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6화 2. 이안의 제안 (3) >
* * *
소환술사 세계 랭킹 1위는 이안이다.
인간 진영과 마족 진영을 통틀어, 그것은 명실공이 사실이며, 이제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명제였다.
영국 서버의 소환술사 톱 랭커인 엘던 또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마수 소환술사’로서의 커다란 자부심이 하나 있었으니.
소환술사 랭킹과 별개로 ‘마수’의 카테고리 안에서만큼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가가 바로 그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이안이라 해도 마수에 대한 지식만큼은 아마 한 수 접어줘야 할 테지.’
그리고 그것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전설 등급의 마수를 최초로 연성한 것은 그가 아니었지만, 신화 등급의 마수 최초 연성 업적을 달성한 인물이 바로 그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중간계에 존재하는 마수 연성술 협회에도, 유저 중에는 유일하게 출석 가능한 유저가 바로 그였으니.
그 때문에 그러한 자부심이 오늘도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끊임없이 탐구하고 파헤치고 새로운 마수 레시피를 개발해 내는, 진정한 마수 연구가 엘던.
“이제 진짜 끝이군. 재료는 다 모았고…….”
연구실의 탁자에 연성 재료들을 주르륵 꺼내 놓은 엘던은 흡족한 표정으로 웃으며 양손을 비볐다.
힘들게 모은 이 재료들에 준비해 둔 마수들을 연성하여, 지난 한달 동안 연구한 ‘야심작’을 연성해 낼 차례였으니 말이다.
지금 엘던이 연성하려 하는 녀석의 이름은 바로 ‘고대의 다크발록’.
무려 신화 등급으로 추정되는 마수인 ‘고대의 다크발록’을 연성해 내기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엘던은 이미 고대의 다크발록 하위 단계이자, ‘전설’등급의 마수인 ‘다크발록’까지 연성하여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 상태였다.
“소환……!”
크아아오오-!
엘던이 소환 주문을 외자, 거대하고 사나운 외형의 시커먼 발록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어서 녀석의 늠름한 자태를 확인한 엘던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이 녀석을 베이스로 하는 더욱 강화된 마수.
‘고대의 다크발록’이 벌써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후후, 연성으로 만들어 낸 두 번째 신화 등급 마수도, 결국 이 몸의 손에서 태어나겠군.’
사실 이 ‘고대의 다크발록’ 레시피는 엘던으로서도 무척이나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된 것이었다.
전설 등급의 마수인 ‘데빌 피닉스’의 연성 재료를 찾아 명계를 전전하던 중.
운 좋게 발견한 고대의 던전에서 찾은 숨겨져 있던 유물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엘던은 이 ‘고대의 다크발록’ 레시피에 무척이나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연성에 들어가는 재료들만 봐도 녀석은 신화 등급의 마수가 분명했던 데다, 녀석을 연성하는 방식이 지금껏 그조차도 알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방식이었으니, 그의 탐구 정신에 불이 붙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수 연성에 평범한 재료 아이템이 아닌 특수한 아티펙트가 포함되다니…… 정말 어떤 녀석이 나올지 상상조차 할 수 없군.’
“후우……!”
한차례 크게 심호흡한 엘던은 연성에 부재료로 들어갈 두 마수를 차례로 더 소환하였다.
“데빌 피닉스, 데빌 드레이크. 소환!”
끼오오오-!
캬아아아!
무려 전설 등급의 마수인 데빌 피닉스와 영웅 등급의 마수인 데빌 드레이크.
두 녀석의 정보 창까지 한 번씩 꼼꼼하게 확인한 엘던은 마른침을 한 차례 꿀꺽 집어삼켰다.
이 연성 한 번에 들어가는 재료만 해도 천문학적 액수라는 사실이 비로소 실감되기 시작했으니 말이었다.
‘하, 한 방에 가자, 한 방에……!’
누구보다 연성술의 숙련도가 높은 엘던이었지만, 그래도 성공 확률보단 실패 확률이 더 클 것이 분명한 궁극의 연성.
아껴 놓은 최상급의 ‘마령석’까지 싹 다 쏟아 넣은 엘던은 경건한 마음으로 마수 연성을 시작하였다.
