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3화 1. 지르딘의 부탁 (4) >
“잠깐 기다리시게.”
“네?”
“내게도 시간이 좀 필요해서 말이지.”
“시간이라면 어떤 시간을 말씀하시는지…….”
“이 고서들을 자네에게 공유해 주려면, 필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피, 필사요?”
“그럼 어떤 식으로 공유해 줄 줄 알았는가.”
“그야 당연히 내용을 가르쳐 주실 줄…….”
“나도 아직 연구 못 한 내용을 자네에게 어떻게 가르쳐 줘?”
“켁.”
“어쨌든 필사해서 공유해 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게.”
“알겠습니다, 지르딘 님.”
한참 설레는 마음이던 이안은 지르딘의 이야기를 듣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 이렇게 아날로그적이지?’
유저도 아니고 NPC인 지르딘이 실제로 연구실 책상에 앉아 황금서의 필사를 시작했으니 말이었다.
물론 적어 내려가는 속도가 비현실적으로 빠르긴 했으나, 어쨌든 생각지 못한 그림인 것만큼은 사실이었던 것.
슥- 스슥-.
그리고 어이없는 표정인 것은 이안의 옆에 있던 조나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쟤 진짜 책을 쓰고 있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일단 앉아서 기다리면 되는 거지?”
“이, 일단은?”
하지만 이안의 당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르딘으로부터 필사가 끝난(?) 고서를 먼저 한 권 받아 든 순간.
띠링-!
또다시 생각지 못했던 전개로 흘러가기 시작했으니 말이었다.
-‘고대 아티펙트 연성술(사본)’ 스킬 북을 획득하셨습니다.
‘사, 사본? 이런 수식어는 처음 보는데…….’
-확인할 수 없는 아이템입니다.
“……?”
-사용할 수 없는 아이템입니다.
-원본이 아니므로, 스킬을 습득할 수 없습니다.
“이게 무슨……!”
기본적으로 아이템 정보 창조차 확인이 불가능한 데다, 너무도 스킬 북처럼 생긴(?) 아이템이 사용조차 할 수 없는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
하여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이안을 향해, 조나단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 아니. 잠깐만. 후우…….”
한차례 크게 심호흡한 이안은 침착한 표정으로 다시 책자를 열어 보았다.
혹시나 지르딘으로부터 받은 서적이 읽을 수 있는 종류의 책(?)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책자를 펼친 이안은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곧바로 책장을 덮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탁-!
책 안에는 이안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구불구불한 글씨만이 가득 차 있었으니 말이었다.
-عنصر کا فننامہ فطرت کی طاقت سے شروع ہوتا ہے…….
“젠장.”
“음? 왜 그래?”
“아, 아니야 잠깐만.”
이어서 조나단의 물음에 잠시 평정심을 잃을 뻔했던 이안은 차분히 머리를 굴려 보기 시작하였다.
‘후, 조나단에게 큰 소리를 쳐 놨는데……. 침착하자 박진성. 뭔가 숨겨진 단서가 분명히 있을 거야.’
사실 이안으로서는 당황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었다.
조나단에게 훨씬 큰 무언가(?)를 얻을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큰소리 뻥뻥 치며 그의 히든 퀘스트까지 중단시켰는데 결과물이 이렇게 엉뚱하게 나왔으니.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뒤엉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신화 등급 초월 무기 하나 정도야 어떻게든 구해 줄 수 있겠지만…… 분명히 실망할 텐데…….’
하지만 금방 다시 평정심을 찾은 이안은 지르딘이 나머지 네 권의 고서를 전부 필사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그리고 모든 고서를 받은 뒤, 한 가지 사실을 추가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스킬 북이 사용되지 않고 심지어 정보 창조차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어떤 기획 의도(?) 때문임을 말이었다.
“자, 이게 마지막일세.”
“정령 연성술……이겠죠?”
“그렇다네.”
“감사합니다, 지르딘.”
띠링-!
-‘고대 정령 연성술(사본)’ 스킬 북을 획득하셨습니다.
-상위 카테고리인 ‘고대의 정령술’을 보유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고대 정령 연성술(사본)’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이안이 가장 원했던 ‘고대의 정령 연성술’만큼은 습득이 가능했던 것.
“휴우.”
그래서 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적어도 이렇게 힘들게 클리어한 퀘스트의 보상들이 단순한 종이 쪼가리는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책자들도, 어떤 조건만 충족시키면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긴데…….’
두 눈을 반짝이기 시작한 이안은 지르딘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라면 나머지 고서들을 습득하기 위한, 어떤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지르딘.”
“음? 왜 그러지?”
“주신 책자들을 살펴봤는데…….”
“그런데?”
“마지막에 주신 정령 연성술을 제외하고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이안의 이야기를 들은 지르딘은 살짝 놀란 표정이 되어 되물었다.
“그 말은…… 정령 연성술은 이해가 된다는 말인가?”
“네. 다행히도요.”
“……그럴 수가!”
이안이 ‘고대의 정령술’을 이미 습득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르딘으로서는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르딘이 놀랐다는 사실이 안중에도 없는 이안은 곧바로 궁금한 부분을 물어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말인데…… 나머지 네 권의 고서를 이해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흐흠…….”
“나중에 지르딘 님의 연구가 끝나실 즈음해서, 다시 이곳으로 찾아오면 될까요?”
지르딘이 나머지 고서를 해석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이안에겐 당연한 것이었다.
어차피 지르딘은 이 고서들을 연구할 것이라 하였고, 자신에게도 무척이나 호의적인 상황이었으니.
차후에 그에게 도움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안의 기대와 다르게, 지르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쉽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네, 이안.”
“어……째서 그렇죠?”
