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2화 4. 찰리스의 최후 >
카일란의 에픽 퀘스트는 평범한 유저들은 1년에 한 번 만나 보기도 힘든 희귀한 퀘스트다.
메인 시나리오의 가장 큰 줄기와 연결되어 있는 퀘스트가 에픽 퀘스트들이었으니, 콘텐츠 진행도가 높지 않다면 만날 가능성이 희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에픽 퀘스트에는 ‘귀족 퀘스트’라는 별명이 붙는다.
최상위권 랭커들이 아니라면 만나기조차 힘든 퀘스트.
게다가 해당 에픽 퀘스트와 관련된 시나리오를 가장 많이 진행한 유저는 사실상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되어 어마어마한 보상을 얻게 되니, ‘귀족 퀘스트’라는 별명이 붙을 만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픽 퀘스트 시스템에 대해, 불만을 갖는 초보 유저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어렵지 않았다.
-메인 시나리오의 진행도가 올라가 연계된 퀘스트의 보상이 강화됩니다.
-보유 중인 퀘스트, ‘정령의 친구’의 보상이 강화되었습니다.
-보유 중인 퀘스트, ‘위기의 정령 노아스’의 보상이 대폭 강화되었습니다.
……후략…….
랭커 유저가 메인 시나리오와 관련된 에픽 퀘스트를 진척해 가면, 해당 퀘스트와 연관된 모든 퀘스트의 보상이 상향 조정되는, 재밌고 특별한 시스템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에픽 퀘스트를 구경도 하지 못한 다른 유저들도, 자신의 퀘스트와 연관된 에픽 퀘스트를 진행하는 랭커를 발견한다면, 그를 응원하면서 같이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구조였다.
-크, 역시 이안갓……!
-아자……! 오늘을 위해 존버한 보람이 있군.
-님은 무슨 퀘임?
-저 요새 공략 퀘인데, 지금 일부러 보상 안 받고 있음.
-오, 부럽네요. 그 정도면 연관도 최상일 것 같은데.
-맞아요. 아마 오늘 전쟁만 이기면, 보상 최소 2배는 펌핑될 듯.
-크으……!
그리고 또 한 가지 재밌는 점은 메인 에픽 퀘스트의 진행에 따라 연계 퀘스트의 구도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유저가 진행 중인 연계 퀘스트가 시나리오의 진행에 따라,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퀘스트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경우 아직 클리어하지 않은 모든 연계 퀘스트가 클리어 처리되며 미수령 보상의 80% 수준이 일괄 지급되니, 이 또한 일반 유저들에게 꿀 같은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발, 찰리스 좀 잡아줘 . 제발……!
-ㅋㅋㅋ윗님 퀘 막히셨음?
-ㅅㅂ 예리하네.
-뭐에서 막혔는데요?
-군단 대대장 잡는 퀘스트요.
-……님, 빡고수임?
-아뇨. 고수가 아니니까 이러고 있죠.
-…….
물론 이안 본인은 이런 사이드 이펙트(?)에 대해 아무런 생각 없이 퀘스트를 진행 중었지만.
어찌 되었든 수많은 유저들의 관심과 염원(?) 속에서 싸우고 있는 셈인 것이다.
-친구랑 같이 다른 퀘스트 하다가 운 좋게 얻어걸렸는데…… 깰 수는 없고 보상은 아까워서, 아직도 포기를 못 했어요. 제 실력으로 깨려면, 최소 반년은 더 존버 해야 할 듯.
-ㅋㅋ대박.
-오늘 정령계가 이기기라도 하면 제대로 떡상하시겠네요.
-뭐, 일단…… 영웅 등급 초월 장비 두 피스는 확정임요.
-미친…… 부럽다…….
-제 세 달 치 월급 그냥 주워 가시겠네요.
-대박…….
-그러니까 제바알……!
그리고 그런 유저들의 염원에 힘입어, 이안이 찰리스를 잡기 위한 마지막 설계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고 있었다.
띠링-!
-대지의 정령왕 트로웰의 고유 능력, ‘대지의 환원’이 발동합니다.
-정령 마력으로 인한 피해를 입은 모든 대상에게, 강력한 대지 속성의 폭발이 일어납니다.
퍼펑-콰아앙-!
