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8화 2. 정령계의 구원자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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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의 차원계들을 이어 주는 통로인 ‘균열’은 지금까지 밝혀진 곳만 해도 거의 열 곳에 달한다.
하지만 같은 균열이라는 이름을 가진 필드라 해도, 분위기와 환경만 같을 뿐, 필드의 형태와 구조는 전부 제각각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처음 이안이 용천에서 발견했던 엘라시움으로 이어지는 균열의 경우, 하방으로 깊게 떨어져 내리는 수직 형태의 좁고 기다란 맵이었다면.
지금 정령계와 라카토리움 간의 최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 균열은 우선 수평으로 이어진 구조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입구만 좁을 뿐 중심부에 도달할수록 넓어지는, 거대한 어둠의 벌판 같은 느낌의 필드였으니, ‘통로’의 느낌은 확실히 아닌 것이다.
그리고 유저들은 이 또한 카일란 기획팀의 기획 의도임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정령계와 기계문명.
각 진영의 대군(大軍)이 제대로 맞붙기 위해서는 필드가 이 정도의 넓이는 되어야 했으니까.
-라카토리움의 지도자, ‘찰리스’가 전장에 합류합니다.
-‘기계제국의 지도자’ 효과가 전장에 부여됩니다.
-‘기계’타입을 가진 모든 대상의 물리, 마법 방어력이 30%만큼 증가합니다.
-‘기계’타입을 가진 모든 대상의 이동속도가 15%만큼 증가합니다.
-‘기계’타입을 가진 모든 대상의 마력이 20%만큼 증폭됩니다.
사실상 기계문명의 대부(大夫)나 다름없는 존재인 찰리스.
찰리스가 등장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필드에 있던 모든 유저들의 눈앞에 글로벌 메시지가 떠오르며, 모든 기계 괴수들의 주변으로 버프 효과가 빠르게 생성된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인간 진영의 유저들은 기겁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친! 버프를 무슨……?”
“하,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 죽겠는데. 시부럴!”
하지만 불평불만도 잠시, 랭커들은 곧바로 찰리스를 찾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 전장에서 가장 강력한 적이 바로 그일 것이었기에.
어디서 어떻게 등장하는지 확인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랭커들과 마찬가지로, 전장을 중개하던 캐스터들도 분주히 옵저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찰리스! 찰리스가 등장했습니다, 여러분!
-파괴의 군단장 피켄로는 기계 드래곤과 함께 등장했는데…… 찰리스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요, 하인스 님?
-글쎄요. 예상이 무척 힘들군요.
-그런가요?
-지금껏 찰리스는 전장에 등장할 때마다, 항상 다른 기계로봇을 타고 나타났으니 말입니다.
-아, 하인스 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확실히 그랬던 것 같군요!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에도 위압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이죠.
-앗, 하인스 님! 저쪽으로……! 깊은 어둠 속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납니다!
쿵- 쿵-!
균열 전체가 울릴 정도로 크게 울려 퍼지는 육중한 소리에, 유저들의 시선이 전부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그것은 비단, 적진의 유저인 인간 유저들뿐만이 아니었다.
마계 진영의 유저들도 찰리스가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 무척이나 궁금했으니, 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을 향해 시선을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유저들의 그 관심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어둠 속에서 찰리스의 위용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아아! 저 거대한 톱날 같은 팔은 뭐죠?
-아무래도 이족 보행형 로봇인 것 같은데, 아직은 정확한 형태가 보이질 않는군요!
-발록! 발록입니다!
-네? 발록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루시아 님! 저 거대한 뿔. 그리고 날카로운 돌기들……!
-우와앗!
-발록의 형상을 한 거대한 기계 괴수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팔목부터 팔꿈치까지 이어진, 날카로운 톱날을 닮은 돌기부터 시작해서, 온몸을 뒤덮은 뾰족한 장식과, 머리에 위협적으로 굽이치며 솟은 거대한 뿔까지.
