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6화 2. 정령계의 구원자 >
정령계와 라카토리움 간의 차원 전쟁은 그것을 관전하는 카일란 유저들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만들 정도로 긴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날은 순식간에 정령계가 무너질 것처럼 기계문명과 마족 유저들이 공격을 몰아치다가도.
결국엔 최후의 방어선에서 정령계가 버텨 내며, 제법 강력한 역공을 펼치기도 했으니 말이다.
물론 이제 거의 모든 균열이 함락당하고 남은 곳은 프뉴마 마을의 앞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하나의 균열뿐이었지만.
그 마지막 균열 안에서, 벌써 사흘째 치열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전장의 구도가 흥미진진하게 연출될 수 있었던 데에는, 차원 전쟁 콘텐츠의 특별한 ‘룰’이 한몫하였다.
“제기랄, 오늘도 여길 못 넘고 돌아가다니.”
“아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았는데.”
“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내일은 기필코……!”
차원 전쟁 콘텐츠는 유저에게 24시간 개방되어 있지 않았다.
각 나라를 기준으로 아침 7시에서 저녁 11시라는, 참전 가능 시간이 룰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룰 때문에 나라별 참전 가능한 시간이 시차에 따라 제각각 달라졌고, 그것은 전투가 가장 치열한 ‘시간대’를 자연스레 형성되도록 만들었다.
가장 강력한 국가의 랭커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시간대.
거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 서버와 미국 서버에서도 동시에 접속이 가능한 시간대가, 자연스레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시점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국 서버의 시간을 기준으로, 대략 오전과 오후 각각 8시 ~ 11시경.
이 시간대가 바로 차원 전쟁의 피크 타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아오, 저 질긴 인간 진영 녀석들.”
“정령왕 스킬이 너무 사기인 것 같은데. 저놈만 아니었으면 벌써 사흘 전엔 뚫었을 거라고.”
피크 타임이 끝나는 무렵이면, 양 진영에서는 각각 아쉬움. 그리고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후유, 오늘도 겨우 버텼네.”
“와, 진짜. 오늘은 밀리는 줄 알았는데…….”
처음에는 분명 이러한 전장의 구도가, 유저들에게 무척이나 재밌고 신선하게 다가왔었다.
아슬하게 물고 물리며 균형이 유지되는 전장과, 그로 인해 연출되는 극적인 전투 장면들.
이것은 참전하는 유저들뿐 아니라 관전 모드인 대부분의 팬들에게, 너무 즐거운 요소들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이러한 같은 구도가 며칠 동안 계속되자, 슬슬 유저들은 새로운 에피소드에 대한 갈증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뭐야, 오늘도 이대로 끝나는 거임?
-하, 마족 랭커들은 대체 왜 저 마지막 방어선을 못 넘는 거지?
-그러게. 이안도 없는데 대체 왜 이렇게 지지부진한 거야.
-이거 이런 식이면, 한 달은 더 싸울지도 모르겠는걸?
관전하는 팬들의 입장에서도 슬슬 따분해지기 시작했으며, 직접 참전하는 유저들은 아예 피가 마르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쌓이는 보상은 많아지는데, 승패에 따라 그 보상을 얼마만큼 가져갈 수 있을지가 결정되니.
유저 입장에서 초조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하지만 유저들의 그런 갈증과 불만은, 제대로 형성되기도 전에 사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 시간으로 오후 5시경.
피크 타임도 아닌 이 애매한(?) 시간에, 갑자기 전장에 대격변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니 말이었다.
띠링-!
그리고 그 시작은, 중간계에 접속해 있던 모든 유저들의 눈앞에 떠오른 한 줄의 글로벌 메시지였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뭐지?”
“뭐야, 글로벌 메시지잖아?”
-기계 제단의 붕괴로 인해, 찰리스가 분노합니다.
-찰리스의 모든 군단이 차원 전장에 합류합니다.
“……?”
“미친! 갑자기 이게 무슨……!”
“뭐야, 지금 피크 타임도 아니잖아?”
“미국 서버 애들은, 전부 다 자고 있을 시간인데?”
