아이템 수준으로 비쌌기 때문에, 모든 유저가 이 고급 해제 포션을 상비하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정령계 진영에 크리티컬한 데미지가 들어간 이유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안의 인벤토리에 해제 포션이 없을 리는 없었다.
항상 최상급의 던전, 퀘스트를 진행하는 이안으로서는 여벌의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이안은 해제 포션을 쓸 필요가 없었을 뿐이었다.
대지의 수호령이 발동된 순간, 이안은 ‘무적’상태가 되었으니 말이다.
*수호령을 통제하는 동안 소환술사는 움직일 수 없으며, 대신 ‘무적’ 상태가 됩니다.(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도, 움직임이 필요 없는 종류의 고유 능력들은 발동 가능합니다.)
사실 이안이, 타카루트의 광역 침묵을 예상하고 수호령을 발동시킨 것은 아니었다.
타카루트의 광역 침묵 고유 능력은 이전에 한 번도 수면 위로 떠오른 적이 없던 숨겨진 능력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안이 수호령의 ‘무적’효과로 침묵 효과를 무효화시킨 것이 우연일까?
그 또한 당연히 아니었다.
타카루트의 광역 침묵은 랭커들조차 반응하기 힘들 정도로 짧은 텀을 가진 즉발에 가까운 기술이었는데.
우연으로 이것을 무효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이안은 광역 침묵이 터질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지만 그에 준하는 어떤 강력한 고유기가 곧 발동될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대지의 환원 버프를 최대치까지 쌓은 시점부터, 계속해서 수호령을 소환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것이다.
찰리스나 군단장이 강력한 공격 기술을 사용하면 그것을 무적 효과로 무효화시키면서, 역공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러한 이유로, 이안은 침묵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계획했던 역공을 감행할 수 있었다.
심지어 찰리스가 쏟아부은 멸망의 포화 덕분에, 더 쉽게 찰리스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할 수 있었고 말이다.
포화로 인한 자욱한 연기.
그리고 더욱 복잡해진 난전 속에서, 이안은 깔끔하게 찰리스의 후방을 점할 수 있었다.
-강렬한 마력이 온몸을 지배하는군. 이 정도로 강력한 마력은 처음이야.
처음 전장에 나타났을 때보다 더 거대해진 권능의 수호령은, 묵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이안의 컨트롤에 따라 움직였다.
쿵-쿵-쐐애액-!
이어서 포화를 쏟아 보낸 뒤 방심하고 있는 찰리스의 등 뒤에, 그대로 삼지창을 꽂아 넣었다.
콰아앙-!
-‘권능의 수호령’이 ‘찰리스의 기계 발록’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기계 발록’의 내구도가 2,172,991만큼 감소합니다!
처음 전장에 소환되었던 수호령의 창격은 대략 100~150만 정도의 데미지를 보여 주었다.
그 때문에 210만 정도의 피해량은 중첩된 버프량에 비해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대지의 환원 버프가 몇 배로 중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파괴력은 30% 정도밖에 늘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안은 눈앞에 떠오른 210만이라는 숫자를 보고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미친, 210만이라고?’
그리고 그 이유는 간단했다.
150만이라는 데미지는 평범한(?) 기계 괴수들을 쳤을 때의 이야기였고, 지금 이안의 눈앞에 떠오른 데미지는 무려 찰리스를 타격하여 만들어 낸 데미지였으니 말이다.
어지간한 공격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는,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찰리스의 기계 발록.
이 기계 발록에게 평타 한 방으로 200만이라는 데미지를 꽂아 넣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무식한 괴물이 탄생했군.’
이 와중에 200만이라는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이 5% 정도밖에 깎이지 않은 찰리스의 맷집은 감탄스러웠지만, 그래도 상황은 무척이나 희망적이었다.
200만의 데미지에 생명력이 5% 깎였다면, 스무 번 때려서 잡으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놀란 것은, 이안도 해설진도 아닌 바로 찰리스였다.
-크허어어억……!
전장을 붉게 물들인 포화에 감탄하고 있던 와중에,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로 강력한 창격을 후려 맞았으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곧바로 파악조차 힘들었던 것이다.
쿠쿵-그그극-!
심지어 볼썽사납게 바닥을 구르느라, 하얗게 윤기 나던 외장갑이 전부 먼지로 뒤덮였으니, 찰리스의 얼굴은 와락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가, 감히……!
하지만 찰리스의 그러한 분노는 거기서 더 이어질 수 없었다.
이안이 조종하는 수호령은 고작 한 번의 공격을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쐐애액-!
청록빛 창대를 크게 휘저으며 달려든 이안의 수호령은, 바닥에 쓰러진 찰리스의 기계 발록을 향해 연속해서 세 번의 창격을 추가로 박아 넣었다.
콰쾅-파아앙-!
콰드득-!
-‘권능의 수호령’이 ‘찰리스의 기계 발록’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기계 발록’의 내구도가 1,279,153만큼 감소합니다!
-‘기계 발록’의 내구도가 1,753,245만큼 감소합니다!
-‘기계 발록’의 내구도가 1,637,752만큼 감소합니다!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위력을 가진 대신, 확실히 움직임 자체는 느린 수호령.
하지만 그런 수호령의 스텟 구조에 완벽히 적응한 이안은, 깔끔하게 세 번의 추가 타격을 집어넣을 수 있었다.
느린 대신 긴 사정거리와 묵직한 창대의 무게를 이용하여, 바닥에서 일어나려는 찰리스가 피할 수 없도록 교묘한 각도로 공격한 것이다.