-기계 괴수 ‘리그라트’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기계 괴수 ‘토툰’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중략……
-처치된 대상의 생명력이 처치된 숫자에 비례하여 대지의 힘으로 환원됩니다.
-대지의 정령왕 ‘트로웰’의 마법 공격력이, 15분 동안 78%만큼 강화됩니다.
-대지의 정령왕 ‘트로웰’의 물리 공격력이, 15분 동안 78%만큼 강화됩니다.
-대지의 정령왕 ‘트로웰’의 생명력이 15분 동안 43%만큼 증가합니다.
……후략…….
* * *
전장의 판도는 무척이나 팽팽했다.
이안과 정령왕을 위시한 정령계 진영이 몰아붙이는가 싶다가도.
찰리스의 강력한 광역 공격과 군단장들의 위력적인 고유 능력들이 터지면, 다시 또 수많은 정령들이 소멸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정령계를 응원하는 입장에서도, 반대로 기계문명을 응원하는 입장에서도,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
그리고 이렇게 팽팽한 전황이 유지되던 중 정령계에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아, 탐욕의 군단장 타카루트! 타카루트의 고유 능력이 터졌습니다!
-이건 생각도 못 했어요! 결정적인 순간에 광역 침묵이라니요!
카일란에서 ‘침묵’ 상태 이상은, 상태 이상의 지속 시간동안 어떤 고유 능력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 이상은 면역 실드가 아닌 이상, 실드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엘리샤의 실드가 타이밍에 맞춰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안을 비롯한 범위 내의 모든 유저들이 침묵 상태에 빠진 것이다.
-아, 정령계 진영이 제대로 한 방 먹었어요!
-해제 포션이 있는 유저들이라도 빠르게 침묵을 풀어야 해요!
이런 대규모 전장에서 광역 침묵의 위력은 어지간한 광역 공격기보다 크리티컬한 것이었다.
잠깐 동안이라고는 하지만 그사이 한쪽 진영은 고유 능력을 퍼부을 수 있는 데 반해, 다른 한쪽 진영은 손발이 묶여 버리니.
일방적으로 얻어맞기 십상인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이 상황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찰리스의 대반격이 이어졌다.
-이번에야말로……! 모조리 짓밟아 주마!
거대한 발록의 형상을 한 찰리스의 로봇 주변으로, 붉은 열기가 빙글빙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이어서 마치 쇳덩이가 달궈지기라도 하듯.
발록 형태의 철갑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찰리스의 고유 능력, ‘아이언 메타모포시스(Iron metamorphosis)’가 발동합니다.
-아이언 발록(Iron Balrog)의 외형이 진화합니다.
-아이언 발록(Iron Balrog)의 전투력이 강화됩니다.
-아이언 발록의 모든 고유 능력의 티어가 한 단계 상승합니다.
-아이언 물리 공격력이 +30%만큼 강화됩니다.
……후략…….
아이언 메타모포시스라는 그 이름에 어울리게, 붉게 달아오른 발록의 철갑이 꾸물꾸물 변형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찰리스를 태운 발록의 덩치도, 더욱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아……! 찰리스의 발록에게 메타모포시스 능력이 있었던가요.
-완전히 처음 보는 고유 능력입니다!
-메타모포시스가 발동했으니, 이제 연계기가 나올 차례겠지요!
메타모포시스는, 보통 일정 시간 동안 외형이 변형되는 유의 고유 능력에 붙는 수식어이다.
그리고 보통 메타모포시스 수식이 붙은 고유 능력들은 최상위 티어의 고유 능력인 경우가 많았다.
메타모포시스 이후에는 다른 고유 능력들까지 전부 다 진화되는 경우가 많았으니, 다이나믹하게 전투력이 상승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찰리스의 메타모포시스를 지켜보는 모든 유저들과 시청자들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미친! 저 상태로 멸망의 폭발이라도 쓰면……!
-와 씨, 이번에 끝나는 거 아니야?
-아, 안 되는데……!
그리고 해설진과 시청자들의 예상대로.
메타모포시스를 끝낸 찰리스는 곧바로 강력한 공격기를 발동시켰다.
멸망의 폭발보다 파괴력 자체는 조금 떨어지지만, 훨씬 더 넓은 범위를 타격할 수 있는 최강의 광역 기술.
‘멸망의 포화’를 발동시킨 것이다.