갑작스레 중간계 유저들에게 떠오른 보랏빛의 글로벌 메시지에, 전 세계 카일란 커뮤니티가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물의 정령왕 ‘엘리샤’가 오랜 봉인에서 해제되었습니다.
-정령계의 심처에 잠들어 있던, 물의 부족들이 모두 깨어납니다.
-잠시 후, 정령계 진영에 새로운 원군이 합류할 것입니다.
“에, 에피소드가 진행되나 봐!”
“뭐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그러게, 갑자기 진행될 이유가 대체……?”
유저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이벤트에 당황하면서도,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무척이나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 전쟁 중인 피크 타임이면 모르되, 지금은 차원 전쟁이 소강상태나 다름없는 평범한 시간대였고.
갑자기 에피소드가 진행될 이유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으니 말이었다.
-‘최후의 전쟁’ 에피소드가 시작되었습니다.
-차원 전쟁의 참전 시간제한이 해제됩니다.
-이제부터, 지금까지 차원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유저의 추가 참전이 제한됩니다.
……후략……
하지만 유저들의 혼란은 그렇게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워낙 갑작스러워서 잠시 혼란스러웠던 것일 뿐, 에피소드에 새로운 페이즈가 시작된 이유를 금세 깨달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님들, 이거 혹시 이안 때문 아님?
-이안? 갑자기 이안은 왜.
-생각해 보세요. 지금 시간도 한국 시간으로 오후 5시경이에요. 퀘스트 진행하기 제일 좋은 시간대인 거죠.
-그건 좀 억지…….
-하지만 이안 때문이라는 의견이 충분히 일리는 있음.
-맞아요. 생각해 보니, 이안이 어떤 관련 퀘스트를 진행 중이라고 했었는데…….
-역시! 트리거는 이안이었어!
최근 공식적인 콘텐츠에 등장하지 않아서 잠시 유저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긴 했지만, 그래도 평범한 랭커와는 존재감 자체가 다른 존재가 이안이었고.
지금 이안이 정령계 메인 에피소드 관련 퀘스트를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많은 유저들이 알고 있었으니.
새롭게 시작된 에피소드의 트리거가 이안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크, 드디어 이안갓의 참전을 볼 수 있는 건가?
-잘 버텼다, 정령계……! 이제 역전의 시간이야.
-웃기는 소리. 이안이 참전한다 해도, 어차피 크게 달라질 게 없음.
-왜?
-아까 메시지 못 봄? 찰리스의 군단도 본격적으로 참전한다잖음.
-흐음…….
-아마 찰리스가 못해도 정령왕급 이상일 텐데, 이안이라 해도 별수 있을까?
-정령왕도 생각해야죠, 님.
-정령왕요?
-그 물의 정령왕 엘리샤의 봉인도 풀렸다니까, 정령계 진영도 정령왕이 둘로 늘어나는 거잖아요?
-아, 그렇긴 하네요.
그리고 글로벌 월드 메시지가 떠오르고 나자, 차원 전쟁에 참전 중이었던 전 세계 랭커들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국이나 유럽 기준으로는 새벽 시간이었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어쨌든 한국 유저인 이안에 의해 새로운 에피소드가 시작되었고, 전장에 걸려 있던 시간 제약도 완전히 풀렸으니.
이제 최후의 전투에 참전하기 위해, 전력투구해야 될 시간인 것이다.
수많은 랭커들이 마치 대기하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전장에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었고.
카일란 관련 각종 커뮤니티들은 더욱 빠르게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게임 BJ들은 왜 이렇게 게을러터진 거냐. 아직까지 방송 켠 놈이 몇 없잖아?
-님, 고작 10분 지났다고요, 지금. 방송 세팅하기도 부족한 시간이에요.
-한국 서버 커뮤니티에는 무슨 정보 없음? 이안 관련 정보들 좀 수집하고 싶은데.
이어서 이렇게,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을 무렵.
카일란의 공식 커뮤니티 메인 페이지에, 이 분위기에 불을 지피는 한 줄의 기사가 게재되었다.
마치 이 상황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말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수많은 카일란 팬들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PM 6:00 ~ 9:00 (한국 시간 기준), ‘최후의 차원 전쟁’ 영상, 10개 게임 방송사 특별 편성!
