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8화 8. 어둠의 요새. 그리고 연성술의 비밀 >
이안은 평소 게임을 플레이할 때, 어지간해서는 정체를 숨기고 다니는 편이다.
아이디나 레벨이야 거의 모든 랭커들도 비공개로 다니는 편이었지만, 이안은 아예 외형까지도 유저들이 알아볼 수 없는 룩을 착용하였다.
이제는 글로벌 서버라 할지라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유저가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
사실상 얼굴을 드러내놓고 다니면, 아이디, 레벨을 비공개 해 둔 것이 의미 없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체를 숨기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었는데.
첫째는 귀찮아서.
그리고 둘째는, 다른 유저로 인한 변수나 위험 요소를 미리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정령계같이 인간 진영이 메인인 필드를 돌아다닐 때야 별다른 변수가 생길 일이 없었지만, 이렇게 라카토리움이나 엘라시움 같은 마계 진영을 돌아다닐 때에는, 충분히 마족 진영 유저들의 방해가 들어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전투력으로 따지자면 어지간한 랭커들은 이안에게 위협되기조차 힘들 테지만, 변수나 리스크가 꼭 직접적인 전투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쓸데없는 변수는 만들지 않는 게 상책이지.’
그 때문에 이안이 조나단에게 정체까지 밝혀 가며 먼저 손을 내민 데에는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체를 보면 서책 하나가 그렇게 크진 않다며 허세를 떨긴 했지만, 사실 조나단의 퀘스트 템은 제법 중요한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저걸 포기해도 정령 연성술에는 영향이 없지만…….’
이안의 입장에서 조나단의 황금 서책은 보너스 같은 느낌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 보너스가 거의 기본 보상에 맞먹을 정도로 강력했으니까.
‘기왕 하는 거 아티펙트 연성술까지 배우면 좋으니까.’
조나단이 기계 보스와 사투를 벌이던 그 시간 동안, 이안은 사실 ‘기계공학자 지르딘’을 이미 찾아냈었던 것이다.
* * *
이안이 어둠의 요새에 들어온 이유이자, 끊겨 버린 정령계 에픽 퀘스트의 실마리가 될 퀘스트인 ‘어둠의 기계공학자 지르딘’퀘스트.
이안은 지르딘을 찾아내었지만, 그것으로 퀘스트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흐으음…… 마력환원장치에 대해 알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지르딘 님. 정확히는 그것의 봉인을 해제할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설마 그렇게 말하면, 내가 순순히 알려 줄 것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가는 것이 있어야 오는 것도 있는 법.”
“클클, 세상의 이치를 잘 아는 친구로구먼.”
“혹시 대가로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좋아. 오랜만에 말이 잘 통하는 녀석이로군.”
퀘스트가 단순히 그를 찾아내고 끝나는 것이 아닌,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으니 말이었다.
<어둠의 기계공학자 지르딘(에픽)(히든)(연계)>
-당신은 물의 부족들이 있던 샤이야 산맥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한발 빨리 공격 들어온 기계문명의 병력으로 인하여, 물의 부족들은 깊은 심연 속에 봉인되어 버렸다.
……중략……
하여 꽁꽁 얼어붙은 샤이야 산맥을 다시 깨워 내려면 생명의 성소에 걸린 봉인을 풀어내야 하고, 봉인을 풀기 위해서는 어둠의 군단이 설치해 둔 ‘마력환원장치’를 해제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드라토쿠스로부터 얻은 정보에 의하면, ‘어둠의 기계공학자 지르딘’이라는 인물이 마력환원장치를 해제할 방법을 알 것이라고 한다.
그의 연구소가 있다는 어둠의 요새로 향하여, 그를 찾아보도록 하자.
만약 그를 찾아내어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지르딘은 당신에게 마력환원장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줄 것이다.
*지르딘의 부탁(???)(봉인)
-조건이 충족될 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퀘스트 난이도 : SSS+
-추천 레벨 : ???(초월)
-퀘스트 조건 : ‘기계대전쟁’ 에피소드 진행, ‘정령왕의 대리인’ 칭호 보유
-제한 시간 : 알 수 없음
-보상 : 마력차단기(전설)(초월)
*한 번이라도 실패할 시, 다시 수행할 수 없는 퀘스트입니다.
이안이 1시간 동안 할 수 있었던 것은 지르딘을 찾아내는 것 정도였지, 그의 ‘부탁’까지 해결하여 퀘스트를 클리어 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애초에 그 정도로 쉽게 끝낼 수 있는 퀘였다면, 난이도가 트리플 에스로 책정됐을 리 없겠지.’
하여 이안은 일단 지르딘으로부터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보았고, 그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해.”
“……?”
“이 요새 안에 있는 황금빛 고서들을 찾아 주는 것.”
“황금빛 고서라면……?”
“고대의 연성술에 대한 이론들이 총 망라되어 있는 고대의 서적이라 할 수 있지.”
처음 지르딘과 이야기할 때, 이안은 다소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의 대화 내용이, 이안이 예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으니 말이다.
‘뭐지? 왜 요새 안에 있는 걸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는 거야?’
이안이 생각하기에 지르딘은 당연히 기계문명의 인물일 것이었고, 때문에 이 어둠의 요새가 그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역으로 요새 안에 있는 물건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자신에게 하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안의 입장에서 당연히 지르딘의 부탁은 이 요새 바깥에서 해야 할 임무라고 생각했던 것.