마치 어떤 의식이라도 치르듯 더 없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이다.
위이잉-!
엘던이 고유 능력을 발동한 뒤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하자, 재료로 포함된 마수들의 주변으로 붉고 검은 기류가 넘실거리기 시작한다.
모양이 무척이나 복잡한 탓에 마법진을 그리는 속도는 무척이나 더뎠지만, 엘던은 결코 조급해하지 않았다.
마법진만 하루 종일 그려야 한다 해도 이 연성이 성공만 할 수 있다면, 온몸에 쥐가 나더라도 해내야만 하는 것이었으니까.
기잉- 기이잉-!
구슬땀을 흘려 가며 복잡한 마법진을 천천히 완성해 나가는 엘던.
그리고 마법진이 완성되어 감에 따라, 점점 더 짙은 어둠 속에 잠식되는 세 마리의 마수들.
그렇게 1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엘던은 드디어, 연성 마법진을 완벽하게 그려 낼 수 있었다.
“돼, 됐다……!”
육안으로 자세히 확인조차 힘들 정도로 복잡한 마법진을 완성한 엘던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마지막 재료들을 쏟아붓기 시작하였다.
‘그래. 이번엔 정말, 아껴 뒀던 능력석까지 싹 다 부어야겠어. 어마어마한 놈이 나와 줬으면 좋겠군.’
그리고 마법진의 앞에 무릎 꿇은 엘던은 마수 연성의 마지막 의식(?)인 기도를 시작하였다.
“제발……! 하느님, 부처님, 제발……!”
고오오오-!
양손을 모은 채 눈을 질끈 감은 엘던의 앞으로, 시뻘건 기운과 새카만 어둠의 회오리가 강렬히 휘몰아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모든 재료를 집어삼킨 그 회오리는 마법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긴장감에 숨마저 참고 있던 엘던이 결과물을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제발, 됐겠지? 됐을 거야.’
“……!”
엘던의 눈앞에, 한 차례 폭풍이 휘몰아치고 지나간 연구실의 전경이 천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엘던의 두 동공은 커다랗게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대체……!”
눈앞에 나타난 결과물이 그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으니 말이었다.
-연성의 재료들이 성공적으로 감응하기 시작합니다.
-마법진의 완성도 : 99.78%
-레시피에 맞는 재료들이 융합되었습니다.
……중략……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고대의 마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대의 마수 연성술’이 필요합니다.
-‘고대의 마수 연성술’을 습득하지 못했습니다.
-마수 연성이 취소되었습니다.
-연성에 사용된 주재료와 부재료가 반환됩니다.
우우우웅-!
엘던이 예상했던 결과는 성공, 혹은 실패.
한데 그 양쪽 모두 아닌 생각지 못한 결과가 나왔으니, 엘던의 입장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대의 마수 연성술이…… 필요하다고?”
메시지를 확인한 엘던은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일단 ‘연성 실패’라는 최악의 결과는 면하였으니, 비록 성공이 아니더라도 금방 이성을 찾은 것이다.
‘고대의 마수 연성술이라는 게…… 단순히 레시피를 뜻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고유 능력이었다는 건가?’
엘던은 사실 고대의 마수 연성술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보는 것이 아니었다.
데빌 피닉스 유적에 들어가서 발록의 레시피를 찾았을 때부터, 그곳의 유물들에서 고대의 마수 연성술이라는 단어를 많이 봤으니 말이었다.
게다가 이 고대의 다크발록 연성 레시피를 분석하기 위해서 협회에 ‘고대의 마수 연성술’에 대한 정보를 묻고 다녔으니.
단어 자체는 그에게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었던 것.
다만 그 당시에는 그것을 새로운 콘텐츠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며, 단순히 고대에 사용되었던 마수 연성술 정도로만 이해한 것일 뿐이었다.
‘협회에 다시 가 봐야겠어. 지난번에도 그곳에서 단서를 찾았으니…… 조금만 더 파 보면 고대의 연성술을 배울 방법도 충분히 알 수 있겠지.’
머릿속이 정리된 엘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생각지 못했던 변수에 의해 연성을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표정은 어느새 상기되어 있었다.