마치 대전 격투 게임에서 연계 기술을 집어넣듯, 이안의 공격은 무척이나 깔끔하였다.
쿠웅-!
하여 생각지도 못했던 이안의 반격에 해설진을 비롯한 시청자들은 흥분하였고.
-이안! 이안의 반격입니다!
-역시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리가 없죠!
아수라장이 되었던 정령계 진영의 유저들도, 다시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하였다.
“이안이 찰리스를 마킹하는 동안, 최대한 피해를 복구해!”
“훈이! 레미르 누나! 둘이 타카루트를 막아!”
“알겠어, 헤르스.”
“유신, 너는 나랑 같이 길을 한번 뚫어 보자.”
“오케이!”
수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노련하게 오더를 내리는 헤르스를 위시하여, 빠르게 전장을 휘어잡는 로터스.
그런 로터스의 분위기 전환에 힘입은 것인지, 다른 길드의 파티들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다시 전세는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직 원점이라고 하기에는, 정령계 진영의 피해가 너무 막심하지 않은가요?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런 전쟁 콘텐츠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항상 기세죠.
-아, 그 또한 일리 있는 말씀이시네요.
그리고 그렇게 분위기가 반전되는 동안.
이안과 찰리스.
정확히는 수호령과 찰리스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후우웅-!
바닥에서 일어나 다시 균형을 잡은 찰리스의 기계 발록이, 이안에게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 하찮은 망령 따위로 나를 어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쿠구구궁-!
하여 다시 시청자들의 관심은 이 전투에 쏠리기 시작하였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가든, 전장의 모든 구도는 이안과 찰리스의 전투를 중심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으며.
결국 둘의 싸움에서 누가 이기느냐가, 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테니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관심에 부응이라도 하듯, 수호령의 창대가 다시 묵직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 * *
수호령의 장점이 무식한 전투 스텟과 파괴력이라면, 가장 큰 단점은 커다란 몸집과 둔중함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이안은 찰리스를 미친 듯이 몰아붙였다.
혼란을 틈타 좁혀 놓은 거리를, 다시 벌리도록 찰리스에게 기회를 준다면, 싸움은 훨씬 더 어려워질 것임이 자명했으니 말이다.
온갖 광역기와 원거리 타격 기술을 가진 기계 발록과 달리 이안의 수호령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육탄전뿐.
게다가 기계 발록은 덩치에 비해 제법 빠른 편이었으니, 한번 거리를 벌려 주면 상대하기 무척이나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가능한 이번 기회에 마침표를 찍어야 해. 죽이는 게 불가능하다면, 최소 확실한 승기라도 잡아야겠지.’
하여 이안의 컨트롤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이안의 평소 전투 스타일과 달리 느리고 육중한 움직임으로 찰리스를 제압해야 하다 보니, 공방 한 번 한 번에 더 많은 공이 들어가는 것이다.
‘다 피할 생각은 하면 안 돼. 맞아 줄 건 맞아 주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데미지 교환만 되면 성공이야.’
그리고 그렇게 신중한 이안의 컨트롤 덕분에, 찰리스와 수호령의 전투는 더욱 흥미진진해졌다.
퍼어엉-!
찰리스의 폭발 공격에 어느 정도 피해를 입으면서도, 수호령의 창격이 연달아 기계 발록을 타격하는 데 성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평소에 이안이 보여 주던 속도감 있는 컨트롤과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반대로 초보 유저들의 눈에도 공수 교환이 한눈에 다 보이는 싸움이다 보니, 전투 자체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육중하고 느리다고 하여, 현란함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안은 찰리스와 교전하는 와중에도, 주변에서 수호령을 위협하는 다른 기계 괴수들을 완벽하게 마킹했으니 말이다.
다른 기계 괴수들의 방해 속에서도, 교묘히 찰리스에게 연쇄 공격을 성공시키는가 하면.
퍼펑-!
묵직하게 떨어져 내리는 궤적의 관성을 이용하여, 다가오던 기계 괴수들을 순식간에 휩쓸어 버렸으니 말이다.
콰쾅-.
퍼어엉-!
그리고 찰리스조차 몇백 만의 데미지를 입은 수호령의 무시무시한 창격은, 평범한 기계 괴수들이 버텨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권능의 수호령’이 기계 괴수 ‘타그루’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타그루’의 내구도가 5,751,872만큼 감소합니다!
-‘타그루’의 내구도가 전부 소진되었습니다!
-기계 괴수 ‘타그루’를 성공적으로 처치했습니다!
-기계 괴수 ‘키라크루’를 성공적으로 처치했습니다!
-기계 괴수 ‘타그루’를 성공적으로 처치했습니다!
……후략…….
회전력과 관성을 이용해 몸을 빙그르르 돌리면서, 수호령을 포위한 기계 괴수들을 깡그리 터뜨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쯤 되자, 찰리스도 슬슬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답답한 놈들! 대체 뭐 하는 거냐! 저 수호령을 먼저 공격해!
기깅-치이익-!
어느새 견고하기 그지없던 기계 발록의 외형도 여기저기 파손되어 있었으며, 생명력 게이지도 거의 절반 가깝게 줄어들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안의 수호령 또한 기계 발록에 못지않은 피해를 입었지만, 그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기계 발록이 파괴되면 전투력이 제로에 수렴하는 찰리스와 달리, 이안은 수호령 없이도 충분히 강력한 전투력을 보여 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치열한 혈투 끝에.
콰쾅-그그그긍-!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찰리스의 기계 발록이 천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