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7화 3. 이안과 엘던 >
세르비안에게 들었던 ‘마수 연성술 협회’라는 곳은 이안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밌는 곳이었다.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만을 가진 단체가 아닌, 카일란 내의 숨겨진 또 다른 콘텐츠였던 것이다.
-그런데 세르비안.
-응?
-그 협회라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 곳이죠?
-흠, 그러니까 어떤 단체냐 하면…….
협회가 가진 콘텐츠는 무척이나 복잡했지만, 그 시스템 자체는 반대로 단순하고 명료하기 그지없었다.
일단 협회에 가입한 유저는 자신이 가진 마수 연성 레시피 중에 원하는 것들을 협회와 공유할 수 있는데, 공유한 레시피의 등급과 희귀도에 따라 그게 걸맞는 ‘협회 공헌도’를 얻게 된다.
또 마수 연성에 필요한 마수나 재료들을 기부하는 것으로도 공헌도를 쌓을 수 있었는데, 그렇게 쌓은 공헌도를 협회 안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럼 그렇게 쌓은 공헌도는 어떤 식으로 사용되는데요?
-그야 간단하지.
-음……?
-다른 연성술사가 협회에 공유한 레시피를 열람하거나, 협회의 도서관에 있는 연성서들을 대여하거나. 그도 아니면 협회에서 보유하고 있는 희귀한 마수 연성 재료를 구매할 수도 있고, 가끔 열리는 마수 연성 특강을 수강할 수도 있다네.
-……엄청나군요.
세르비안에게 협회의 이야기를 들었던 이안은 협회에 더욱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럼 세르비안.
-말씀하시게.
-저도 협회에 가입할 수 있는 건가요?
-하하. 이안 자네라면 당연히 가능하겠지.
-……!
-자네가 가진 특별한 레시피들을 몇 장 공유한다면, 곧바로 협회의 일원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대박……!
-추천서를 써 줄 테니, 이번 기회에 아예 협회의 일원이 되어 보시게.
-감사합니다, 세르비안!
-핫핫, 감사하기는. 자네야말로 진정 협회에 필요한 인재인데 말이야.
사실 마수 연성술 협회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했다.
우선 ‘마수 연성술’의 숙련도를 ‘마스터’ 단계까지 올려야 하며, 유저가 직접 만들어 낸 고유한 레시피를 하나 이상 공유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전설 등급 이상의 마수를 연성하는 데 성공한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조건들 중, 이안이 충족하지 못한 조건은 바로 첫 번째 조건.
한동안 마수 연성에 신경 쓰지 못한 이안은 아직 마스터 단계의 숙련도에 오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르비안의 추천서는 그 정도 조건쯤 가볍게 무시해 버릴 수 있는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크……! 세르비안! 이런 곳이 있었다면, 진작 얘기해 주셨어야죠!
-하하, 사실 협회는 생긴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네. 때문에 자네에게 이야기해 줄 기회가 없었던 게지.
-그래요?
-그러게 내 연구소에 좀 자주 놀러오지 그랬나. 하하.
하여 협회에 도착한 이안이 가지고 있었던 계획은 간단하였다.
협회 2층에 있는 도서관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 안쪽에 있는 행정실에 들어가서, 세르비안의 추천서를 사용하여 일단 협회에 가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쌓아 둔 레시피들 중 괜찮은 것들 몇 가지를 협회에 공유하여 공헌도를 확보하고, 그것을 사용하여 ‘고대의 마수 연성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려 했던 것.
물론 이 모든 계획들이 ‘누군가’의 등장으로 조금 바뀌어 버렸지만 말이었다.
‘엘던? 잠깐. 이거 어쩌면 더 쉽게 풀릴 수도 있겠는데?’
이안이 세르비안으로부터 들었던 엘던에 대한 정보는 ‘엘던’이라는 그의 이름 두 글자와 고대의 연성술에 관심이 있는 인물이라는 정도뿐이었지만, 이안은 그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서관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할 경우, 그를 찾아서 움직일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데 이렇게 기가 막힌 타이밍에 엘던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안으로서는 계획을 전면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것.
‘협회에 상주하는 NPC도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만났을 때 먼저 저 녀석부터 컨택해 봐야겠어.’
하여 이안은 계단을 오르다 말고 다시 천천히 걸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협회 가입과 도서관 열람은 언제든 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엘던이라는 인물은 지금 놓치면 다시 못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저벅-.
그를 향해 걸어 내려가던 이안은 우뚝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후우, NPC들은 대체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는 거야? 벌써 몇 번짼데 아직도 출입증을 확인해?”
저벅- 저벅-.
살짝 찌푸린 표정으로 구시렁대며 올라오는 엘던의 목소리를, 본의 아니게(?) 들어 버렸으니 말이었다.
‘잠깐, 유저였어?’
NPC가 NPC라는 단어를 입으로 뱉을 리는 만무하였으니, 엘던이 유저임을 알 수 있었고.
그를 당연히 NPC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안으로서는 멈칫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후. 또 공헌도만 왕창 깨지겠군.”
엘던은 연신 구시렁거리며, 이안의 옆을 스치듯 지나가 2층으로 먼저 올라섰다.
그리고 그의 뒷모습을 힐끔 확인한 이안은 더욱 흥미진진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재밌게 흘러가잖아?’
빠르게 머리를 굴린 이안은 자연스럽게 걸음을 돌려 엘던의 뒤를 쫓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엘던이 2층의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이안은 무슨 음흉한 생각을 떠올린 것인지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 *
마수 연성술사 엘던은 복장부터 생김새 까지 영락없는 연구원의 이미지였다.
