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9화 3. 찰리스와의 재회 >
이안을 발견한 찰리스.
그리고 찰리스와 눈이 마주친 이안.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찰리스였다.
-네, 네놈은……!
“오랜만이군, 찰리스.”
하지만 이러한 대화의 전개는, 이안의 의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이안 또한 다른 유저들과 마찬가지로, 에피소드 안에서 캐릭터가 완전히 시스템에 통제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강제 에피소드 진행은 오랜만이네.’
전신을 통제받는 느낌은 썩 유쾌한 것이 아니었지만, 이안은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에피소드가 전개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강제 진행을 여러 번 경험해 보면서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도 했거니와, 지금 이안의 상황 자체가 기분이 나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에피소드상, 정령계의 운명이 이안에게 달려 있으며, 모든 NPC와 유저들이 그를 우러러 보고 있는 상황.
이안이 평소 타인의 관심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조금은 우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네트라의 가호…… 그리고 정령계의 구원자라…….
“무슨 문제라도 있나?”
-출세했군, 꼬마. 역시 그때 네놈을 죽여 버렸어야 했다.
이안을 응시하는 찰리스의 두 눈이 붉은 빛으로 번들거렸다.
기계 발록의 안에 탑승하고 있어 지상의 유저들은 찰리스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그와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한 이안은 분노한 그의 표정을 또렷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찰리스와의 인연도, 정령계의 시작과 끝으로 이어지는군.’
에피소드의 진행을 지켜보던 이안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마 찰리스가 유저였다면, 사사 건건 그의 계획을 방해하는 이안 때문에 속이 썩어 들어갔으리라.
“마치 자비롭게 살려 두기라도 했다는 이야기로 들리는군.”
-……!
“말은 똑바로 하도록, 찰리스. 네놈은 그때 날 ‘안’ 죽인 것이 아니라, ‘못’ 죽인 것이다.”
균열의 안에서 또랑또랑 울려 퍼지는 이안의, 아니, 이안의 AI의 목소리.
그것을 듣던 이안은 어이없는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사가 조금 오그라들기는 했지만, 이안이 찰리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AI가 거의 비슷하게 해 주었으니 말이다.
‘뭐지? 캐릭터의 AI가…… 설마 유저의 성격이나 성향까지도 반영하는 건가?’
설마 그렇게까지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진 인공지능이겠나 싶다가도,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이안 같은 대사를 보여 주는 이안의 AI.
그리고 그 얄미운 대사에, 찰리스는 더욱 분노하기 시작하였다.
찰리스는 낮게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이안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게 정말, 네놈을 죽일 수 있는 힘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물론.”
-어리석은 인간이여……! 그렇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한번, 나의 능력을 경험해 보도록 하라.
“경험이라…….”
-과연 이 찰리스에게 네놈을 죽일 능력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그 알량한 목숨을 담보로 한번 시험해 보도록……!
찰리스의 목소리가 상기되면 상기될수록, 그가 탑승해 있는 발록 형상의 기계 괴수는 점점 더 붉게 달아올랐다.
크르르르-!
당장이라도 사방으로 터져 나갈 듯, 강렬한 붉은 기운을 잉태하는 찰리스의 기계 로봇.
하지만 그런 찰리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심판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과거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척-!
찰리스를 겨눈 이안의 심판 검이 새하얀 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네놈에게 날 죽일 능력 같은 것은 없다, 찰리스.”
-……!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증명해 주도록 하지.”
이안의 대사가 끝나자 이번에는 이안의 검에서 새어 나온 새하얀 빛이 점점 더 커다랗게 이안의 주변을 휘감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파앗-!
이안의 주변을 맴돌던 새하얀 빛과, 찰리스의 앞에 잉태되었던 붉은 기류가, 동시에 사방으로 터져 나가며 화려한 이펙트를 폭발시켰다.
콰아앙-!
그리고 그와 동시에.
띠링-!
전쟁의 발발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모든 유저들의 눈 앞에 주르륵 떠올랐다.
-네트라의 권능과 악신의 권능이 균열의 힘을 잠식합니다.
-두 가지 권능이 상쇄되어, 전장에서 소멸됩니다.
-‘기계 제국의 지도자’ 효과가 90%만큼 감소합니다.
-‘정령의 수호자’ 효과가 90%만큼 감소합니다.
-‘정령계의 구원자’ 에피소드가 종료됩니다.
-전쟁이 시작됩니다.
-모든 움직임이 다시 자유로워집니다.
이어서 가장 먼저 전장을 향해 뛰어든 것은 어느새 아이언의 등에 올라탄 이안이었다.
* * *
네트라의 권능과 악신의 권능이 상쇄되며, 전장에 깔렸던 버프가 다시 크게 효력을 잃었다.