마수 연성술에 대한 연구 자체를 좋아하는 그에게 있어, 단순히 신화 등급의 마수를 연성해 내는 것보다 어쩌면 더 흥미로운 것이, ‘고대의 마수 연성술’이라는 새로운 콘텐츠였으니 말이다.
펄럭-!
서둘러 연구실을 정리한 엘던은 연구복을 벗어 소파에 던져 놓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의 걸음이 향하는 곳은 당연히 마수 연성술 협회였다.
* * *
중간계에서 가장 규모가 커다란 중립 지역은 당연히 소르피스 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처음 중간자가 된 유저들이 모이게 되는 곳이 바로 이 소르피스 성이었으니, 지속적으로 더 크게 개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립 지역이 소르피스 성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간계 유저들이 많아지면서 소르피스 성은 더 이상 유저와 길드를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포화 상태가 되었고, 제2, 제3의 소르피스 성들이 차례로 생겨났으니 말이다.
그리고 마수 연성술 협회가 자리하고 있는 크루니아 내성이 바로, 그런 중립 지역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우우웅-!
“흠, 중간계에 온 지 벌써 1년은 된 것 같은데…… 여긴 정말 처음 와 보는군.”
그리고 세르비안으로부터 정보를 받아 이 크루니아 내성에 도착한 이안은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광장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중간계 곳곳을 그 누구보다 많이 다닌 이안이었지만, 이 크루니아 내성은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 크루니아가 오기 힘든 곳은 아니었다.
다만 이안이 이곳을 아직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크루니아 내성은 이미 생성된 지 오래된 중립 지역이었지만.
사실상 소르피스 성의 하위호환이나 다름없는 기능을 하는 곳이었기에, 이안으로서는 와 볼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대충 구조는 소르피스랑 비슷하고…… 세르비안이 광장 북서쪽 대로를 따라가라고 했으니, 이쪽이 맞는 것 같군.”
미니맵을 꼼꼼히 살핀 이안은 빠르게 길을 찾아 마수 연성술 협회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조나단에게 심부름(?)을 시킨 지도 벌써 한나절이 훌쩍 지났으니, 그가 자유롭게 마수 연성술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이안이 예상키로 아마 조나단은 사흘 이내에 돌아올 것이었고, 때문에 협회를 찾는 이안의 발걸음이 조급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었다.
“흠, 협회라고 해서 규모가 클 줄 알았는데, 우리 길드 거점이랑 별반 다를 것 없는 규모의 건물이군.”
끼이익-.
협회를 금방 찾아낸 이안은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문지기인 듯 보이는 NPC 하나가, 이안을 향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출입증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흠, 이것으로 되겠죠?”
이안이 문지기에게 내민 것은 세르비안으로부터 받은 추천서.
그것을 확인한 문지기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의 길을 열어 주었다.
“앗, 세르비안 님의 손님이셨군요. 입장하셔도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NPC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이안은 건물의 안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지금 가려는 곳은 협회 내부에 있는 도서관.
그곳에 고대의 연성술에 대한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세르비안이 해 주었으니 말이다.
‘자, 어디 보자. 2층이라고 했었지?’
협회 내부에 있는 안내도를 확인한 이안은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실로 향했다.
그런데 이안이 계단에 오르려던 바로 그때.
끼이익-!
협회의 문이 또 한 번 열리며, 누군가가 협회 안으로 입장하였다.
“출입증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여기 있소.”
소리를 들은 이안은 자연스레 시선을 돌려 새로 들어온 인물을 확인하였다.
딱히 별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곳을 들락거리는 인물이라면 적어도 마수 연성술과 관련이 있을 테니, 약간의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흠, 정말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네.’
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로부터 관심을 끄려던 이안은 옮기려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남자와 경비원의 대화에서, 왠지 낯익은 이름이 들렸으니 말이었다.
“확인되었습니다, 엘던 님.”
“고맙소.”
“그럼, 즐거운 하루 보내십시오.”
세르비안이 협회에서 ‘고대의 연성술’에 대해 이야기 했었다고 했던 인물.
문지기가 남자를 부른 ‘엘던’이라는 바로 그 이름이, 순간적으로 기억났으니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