나이는 30대 초중반 정도에 불과했지만, 창백한 얼굴에 동그란 안경, 그리고 언제나 쾡 한 표정의 얼굴은 그를 연구원의 이미지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엘던에게는 그런 이미지와 달리 한 가지 반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성격이었다.
집요한 탐구 정신과 노가다 정신을 가지고 있는 그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누구보다 성격이 급한 인물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하여 엘던은 지금 무척이나 조급하였다.
그간의 연구의 결정체나 다름없는 고대의 마수 완성을 코앞에 남겨 둔 상황에서, ‘고대의 연성술’을 배우지 못했다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로 턱 하고 발목을 잡혀 버렸으니 말이다.
만약 발목을 잡힌 것이 연구 진행 단계에서였다면, 아무리 엘던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조급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다만 다 되었다고 생각한 상황에서 뒷덜미를 덥석 잡혀 버린 상황이었으니.
엘던으로서는 어떻게든 빨리 이 상황을 해결하고 싶은 것이었다.
“고대의 연성술이라…… 고대의 연성술. 고대의…….”
하여 도서관에 틀어박힌 엘던은 ‘고대의 연성술’이라는 단어를 연신 중얼거리며, 도서관에 꽂힌 책들을 쉴 새 없이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책 한 권을 열람할 때마다 피 같은 공헌도가 야금야금 깎여 나가는 시스템이었지만, 당장이라도 마수를 만들어 내고 싶은 그에게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지난번에 분명…… 이쪽에서 관련 서적을 찾았던 것 같은데…….”
엘던은 ‘고대의 연성술’과 조금이라도 연관되어 보이는 책이라면, 싹 다 뽑아내어 옆에 쌓아 두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30여 분 정도가 지났을까?
거의 100권에 가까운 책들을 뽑아 낸 엘던은 도서관의 로비로 그것들을 옮겨 차곡차곡 쌓기 시작하였다.
원하는 정보를 모두 찾아내기 전까지는 도서관 안에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을 생각으로 말이다.
쿵-!
“휴우,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낸 엘던은 탁자에 쌓인 책들을 흡족한 표정으로 살핀 뒤 의자를 빼 내어 자리에 착석하였다.
이어서 가장 위쪽에 놓인 책 한 권을 집어 들어, 망설임 없이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였다.
“흐음. 타로트의 유적 탐사기라…… 뭐라도 단서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한번 책을 읽기 시작한 엘던은 놀라운 집중력으로 그 안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마치 100권에 가까운 책들을 전부 읽기 전에는, 엉덩이를 떼지 않겠다는 기세로 말이다.
하지만 첫 번째 책의 책장을 거의 다 넘겨 갈 무렵, 엘던의 집중은 깨질 수밖에 없었다.
드륵- 털썩-!
엘던 혼자 앉아 있던 도서관 로비의 탁자 맞은편에, 처음 보는 인물 하나가 털썩 앉았으니 말이었다.
아무리 집중력이 좋은 엘던이라 해도 바로 맞은편에 누군가 앉았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할 리는 없었고.
하여 책자를 향해 있던 엘던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를 향해 움직였다.
“음……?”
이어서 남자와 눈이 마주친 엘던의 두 눈이, 살짝 확대되었다.
상대는 지금껏 엘던이 협회 활동을 하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뭐지? 협회에 새로 가입한 NPC인가?’
하지만 처음 보는 인물이라 하여, 딱히 놀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엘던이 가입한 이후에도 협회에는 몇 번 뉴 페이스가 들어온 적이 있었고, 그들은 보통 다른 차원계의 마수 연성술 NPC였으니 말이다.
하여 남자에게서 신경을 끈 엘던은 다시 책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하였다.
“흠, 흠. 여기 쌓여 있는 책들을 보니…… 당신, 고대의 연성술에 무척이나 관심이 많은가 보군요?”
책을 향해 시선을 내리던 엘던은 남자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대사는 그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종류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당신은 누굽니까?”
갑작스런 낯선 인물의 참견이었지만, 엘던은 기분이 나쁘나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것일 뿐.
‘뭐지? 고대의 연성술을 알고 있잖아?’
게다가 거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NPC들로 구성된 이 협회에서 누군가 말을 먼저 건 것이 처음이기에, 엘던으로서는 더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 제 소개를 먼저 해야겠군요. 난 이번에 새로 협회에 가입한 ‘이안느’라고 합니다.”
남자의 이어진 대사에 엘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입을 열었다.
이러한 대화 패턴은 NPC와의 대화에서 지금까지 수없이 겪어 온 너무도 익숙한 패턴이었기 때문에, 엘던은 아무런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아, 반갑습니다, 이안느 님. 저는 협회 소속의 연구가인 엘던이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오히려 지금 엘던의 눈빛에 가득 찬 것은 낯선 이에 대한 의심보다는 강렬한 기대감이었다.
대사로 미루어 보건대 남자는 분명 ‘고대의 마수 연성술’에 대한 지식이 있는 듯 보였고, 그렇다면 이 NPC(?)와 친밀도를 쌓는 것으로 원하는 것을 더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으니 말이다.
“여기 쌓아 놓은 책들을 보고 오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엘던 님. 고대의 연성술…… 무척이나 매력적인 학문이죠.”
남자의 대답을 들은 엘던의 표정은 점점 더 상기되기 시작하였다.
최근 답답했던 그의 연구 인생에, 오랜만에 운수가 터졌다고 생각되었으니 말이다.
‘이거, 오늘은 운이 좋은데?’
물론 엘던의 운이 정말 좋은 것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