“나야 이 다섯 권의 귀한 고서를 전부 구해 준 자네를 돕고 싶네만, 자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일이 불가능할 테니 말이네.”
“아……?”
“아마 다섯 권의 고서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안다면, 요새의 경비가 훨씬 거 삼엄해질 거야.”
“그……렇군요.”
“아무리 자네라 하더라도, 다시 이곳을 찾아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테지.”
“쩝…….”
“뭐, 내 연구가 끝날 때까지 자네가 이곳에서 나가지 않고 기다려 준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래요? 연구는 얼마나 걸리실 것 같은데요?”
“글쎄. 넉넉잡아 10년 정도……?”
“후…….”
그러나 지르딘의 부정적인 답변에도, 이안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이 비슷한 답변이 나올 것을 대비해서, 생각해 뒀던 질문이 하나 더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 지르딘 님.”
“이야기하시게.”
“지르딘 님의 도움 없이, 제가 나머지 네 권의 고서를 연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연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
“제가 ‘정령 연성술’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이안의 물음에, 지르딘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두 눈을 감았다.
이어서 주름진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당연히 방법이야 없지 않다네.”
“……!”
“모든 학문은 결국 만류귀종. 그것은 기계공학이나 연금술 또한 다르지 않기 때문이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기 힘든 지르딘의 말에, 이안은 잠시 눈을 끔뻑였다.
나머지 네 권을 해석하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물어보는 와중에 뜬금없이 만류귀종이라는 단어를 꺼내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르딘의 말이 이어지자, 이안은 곧 그 단어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자네가 정령술에 통달하여 그 연성술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듯…… 나머지 네 권의 고서 또한, 해당 학문에 통달하면 이해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걸세.”
“토, 통달…… 요?”
“최소 마스터에 가까운 경지. 그것을 말하는 것일세.”
지르딘의 이야기를 듣던 이안의 머릿속에 문득 정령 연성술 서책을 받는 순간 나타났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고대의 정령술이 상위 카테고리라 했고, 그게 있어서 연성술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일 테니…… 그렇다면 나머지 책자들도……?’
지금 이안이 습득하고 싶은 책자는 고대의 마수 연성술과 고대의 아티펙트 연성술이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안은 얼추 추측을 해 볼 수 있었다.
‘통달이라면 숙련도가 마스터 단계가 된 것을 얘기하는 것일 테고.’
이안의 머리가 팽팽 회전하기 시작하였다.
‘아티펙트 연성술부터 생각해 보면…… 대장장이 기술을 마스터하거나, 고대의 대장 기술을 연마해야 하는 걸까?’
완벽히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단서들을 조합해 봤을 때, 얼추 그림을 그려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수 연성술 쪽이야 당연히 그쪽 마스터 클래스까지 도달해야 할 테고…… 그렇다면 이쪽이 나한텐 조금 더 쉬우려나?’
하여 대략적으로 머릿속을 정리한 이안은 지르딘을 향해 이것 저것 추가로 물어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모든 질문이 끝났을 때.
‘그래. 이러면 되겠어.’
어떤 결론을 떠올려 낸 이안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 * *
어둠의 요새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예상했던 것 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경비가 삼엄해져서인지, 처음 요새 안에 등장하던 기계 괴수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몬스터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국 문지기 보스들에 비하면 훨씬 더 약한 몬스터들인 것이 사실이었고, 해서 이안과 조나단은 결국 무사히 요새 바깥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후우, 드디어 밖이군.”
“그러게.”
“암살자로 전직한 뒤로, 밝은 곳이 이렇게 반가운 날이 올 줄은 몰랐군.”
조나단의 이야기에 이안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고유 능력들이 어두운 맵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암살자 클래스였고, 이안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나단의 농담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뭐, 그래도 재미는 충분히 봤잖아?”
“재미는 개뿔.”
“보스 잡고 나온 잡템들만 해도, 꽤 쏠쏠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안의 천연덕스런 반문에, 조나단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시끄럽고, 이제 약속했던 부분이나 한번 얘기해 보도록 하자고.”
“약속했던 부분?”
“그래.”
“으음…….”
“설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할 셈은 아니겠지? 이안이라는 이름까지 걸어 놓고 말이야.”
조나단의 이야기에 이안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능청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나단과의 약속을 어길 생각은 당연히 아니었다.
이안이 그렇게 파렴치한(?) 유저도 아니었을뿐더러, 이안이라는 이름이 이제는 단순히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만약 이안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기(?)를 치고 다닌다면, 길드 차원은 물론 국가 차원에서까지 큰 이미지 손실을 보게 될 것이었다.
“당연하지. 설마, 내가 약속을 어기겠어?”
“후후.”
조나단은 두 눈을 반짝이며, 이안을 응시하였다.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보상을 주려는 것인지, 여러 면에서 기대되었으니 말이다.
‘퀘스트로 얻은 서책들로…… 뭔가를 해 주려는 건가? 아니면 정말 신화 등급의 초월 무기보다 더 값진 물건을 줄 수 있다는 건가?’
조나단이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는 동안, 이안은 인벤토리를 뒤지기 시작하였다.
신화 등급의 초월 무기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값진 아이템이라면, 이안조차도 몇 개 보유하고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어서 잠시 후.
스윽-.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든 이안은, 그것의 정보 창을 조나단에게 슬쩍 공유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조나단은 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건……!”
“자, 어때.”
“이걸 네가 어떻게 갖고 있는 거지?”
“이 정도면 네 원래 퀘스트 보상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아이템이지?”
“이 정도면…… 충분히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군.”
이안이 꺼내 든 것은 다름 아닌, 세계 랭커 암살자인 ‘요르간드’의 단검이었던 것.
과거 이안이 다크블러드의 기사단을 전멸시키고 주워 뒀던, 신화 등급의 초월 무기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