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0화 7. 뜻밖의 만남 (2) >
* * *
처음 엘리샤의 안내를 따라 이 ‘데브라 언덕’꼭대기에 도달했을 때, 엘리샤는 무간옥의 바닥을 밟는 시점부터가 본격적인 ‘지옥’의 시작이라고 경고하였다.
‘무간옥의 바닥을 지저갱이라 했었고, 여기부터가 진짜 지옥이라 했었지.’
그리고 그 경고는 단순히 이안을 겁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이 지저갱의 간수들이 얼마나 위협적이고 강력한지는 엘리샤만큼 잘 아는 인물도 없었으니 말이었다.
물론 일반 간수들이 간수장인 ‘카그루스’만큼 강력하지는 않겠지만, 혼자인 카그루스와 달리 지저갱의 간수들은 여럿이었으니.
상대적인 난이도를 놓고 봤을 땐, 다수의 간수들을 상대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설명을 엘리샤로부터 들은 이안은 최대한 보수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카카, 부탁할게.”
“알겠다, 주인. 나만 믿어라.”
포롱- 포롱-!
항상 이안의 파티에서 훌륭한 정찰 역할을 수행해 주는 카카를 앞세워, 아주 천천히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저갱의 구조를 알고 있는 엘리샤 덕에, 지하에서 길을 찾는다고 헤매지는 않아도 된다는 점.
그리고 만만의 대비를 한 덕인지, 갱도의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튀어나오는 간수들을 이안 일행은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다.
“조나단, 왼쪽을 맡아 줘!”
“알겠다.”
콰콰쾅-!
평범한 간수들의 레벨도 전부 초월 150레벨 이상이었으나, 엘리샤의 고유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피해 누적을 최소화시키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저갱에서 대략 20분 정도를 움직인 이안은, 이 필드의 구조가 어떤 식으로 되어있는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복도 양쪽에 감옥이 각각 세 개씩 등장할 때마다, 새로운 간수들이 필드에 나타나는군.’
한 번에 등장하는 지저갱의 간수는 보통 3~5명 정도였다.
구역별로 셋의 간수가 지키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몇 개의 구역을 총괄하는 간부급 간수와, 열 개 단위의 구역을 총괄하는 네임드급 간수가 추가로 존재하는 구조인 것이다.
그리고 엘리샤가 ‘지옥’이라고 표현했던 난이도는, 간부 급 간수에 네임드급 간수까지 한 번에 등장하는 페이즈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네임드급 간수의 경우, 간수장인 카그로스와 비교해도 맷집을 제외하고는 전혀 꿇리는 게 없을 정도의 강력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가시적으로 확인 가능한 초월 레벨 또한, 카그로스와 다를 것 없는 170레벨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안의 예상 범위 밖을 벗어나는 수준의 난이도는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콰앙-!
-지저갱의 간수 ‘토트라쿤’을 처치하였습니다!
-네임드 NPC를 처치하였습니다!
-명성(초월)이 1,000만큼 증가합니다!
-‘라카토리움의 강철 메달’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후략……
“읏차, 이번에도 깔끔하고……!”
“마지막엔 조금 위험했어, 이안.”
“위험하긴. 아직 드라고닉 베리어도 안 썼는데.”
“그게 뭔데?”
“좀 더 위험해지면 알게 될 거야.”
“…….”
오히려 네임드 간수들을 하나씩 처치할 때마다, 이안은 싱글벙글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전투가 조금 힘들기는 해도, 보상이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하나 처치할 때마다 무려 1,000이나 되는 초월 명성을 획득하는 데다, 경매장에서 차원코인으로 비싸게 팔리는 라카토리움의 메달 아이템도 하나씩 꼬박꼬박 드롭되고.
무엇보다 가장 고무적인 것은 그렇게도 오르지 않던 경험치 게이지가, 네임드 한 놈 처치할 때마다 무려 3% 가까이 차올랐으니 말이었다.
심지어는 퀘스트고 나발이고, 이 지저갱에 며칠 눌러앉고 싶을 수준!