그 때문에 이안은 지르딘에게 다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구하는 것이, 많이 어려운 일인가요?”
“그건 왜 묻지?”
“직접 하셔도 쉬울 일이라면, 굳이 제게 부탁하실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이안의 질문에, 지르딘이 피식 웃으며 답하였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내가 하는 것보단 네가 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지.”
“음……?”
“나는 이 연구소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몸이니 말이야.”
지르딘의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당연히 기계문명과 같은 진영의 인물이라 생각했던 그에게, ‘약간’의 스토리가 있었으니 말이다.
“연구소 밖이라면…… 아예 이 방 바깥으로 나가실 수 없다는 말인가요?”
“그래. 그 말이 아니면 무슨 말이겠나?”
지르딘의 말에 의하면, 과거 자신은 하나의 기계학파를 이끌던 수장이라 하였다.
하지만 세력 싸움에서 결국 찰리스에게 압도당하였고, 덕분에 이 어둠의 요새 안에 갇혀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하였다.
“사실 나는 그때 죽은 몸이나 다름없었지.”
“……!”
“자네가 알고 싶다는 그 ‘마력환원장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말이야.”
“그게 무슨……?”
“완전히 멈췄던 내 심장이 다시 뛰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이 연구실 안에 있는 마력환원장치니까.”
지르딘을 처치하려던 찰리스는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목숨을 부지시켰고, 대신 마력환원장치를 이용하여 영원히 이 방 안에서 나갈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였다.
“잔인……하군요.”
“하지만 나는 그에게 딱히 불만은 없어.”
“어째서요?”
“반대로 내가 그 세력 싸움에서 이겼더라면, 나는 녀석을 망설임 없이 죽였을 테니 말이지.”
“…….”
하지만 재밌게도 지르딘은 오히려 이 연구실에 갇힌 이후로 행복을 찾았다고 하였다.
권력과 탐욕에서 벗어나 오롯이 연구만 하며 살 수 있는 삶이 그를 고통해서 해방시켜 줬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력 다툼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이 연구실에 남아 연구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제법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말이야.”
“정말 특이하신 분이네요.”
“뭐, 그렇게 느끼는 게 당연하겠지.”
그리고 지르딘의 그 이야기 끝에서, 이안은 황금빛 고서에 대한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었다.
“그럼 그 황금빛 고서를 원하시는 이유는 뭐죠? 이 안에서 연구만 하셔도 행복하시다면서요.”
“후후, 그야 간단해.”
“……?”
“연구거리가 이제, 다 떨어져 버렸으니 말이야.”
“켁.”
“하지만 자네가 이 요새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고서를 찾아다 준다면, 난 또 한동안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겠지.”
“그, 그렇군요.”
“고대의 연성술이라면, 내가 지금껏 연구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지르딘의 얘기가 끝남과 동시에, 퀘스트와 관련된 새로움 시스템 메시지들이 주르륵 떠올랐으니 말이었다.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지르딘의 부탁’ 내용이 생성됩니다.
*지르딘의 부탁
-어둠의 요새 어딘가에 있을 ‘황금빛 고서’들 중 하나 이상을 지르딘에게 가져다 줄 것. (만약 두 권 이상의 고서를 가져온다면, 숨겨진 보상을 추가로 획득할 수 있습니다.)
지르딘의 이야기와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숨겨진 보상? 그리고 황금빛 고서가 여러 권이라는 건…….’
이어서 다시 지르딘과 눈이 마주친 그는 은근슬쩍 정보를 캐기 시작하였다.
“두 권 이상의 고서를 가져다드린다면…… 제게 뭘 해 주실 수 있나요?”
“허허, 두 권 이상이라……. 글쎄, 자네의 능력으로 그게 가능할까?”
“어쨌든 가능하다고 가정한다면요.”
이안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지르딘은 주름진 입을 다시 천천히 열었다.
그리고 이안과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더 놀란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글쎄, 그것은 자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지겠지.”
“제가 원하는 게 고대 정령연성술을 배우는 것이라면…….”
“……!”
“가능한가요?”
이안이 그에게 원한 것이 그로서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흐으음…….”
잠시 뜸을 들인 지르딘의 입이 다시 열렸다.
“조금 애매한 대답이지만, 가능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자네가 가져온 그 황금빛 고서 중에, 정령연성술이 포함되어 있어야 가능할 테니 말이지.”
“……!”
“나조차도 고서 없이는, 불완전한 정령술밖에 알려 줄 수 없으니 말이야.”
지르딘의 말에 뭔가 번뜩이듯 떠오른 이안은 재빨리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지르딘 님.”
“말씀하시게.”
“제가 만약 이 요새 안의 모든 고서를 가져온다면, 그 모든 내용을 제게도 가르쳐 주실 수 있으십니까?”
“……!”
“고대 연성술의 연구에는 저도 관심이 많았거든요.”
이안의 파격적인 제안에, 지르딘은 잠시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그것이 가능할지도 의문이었지만, 이런 제안을 할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으니 말이었다.
“크흐으음…….”
하지만 지르딘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이미 속세에 대한 미련을 전부 버린 그에게, 이안의 제안은 전혀 나쁠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지르딘으로서는 모든 황금 고서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딜이 없었으니까.
“좋아, 이안. 할 수 있다면 한번 해 보시게.”
“오……!”
“만약 자네가 두 권 이상의 고서를 가져온다면, 그것들의 내용을 자네와도 공유하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