누가 봐도 발록의 모습을 한 찰리스의 로봇은,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뿜어 대며 전장에 합류하였다.
크륵- 크르르르르-!
하지만 전장에 나타난 찰리스의 첫 번째 대사는 이곳 균열 안에 있던 그 누구도 곧바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하인스와 루시아처럼, LB사로부터 일부 정보를 받은 해설진들까지도 말이다.
-감히……! 성스러운 기계 제단을 파괴하다니.
“뭐? 기계 제단?”
“그게 뭐지?”
찰리스가 언급한 기계 제단은 이안 외에는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숨겨진 장소였고, 그것은 마족 진영의 유저라 하더라도 다를 것 없었으니.
아무도 찰리스의 대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다만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닌 하인스만이 어느 정도 그 정체에 대해 비슷하게 유추해 볼 수 있었다.
-기계 제단이라는 게 대체 뭘까요, 하인스 님?
-글쎄요. 아마 메인 에피소드와 관련된, 어떤 서브 콘텐츠 아니었을까요?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 자리에 없는 다른 인간 진영의 유저가 메인 에피소드와 관련된 트리거를 당겼을지도 모르고요.
-만약 하인스 님의 말이 맞다면, 그 유저는 높은 확률로 이안이겠군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루시아와 하인스의 해설은 전장에 직접 접속해 있는 플레이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다.
하지만 그들의 해설이 아니더라도 유저들은 이런저런 추측을 시작했고, 때문에 전장은 웅성일 수밖에 없었다.
“기계 제단을 파괴했다고?”
“정령계의 신단 같은 건가?”
그리고 그런 웅성임을 전부 잠식할 만큼 커다란 찰리스의 목소리가, 다시 전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크르르르-!
-이곳에서 다시, 그대들의 힘을 거둬 가겠노라.
이어서 이번에는, 트로웰이 전장에 나타나며 그 목소리에 대답하였다.
-재밌군, 재밌어.
-……!
-제단이 파괴되었다면, 엘리샤가 곧 돌아오겠군.
-트로웰, 네놈 짓이 아니었단 말인가!
-내가 해낸 일은 아니나, 누가 한 일인지는 짐작이 가는군.
-그게 무슨……!
-이제 곧 엘리샤와 함께, 정령계의 구원자께서 이 전장에 도착하실 것이다.
간결하지만 명확하게 이어지는 찰리스와 트로웰의 대화.
이 목소리는 전장의 모든 유저들의 귓전에 또렷이 울려 퍼졌고, 이쯤 되자 하인스뿐 아니라 일반 랭커들도, 이것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안…… 이안이로군.”
“역시, 이안이었어.”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이안이 돌아오는 건가?”
찰리스의 등장과 함께 전장에 깔린 강력한 기계 타입의 버프.
그 때문에 위축되어 있던 인간 진영에는,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물론 찰리스가 전장에 만들어 낸 버프가 위협적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지만, 시나리오의 구도상 곧 인간계의 진영에도 그에 버금가는 강력한 버프가 씌워질 것임을 느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균열의 한편에 새파란 빛이 일렁이기 시작하였다.
고오오오-!
찰리스가 등장할 때만큼 요란하지는 않았지만, 그 못지않게 화려하고 강렬한 기운을 회오리치듯 내뿜으며 전장에 나타난 일단의 무리들.
그들을 발견한 트로웰은 감격에 겨운 탄성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엘리샤……!
같은 정령왕이라는 사실과 별개로 엘리샤는 트로웰에게 피를 나눈 혈육과도 같은 존재였고, 억겁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녀를 다시 조우한 것이었으니, 묵은 감정이 벅차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트로웰이 엘리샤의 등장에 감격했다면, 일반 유저들은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이안! 이안이 나타났습니다!
-역시 전장의 급작스런 전개를 만들어 낸 장본인은 이안이었어요!