‘그냥 여기서 파밍 좀 더 하면 안 되나? 엘리샤 좀 늦게 구하러 가도 될 것 같은데…….’
물론 이안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 꿈에도 모르는 엘리샤는 연신 감탄하고 있었지만 말이었다.
-지저갱의 간수들을 이렇게 쉽게 처치하다니…….
“쉽게라뇨. 지금 탈진 직전인 거 안 보입니까, 정령왕 누님.”
조나단의 투덜거림에 엘리샤가 빙긋 웃으며 대답하였다.
-지저갱의 간수들은 찰리스 학파에서도 최상급 전투 요원들이에요.
“크흠.”
-이안 님도, 조나단 님도. 지금까지 제가 만난 어떤 중간자보다도 강력하시네요.
“하, 하핫. 그거야 물론…….”
엘리샤의 칭찬에 힘이 났는지, 퀭하던 표정이 다시 살아난 조나단.
그리고 그런 둘의 사이에서 머릿속으로 퀘스트의 가치를 저울질하던 이안은 결국 노가다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쩝. 그래도 퀘스트를 빨리 진행하는 게 옳겠지.’
무한 체력(?)의 이안과 달리 조나단은 슬슬 지치고 있었으며, 조나단 없이 이안 혼자서는 이 정도의 사냥 효율이 나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메인 스토리가 걸려 있는 에픽 퀘스트의 가치는 경험치나 재화 따위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여 이안은 지쳐 앉아 있는 조나단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 정비했으면, 이제 다음 구역으로 이동하자고.”
“조금만 더 쉬면 안 되냐?”
“빨리 끝내고 쭉 쉬는 편이 낫지 않을까, 친구?”
“휴우, 알겠다.”
조나단은 점점 체력이 고갈되는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적극적이었다.
이안에게서 받기로 한 보상(?)을 떠나, 네임드 간수들을 처치할 때마다 획득하는 전리품들은 그에게도 무척이나 매력적인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여 체력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공략 방식이 더 체계적이고 정교해진 탓인지, 이안 일행의 이동속도는 오히려 조금씩 빨라졌다.
-자, 이제 여기만 넘어가면 마지막 구역이에요.
“드디어…… 끝이 보이는군요.”
-아마 이쪽 구역은 ‘케르퍼’라는 간수가 지키고 있을 거예요. 거대한 두 개의 사슬낫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녀석이죠.
“거대한 사슬낫이라…….”
“거리만 좁힐 수 있으면 어렵지 않겠군.”
엘리샤가 처음에 알려 줬던 최종 좌표가 드디어 미니 맵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케르퍼를 처치한 뒤에는, 조금 쉬면서 정비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마지막 구역에는 특별한 기계 괴물이라도 있는 건가요?”
-비슷해요, 이안 님. 카그루스보다 더 강력한 녀석이, 아마 제가 봉인된 ‘기계 제단’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요.
엘리샤의 설명을 들은 이안은 미니 맵을 확대하여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대충 어떤 식으로 전투가 흘러갈지,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케르퍼 라는 놈만 처치하면, 미니 맵 상단에 표시된 좁은 통로가 열릴 테고…… 여길 통과하면 이제 마지막 페이즈일 것 같은데…….’
엘리샤가 이야기한 마지막 구역은 지금까지 이안 일행이 지나온 지저갱의 구조와는 확실히 다른 형태였다.
좁은 복도 양쪽으로 감옥들이 쭉 나열되어 있던 것이 지금까지 지저갱의 구조였다면.
엘리샤의 본체가 봉인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마지막 구역은 미니 맵상 정육각형의 거대한 형태로 보였으니 말이었다.
거기에 육각형의 외곽 쪽으로 작은 사각형들이 수 없이 많이 붙어 있는 평면을 보면, 거대한 공간 주변으로 수많은 감옥 들이 연결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후, 저 작은 감옥들에서 간수들이 쏟아져 나올 걸 생각하면…… 저기가 확실히 보스 페이즈겠군.’
그리고 이안이 예상한 시나리오는 대부분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쿠웅-!
-지옥의 간수 ‘케르퍼’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최상급 네임드 NPC를 처치하였습니다!