10%가량의 버프가 각각 남아 있기는 했지만, 기존에 비하면 큰 의미 없는 수준인 것.
때문에 방송을 시청하던 몇몇 유저들은, 의아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저럴 거면 굳이 버프를 걸었다 풀었다 하는 이유가 뭐지?”
사실상 전장에 깔린 버프가 의미 없는 수준이 되어 버렸으니, 오로지 연출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 것이다.
그에 더해 단지 연출을 위한 것이라기에는 구체적인 수치와 버프 종류가 너무 다양하였기 때문에, 기획 의도가 뭔지 충분히 의아할 만하였다.
“그러게. 쓸데없이 구체적이네.”
하지만 당연하게도, 카일란의 기획팀이 쓸데없는 공수를 소모했을 리는 없었다.
그 상세한 광역 버프의 수치들과 밸런스가, 단순히 연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만 이렇게 서로 상쇄되며 버프의 효과가 퇴색된 것은, 특수한 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안이 충족시킨 특수한 조건이라는 것은…….
첫째, 엘리샤를 성공적으로 구해 낸 것.
둘째, 네트라의 신뢰를 얻어 낸 것.
바로 이 두 가지라 할 수 있었다.
“경우의 수는 네 가지야.”
화면을 보던 나지찬이 운을 떼자, 그의 옆에 있던 신입 기획자가 귀를 쫑긋 세웠다.
“네 가지요?”
“첫째, 이안이 네트라의 신뢰도 얻지 못하고, 엘리샤를 구해 내지도 못했을 경우.”
“……!”
“둘째, 이안이 네트라의 신뢰는 얻지 못한 상태에서, 엘리샤의 구출에만 성공했을 경우.”
“그리고요?”
“셋째, 이안이 엘리샤 구출 퀘스트에는 실패했지만, 네트라의 신뢰는 얻어 냈을 경우.”
“넷째는 둘 다 충족시킨 지금의 상황이겠네요.”
“그렇지.”
나지찬이 말한 첫 번째 케이스였을 경우, 정령계의 진영에는 네트라의 가호도 정령의 수호자 버프도 없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전장에 악신의 권능이 내렸다면, 버프가 상쇄되기는커녕 어마어마한 디버프가 진영 전체에 결렸을 터.
그리고 두 번째의 경우, 엘리샤의 버프인 정령의 수호자 버프는 있었겠지만, 네트라의 가호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이 상황에서 악신의 권능이 내렸다면, 수호자 버프는 상쇄되어 줄어들지만, 라카토리움 진영에 깔린 ‘기계 제국의 지도자’ 버프는 온전히 유지됐을 것이다.
반대로 세 번째의 경우에서는 수호자 버프가 없고 네트라의 가호만 있었을 테니.
그랬더라면 기계 제국의 지도자 버프를 상쇄시킬 수 있었을지언정, 정령계 진영에는 강력한 디버프가 걸렸을 것이다.
“사실상 이안이 두 조건 중 하나라도 충족시키지 못했더라면…… 전쟁은 기계문명의 승리로 끝났겠군요.”
“그렇지. 애초에 이 에피소드 자체가 인간 진영에 어렵도록 설계되어 있었으니 말이야.”
신입 기획자의 입장에서는, 대격변이 일어나는 지금의 상황이 무척이나 흥미롭고 중요한 상황이었다.
카일란의 에피소드들이 어떤 식으로 기획되어 있는지 체감으로 배울 수 있는 확실한 기회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팀장님. 이안이 진행한 엘리샤 퀘스트가 최후의 전쟁 에피소드의 트리거라 하지 않으셨나요?”
“그랬지.”
“그럼 이안이 퀘스트를 실패했다면, 이 상황이 벌어지지도 않았겠네요?”
“그건 아니야.”
“어째서요?”
“이안이 퀘스트를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퀘스트가 종료되는 시점 자체가 트리거였으니까.”
“아……!”
만약 이 제단의 가디언 다카타루스를 처치하고 엘리샤를 구해 내지 못했다 해도.
이안이 퀘스트에 실패한 것을 트리거로, 새 에피소드가 발동되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네트라의 가호와 엘리샤, 그리고 이안조차도 없이 이렇게 같은 상황이 펼쳐졌을 테니, 정령계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진짜 메인 에피소드들은…… 엄청 복잡하고 촘촘하게 짜여 있는 거로군요.”
“그러니까 우리가 매번 야근을 하는 것 아니겠어?”
“사람을 더 뽑으면 안 되나요, 팀장님? 대표님이 TO를 안 주시나요?”
“그건 아니야.”
“엇……?”
“사람이 부족하다는 요청은, 우리 회사에선 거의 들어주는 편이니 말이야.”
“그럼 왜 안 뽑는 건가요?”