-아앗……! 이안뿐이 아닙니다! 유저가 하나 더 있었어요!
-미국 서버의 랭커 조나단입니다!
-오오……! 조나단이라니!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이군요!
유저들 또한 정령왕이 시나리오에서 얼마나 중요한 NPC인지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들의 관심은 같은 유저에게 포커싱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모든 유저들의 관심은 이안과 조나단에게 몰린 것이다.
특히 ‘조나단’의 등장은 유저들에게 무척이나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사실 이안이야 어느 정도 예상된 인물이었지만, 조나단은 랭킹과 능력치에 비해 한동안 잊힌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물의 정령왕, ‘엘리샤’가 전장에 합류합니다.
-‘정령의 수호자’ 효과가 전장에 부여됩니다.
-‘정령’타입을 가진 모든 대상의 생명력, 생명력 재생 효과가 만큼 증가합니다.
-‘정령’타입을 가진 모든 대상의 마력 회복 속도가 15%만큼 증가합니다.
-‘정령’타입을 가진 모든 대상의 스킬 공격력이 17%만큼 증폭됩니다.
……후략…….
엘리샤의 등장과 함께, 정령계의 진영에도 수많은 버프가 부여되기 시작하였다.
웅- 우우웅-!
버프의 종류는 달랐지만, 밸런스를 생각하면 거의 비슷한 수준의 버프가 부여된 것.
강력한 버프들은 전장을 더욱 화려하게 만들 것이고, 때문에 방송을 시청하던 팬들은 더욱 몰입하기 시작하였다.
두 정령왕과 찰리스의 싸움.
그리고 이안이 합류한 인간계 유저들과 마족 유저들의 전투.
어느 것 하나 기대되지 않는 요소가 없었으니 말이다.
“크, 오늘은 배팅이 없어서 아쉽네.”
“아무래도 갑자기 열린 이벤트니까.”
물론 이안이 합류한 이상, 유저 밸런스는 마족 진영이 훨씬 불리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이안이 카이조차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유저라는 사실도 한몫했지만.
기계문명에 대한 마족 진영 유저들의 진행도보다 정령계에 대한 인간 진영 유저들의 진행도가 더 높은 편이었고.
때문에 명계와 엘라시움 쪽에 더 많이 몰려 있는 마족 랭커들과 달리, 인간 진영의 랭커들은 정령계 콘텐츠에 가장 많이 모여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저 진영의 밸런스가 인간 진영 쪽으로 기울어 졌다면, 아직도 NPC들의 전투 밸런스는 기계문명 쪽에 더 무게가 실려 있었으니.
전장의 승패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찰리스, 오늘이야말로 만악의 근원인 네놈을 처단하고, 정령계의 영원한 평화를 찾아가겠노라……!
-건방지군, 트로웰. 지난 세월 동안 그리 겪었으면서,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는가!
-그대야말로 지난 세월의 영광에 매몰되었군요. 찰리스.
-뭣이?
-오늘은 다를 겁니다.
-……!
-정령계의 구원자와, 네트라 님의 가호가…… 처음으로 이 전장에 도래한 날이니까요.
엘리샤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진 직후, 유저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우웅-!
에피소드가 진행됨에 따라, 모든 유저들의 움직임이 강제로 통제되었으니 말이다.
-‘정령계의 구원자’가 전장에 강림합니다.
-해당 에피소드 모드가 끝날 때까지, 움직임이 제한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당황도 잠시.
우우우웅-!
움직임을 멈춘 유저들의 시선은 전부 허공을 향해 고정되었다.
-정령계의 구원자여, 전장을 승리로 이끄소서.
이어진 엘리샤의 대사와 함께, 황금빛 광휘에 휩싸인 한 남자의 신형이 천천히 전장 위로 내려앉았으니 말이었다.
척-!
커다란 세 자루의 심판 검을 양 어깨에 메고 있는 남자.
그의 정체는 당연히, 이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