-찰리스의 고유 능력, ‘멸망의 포화’가 발동합니다.
콰쾅-콰콰콰쾅-!
발록의 주변으로 번져 나온 시뻘건 기류들이 강렬히 회오리치며, 제각각 붉은 포탄이 되어, 정령계 진영 전체를 타격하기 시작한 것.
퍼펑-퍼퍼펑-!
사실 이 기술은 평소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강력한 위력을 내기 힘든 기술이었다.
범위가 말도 안 되게 넓은 대신, 위력 자체는 평범한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최상급의 정령만 수백 기 이상 모여 있는 지금의 정령계 전력이라면, 충분히 방어 기술로 막아 낼 수 있었을 수준의 위력인 것.
하지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실드! 실드 없어?”
“해제 포션 빨았으면 일단 힐부터 하라고!”
광역 침묵이 터져 일시적으로 거의 모든 고유 능력이 차단된 상황에서 포화가 떨어져 내렸으니, 아무런 대비 없이 고스란히 그 폭발을 전부 받아 내야 했던 것이다.
콰콰쾅-!
그리고 전장의 상부에서 찍은 그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노, 녹는다, 녹아……!
-와 씨, 상급 정령도 살살 녹아 버리네.
-망했다……! 싹 다 죽어 버리겠어!
-이안은 버텨야 하는데……!
고막을 울리는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그에 걸맞은 시뻘겋고 화려한 이펙트가 전장을 뒤덮는다.
거기에 폭발로 인한 연기까지 자욱하게 피어오르자, 전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아, 아무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전장이 온통 폭발의 연기로 뒤덮였어요!
-정령계 진영의 피해량을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찰리스의 주변에 피어올라, 미친 듯이 전장으로 쏟아지는 붉은 폭격들.
찰리스는 거의 10초가 넘도록 계속해서 포화를 쏟아 내었고, 그 포화가 끝나자 일시적으로 전장은 고요해졌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해진 연기 때문에, 순간 거의 모든 교전이 멈춰 버린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꿀꺽-.
해설진의 침 삼키는 소리가, 그대로 시청자들의 귀에 울려 퍼졌다.
순간적으로 전장 전체가 너무도 조용해졌기 때문에, 침 넘기는 소리마저 적나라하게 전파를 타고 울려 퍼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인간 진영을 응원하는 모든 유저들과 팬들의 시선은 화면 속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이안 어디 있지?
-이안 찾으신 분?
-아, 설마 여기서 끝나는 건 아니겠지……?
찰리스에게 크리티컬한 타격을 입은 이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서, 정령계의 진영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자 유저인 한 사람.
‘이안’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것부터 확인해야 했으니 말이었다.
-아, 이 긴 전쟁이 결국 기계문명의 승리로 끝나는 것일까요?!
-역시 찰리스라는 벽은 유저의 힘으로 넘기 힘든 벽이었을까요……?
사실 기계문명이든 정령계 진영이든.
해설진의 입장에서는, 어느 한 곳을 응원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양쪽 모두 수많은 유저들이 포함된 진영이었으니, 어느 한 쪽에서 해설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심리가 항상 그렇듯.
항상 불리한 쪽을 응원하게 되는 것.
하여 이렇게 정령계의 위기 상황이 되자, 해설진마저도 이안을 찾게 되었고.
연기가 흩어지는 동안에도 이안이 나타나지 않자, 아쉬운 목소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안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안이 여기서 아웃되었다면, 이대로 전쟁은 끝이라 봐도 무방하겠지요.
하지만 그런 힘없는 분위기도 잠시.
-잠깐……!
-왜 그러시죠, 하인스 님?
-저기 저쪽 보세요!
-예? 저쪽은 기계문명의 진영……?
이안을 찾던 해설진과 시청자들은, 순간적으로 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저기서 대체 어떻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던 기계문명의 진영 한복판에서, 거대한 청록빛의 그림자가 갑작스레 나타났으니 말이다.
최후의 전쟁이 열리자마자 이안의 손에서 만들어졌던, 트로웰의 강력한 고유 능력이자 이안의 분신, 수호령.
-……!
처음보다 더욱 거대한 몸집으로, 전장에 강림한 권능의 수호령이, 찰리스를 향해 거대한 창을 내려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