LB사에서 공식적으로 지원하는 차원 전쟁 관련 에피소드 영상이, 국내 모든 메이저 게임 방송사의 방영 스케줄에 특별편성된 것.
게다가 시간대 또한 퇴근 시간부터 이어지는 황금 시간대였기 때문에, 직장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퇴근을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크, 대박……! 오늘은 치맥이다!
-아, 오늘 야근인데. 그냥 튀어야 하나…….
-그러다 잘리지 말고, 화장실에서 몰래 보셈.
-…….
그리고 이렇게, 카일란의 분위기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이 시점.
이 모든 상황의 시발점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이안은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 * *
다카타루스를 성공적으로 처치한 이안은 곧바로 균열의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전장의 모든 구조물이 완벽히 붕괴되면서, 지하의 벽면에 커다란 균열의 입구가 드러난 것이다.
지금껏 이안이 경험해 왔던 여느 균열들과 마찬가지로, 어두컴컴하고 음습한 분위기를 띈 차원의 균열.
이안은 그 안에서 푸르게 빛나는 빛줄기를 찾아낼 수 있었고.
그 빛의 줄기가 바로 봉인에서 풀려난 ‘엘리샤’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드, 드디어 끝이야!’
하여 이안은 그 푸른 빛줄기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균열 어디에서도 기계 괴수들의 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안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물론 다카타루스마저 처치한 마당에 어떤 방해꾼이 있다 하더라도, 무서울 것 하나 없었고 말이다.
그리고 푸른 빛줄기에 가까워지자, 이안은 엘리샤의 아름다운 자태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눈을 감은 채 허공에 둥둥 떠 있는, 푸른 빛깔의 고귀한 자태를 가진 여인.
이안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엘리샤……!’
하지만 다음 순간.
우우웅-!
그의 손이 엘리샤에게 닿기 직전, 또 다른 새하얀 빛줄기가 이안의 앞을 가로막고 나타났다.
“어엇!”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존재를 확인한 이안은,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 당신은……!”
-오랜만이군요, 이안.
엘리샤 못지않게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낯익은 여인.
그녀의 정체는 바로, 정령의 신 네트라였으니 말이다.
“야근, 아니 정령의 신 네트라 님!”
-역시, 당신이었군요.
“네? 뭐가요?”
-정령계의 구원자가 될, 최초의 중간자…….
“……!”
-진리에 도달한 당신이 아니라면, 이러한 중책을 맡을 이가 또 있을 리 없었겠지요.
네트라의 등장에 이안은 멀뚱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안이 생각하기에 지금 이 시점, 네트라가 등장할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 말이었다.
“전 네트라 님께 민원을 넣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안의 말에, 네트라가 빙긋 웃으며 대답하였다.
-물론이에요. 저는 이안 님의 민원 때문에 이곳에 나타난 것이 아니니까요.
“그럼요?”
-다만 정령왕 엘리샤의 강렬한 의념이, 저를 이곳에 나타나도록 만들었답니다.
억겁의 시간이 넘도록 이 지하의 균열에 봉인되어있던 정령왕 엘리샤의 영혼.
사실 이 강력한 봉인을 해제하는 것은, 이안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찰리스는 악신과의 계약을 통해, 그녀의 영혼을 이 균열 안에 봉인하였지요.
“그, 그랬군요.”
-때문에 그녀의 봉인을 찾았다 한들, 당신의 힘만으로 악신의 봉인을 해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
-하지만 당신이 쇳덩이 안에 숨겨진 균열의 입구를 찾아내었고, 하여 엘리샤의 의념이 나의 귓가에 닿을 수 있었어요.
“그렇군요.”
다만 정령왕 엘리샤의 의념이 정령의 신 네트라를 불러내었고.
악신과 동격(同格)인 네트라의 힘이라면, 엘리샤의 봉인을 풀어내는 데 충분한 열쇠라고 할 수 있었다.
-이안, 진리에 도달한 자여.
“……!”
-나 네트라의 권능으로, 그대에게 자격을 부여하겠습니다.
“자격……요?”
이안의 앞에 선 네트라는 진중한 표정이 되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 정령계의 구원자가 되어, 위기에 빠진 정령계를 구원해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