-명성(초월)이 3,000만큼 증가합니다!
-‘라카토리움의 강철 메달’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중략……
-‘지저갱의 녹슨 열쇠’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이제 ‘기계 제단’으로 통하는 철문을 개방할 수 있습니다!
그가 짐작했던 대로 케르퍼를 처치하고 나자, 제단으로 통하는 뒷문을 열 수 있도록 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자, 그럼 여기서 마지막 정비를 시작하자고.”
“대충 5분 정도면 되겠지?”
“아니. 인간적으로 10분은 줘야 하는 것 아니냐?”
“오케이, 그럼 10분.”
“…….”
하여 이안과 조나단은 보스 페이즈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점검을 시작하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꼼꼼하게, 모든 장비 세팅과 스킬 상태를 점검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난이도를 봤을 때 보스 페이지가 얼마나 어려울지는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전열을 정비하는 동안, 이안은 이어질 퀘스트의 진행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이제 엘리샤의 봉인을 성공적으로 풀고 나면, 전쟁을 끝내러 정령계로 돌아가면 되는 건가.’
이어서 이안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히죽 말려 올라갔다.
전장에 복귀하면 그곳에는 트로웰도 있을 것이었고, 그렇다면 온전한 힘을 복구한 엘리샤와 트로웰을 동시에 전장에서 부릴 수 있게 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으, 빨리 해 보고 싶다!’
우선 봉인이 풀린 엘리샤만 해도 200레벨에 어울리는 훨씬 더 강력한 스텟을 가지게 될 것임은 물론, 지금은 사용할 수 없는 세 가지의 고유 능력도 추가로 사용하게 될 것이었으며.
거기에 비슷한 퍼포먼스를 보여 줄 대지의 정령왕 트로웰까지도 전장에서 마음껏 부려 볼 수 있으니.
이안은 가히 일인군단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차원 전쟁’이라는 에피소드 한정이긴 하였지만, 그동안만 해도 충분히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 그럼 이제 다시 움직여 볼까?”
“야, 이 미x놈아! 아직 7분밖에 안 지났다고!”
“아, 그래? 아직 10분 안 됐나……?”
그런데 이안 일행의 최종 정비가 그렇게 마무리되어 갈 무렵.
뿌북-!
이안의 귓전에, 뭔가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뿍- 뿍- 뿌북-!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긴 하지만, 뿍뿍이가 걸어 다닐 때와 비슷한 소리가 멀찍이서 들려온 것이다.
“뭐야, 뿍뿍이 어디가?”
“뿍?”
그리고 다음 순간, 이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전투 들어가야 되는데, 마음대로 돌아다니면 어떡해.”
“나 움직인 적 없뿍, 주인아.”
“음……?”
분명 뿍뿍이의 발소리 같은 것이 멀리서 들려왔는데, 뿍뿍이는 그의 뒤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으니 말이었다.
뿍뿍이의 걸음 소리는 어지간해서는 따라 하기 힘들 정도로 독특했기 때문에, 이안으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
‘뭐, 뭐지? 환청이라도 들은 건가?’
하지만 뿍뿍이의 발소리를 닮은 그 특이한 소리는 점점 더 이안의 귀에 가깝게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뿍- 뿍- 삐룩-!
분명히 뿍뿍이의 걸음걸이와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부자연스럽고 특이한 이질적인 소리!
이제는 그 소리를 이안뿐 아니라 다른 일행들도 전부 듣고 있었고, 하여 모두의 시선은 소리가 들려오는 어둠 속을 향해 고정되었다.
그 와중에 라이와 카르세우스는 뿍뿍이를 향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크릉, 뿍뿍이랑 비슷한 놈이 또 있었나. 크릉!”
“뿍뿍이, 혹시 너 잃어버린 동생이라도 있는 거 아니냐?”
하지만 그 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인지, 그 누구보다도 집중하여 어둠 속을 응시하는 뿍뿍이!
그리고 잠시 후.
삐룩- 뿍-!
새카만 뇌옥의 어둠 속에서, 작고 귀여운 실루엣을 가진 발소리의 주인공이 일행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