“사람을 더 뽑으면 야근을 안 할 것 같지?”
“네……?”
“내가 이 회사 몇 년 다니면서 느낀 건데, 사람을 뽑으면 귀신같이 일이 더 많아지더라고.”
“…….”
“정말 미스터리한 일이지.”
“그런…….”
“사실 새로 가르치는 것도, 꽤나 큰일이고 말이야.”
신입 기획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스크린을 응시하던 나지찬은, 대화를 멈추고 다시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지금 스크린을 보는 그는, 어떤 사고(?)가 터질지 긴장하며 모니터링하는 기획자의 표정이 아니었다.
‘후후, 이제, 정령왕의 진정한 위력을 볼 수 있으려나?’
이안이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모든 조건을 충족시킨 이상, 이미 이 전쟁의 결과는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으니 말이다.
‘차라리 이런 상황에서 지켜보는 게, 마음 편하다는 말이지.’
일반 유저들이나 카일란 팬들이 전쟁의 승패를 예측하기 어려운 이유는, 찰리스와 정령왕의 구체적인 스펙을 알지 못해서이다.
콘텐츠의 성격상, 유저만큼이나 NPC의 전투력이 결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니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기획에 가장 깊숙이 참여한 기획자인 나지찬은 모든 세부 스펙을 빠짐없이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그가 분석한 바로, 이 전쟁은 정령계의 승리로 끝날 확률이 무척이나 높았다.
‘이안과 정령왕의 시너지…… 이게 너무 사기적이란 말이지. 출시하기 전에, 엘리샤를 좀 너프했어야 했어.’
잠시 기획자의 시선에서 생각하던 나지찬은 고개를 휙휙 저으며 스크린에 다시 집중하였다.
지금 그가 모니터링실에 앉은 이유는 기획 분석을 핑계로 이안의 전쟁 영상을 즐기기 위함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안이 기계문명의 진영에 뛰어든 순간부터, 나지찬의 표정은 점점 더 상기될 수밖에 없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안의 플레이가, 그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하기 시작하였으니 말이다.
* * *
미국 서버의 톱 플레이어이자, 최상위권 길드인 ‘크리쳐’ 길드의 랭커 릴리스.
차원 전쟁이 열린 첫날부터 이 전장에 참여했던 그녀는, 거의 한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오늘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후우, 드디어……!’
칼데라스를 비롯한 상위권 마족 진영 길드들이 명계 콘텐츠에 주력하고 있을 때, ‘틈새시장’이었던 기계문명의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준비해 왔던 두 곳의 길드가, 바로 크리쳐 길드와 다크블러드 길드였다.
하지만 기사 대전이 열리기 직전, 이안으로부터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다크블러드 길드는 다른 차원계로 중간계 공략을 선회하였고, 덕분에 이제 라카토리움에 남은 마계 진영의 랭커 길드들 중, 가장 진행도가 높은 길드가 바로 크리쳐 길드였다.
그리고 진행도가 높다는 이야기는, 메인 에피소드인 이 차원 전쟁에서 가져갈 콩고물(?)이 가장 많다는 이야기.
‘아무리 이안이라 해도, 이 전쟁은 무조건 이겨야만 해.’
특히 찰리스에게 직접 퀘스트를 받을 정도로 콘텐츠 진행도가 높은 릴리스는, 전쟁의 승리에도 어느 정도 확신을 갖고 있는 상태였다.
찰리스가 가진 진정한 힘을 그녀만큼 잘 알고 있는 유저는 없었으니 말이었다.
‘정령왕이 분명히 강력하긴 하지만, 찰리스의 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릴리스는 전장에서 싸우며, 이미 트로웰의 전투력을 여러 번 경험해 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 새로운 정령왕 엘리샤가 합류하였다 하더라도 찰리스를 이겨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모든 사대 정령왕이 전부 나타나는 게 아니라면, 이 전쟁은 질 수가 없어.’
그 때문에 새로운 에피소드가 열린 이 시점, 그녀의 기대는 점점 더 증폭되고 있었다.
전쟁의 승리에 마지막 변수나 다름없는 저 ‘이안’만 성공적으로 저지한다면, 지금껏 쌓아 온 막대한 전쟁 공헌도가 어마어마한 보상이 되어 돌아올 테니 말이었다.
‘이안의 전투력이 유저 중 최강인 건 사실이지만…… 정령왕 둘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 정도는 아닐 거야.’
하지만 에피소드가 열리고 본격적으로 이안과 찰리스가 맞붙은 순간, 릴리스는 자신이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
단순히 두 정령왕에 ‘이안’이라는 전력이 추가된 것이 아니라, ‘이안’이라는 톱 플레이어가 트로웰과 엘리샤를 얻은 형국이라는 것을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