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3화 6. 뜻밖의 전개 (2) >
* * *
카일란의 NPC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언제나 항상 그 자리에서 맡은 역할만 하는 비교적 1차원적인 기능성 NPC들.
둘째로, 마치 유저처럼 AI를 가지고 카일란의 세계관 내에서 활약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역할군이 바뀌기도 하는 활동형 NPC들.
그리고 이 활동형 NPC들이 다른 게임에는 보통 존재하지 않는 특별한 존재들인데, 이들은 마치 유저처럼 사냥을 하며 레벨을 올리기도 한다.
물론 유저보다야 성장 속도가 더디긴 하지만 적당히 레벨이 오르기 때문에, 활동형 NPC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는 지역 혹은 차원계의 경우, 유저들의 콘텐츠 진행에 발맞춰 환경 또한 진화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처음 카일란 출시 시점에는 NPC평균 레벨이 50~60 정도였던 마을이, 수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거의 300레벨까지 올라 있는 케이스도 있었으니 말이다.
특히 지금 상위권 유저들이 경쟁 중인 ‘중간계’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NPC들이 활동형 NPC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과거 이안이 활약했던 용천의 ‘중천’ 필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한창 이안이 활약할 당시에는 중천에서 초월 70레벨도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100레벨 이상의 NPC들도 제법 많았으니까.
‘그래도 초월 130레벨이 넘는 드라토쿠스는…… 5대 가문 안에서 최상위 NPC겠지.’
이안은 이러한 모든 정황을 따져, 빙해 가문 내에서 드라토쿠스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추측하였다.
그리하여 판단했을 때, 그가 충분히 변칙적인 자신의 의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무척이나 성공적이었다.
결국 이안의 미끼를 문 드라토쿠스가 의뢰를 받아서 ‘어둠의 군단’으로 돌아갔으며.
띠링-!
-빙혼대주 ‘드라토쿠스’가 당신의 의뢰를 수락하였습니다.
-의뢰 조건 충족 시, 중천의 공헌도 130만이 자동으로 차감됩니다.
……후략…….
정확히 반나절 뒤에, 이안이 원했던 답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으니 말이었다.
샤이야 봉우리가 다시 얼어붙게 된 바로 그 ‘이유’를 말이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딱히 오래 걸릴 의뢰는 아니었으니까.
“좋아. 그래서 이유는 뭐야?”
-성격도 급하군.
“내 성격이 급하기보단 상황이 급한 거다.”
-상황이라면…… 정령계의 상황?
“그래.”
-네가 왜 정령계를 이렇게까지 돕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아. 설명해 주도록 하지.
드라토쿠스의 이야기는 제법 길었다.
기계문명이 샤이야 봉우리에 진입하여, 어떤 경로로 이곳을 점령하였는지부터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그중에는 ‘결론’과 관계없는 이야기도 많았지만, 이안은 모든 이야기를 집중해서 경청하였다.
결국 이 모든 것이 기계문명의 병력과 관련된 정보들로 이어지는 것이었으니, 궁극적으로는 퀘스트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으니까.
‘정황상 샤이야 산맥 어딘가에도 균열이 새로 열린 것 같은데…….’
하지만 이 모든 정황을 떠나, 샤이야 산맥이 다시 얼어 버린 그 결정적인 이유는 무척이나 간결한 것이었다.
그리고 드라토쿠스의 이야기를 듣던 이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장소가 무척이나 낯익은 곳이었으니 말이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어둠의 군단이 공략한 곳은 바로 ‘생명의 계곡’이다.
“생명의 계곡……?”
-그래. 어둠의 군단장이 직접…… 생명의 계곡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생명의 성소를 봉인해 버린 거지.
“……!”
-해서 이 샤이야 봉우리가 가진 생명력을 다시 회복시키고 싶다면, 성소의 봉인을 해제하는 수밖에 없다.
‘생명의 계곡’은 이안이 너무도 잘 알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고대의 정령 ‘미루’를 구해 주고, 그녀의 도움을 받아 ‘성령의 유적’을 찾아내었던 바로 그곳.
지금 이안의 등에 메여 있는 성령의 심판 검이 묻혀 있던 곳도 바로, 이 생명의 계곡이었으니 말이었다.
‘퀘스트가 또 이렇게 이어지네.’
그리고 이안은 지금의 상황에 안도의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늦어 드라토쿠스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알아내는 데 최소 일주일 이상은 걸렸을 법한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늦어질수록 정령계가 패배할 확률은 높아질 테고…… 그랬더라면 아까운 에픽 히든 퀘스트를 통째로 날려 먹어야 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아직 마음을 놓을 단계는 당연히 아니었다.
원인을 알아냈다고 해서 해결책이 생긴 것은 아니었으며, 해결책까지 안다고 해도 그것을 성공시키는 게 결코 쉬울 리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다행인 부분이라면 드라토쿠스가, 이안의 기대보다도 아는 것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 봉인이라는 것. 해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그것까지 묻진 못했지만, 아마 녀석들은 십중팔구 ‘어둠의 마력환원장치’를 사용했을 거다.
“어둠의…… 마력환원장치?”
-그래. 일전에도 그걸 사용해서 정령계의 자연 마력을 봉인시키는 걸 봤거든.
마력환원장치는 이름 그대로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기계장치였다.
모든 종류의 마력을 기계 동력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기계문명의 결정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던 이안은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다.
“그런데 난 대체 왜 지금껏 한 번도 그런 장치를 본 적이 없는 거지?”
-음……? 그게 무슨 말이지?
“지금까지 난 기계문명이 점령한 원소 광산들을 여러 군데 탈환해 왔거든. 그런데 어디에서도 이 마력환원장치는 볼 수 없었어.”
기계문명이 정령계의 힘을 착취하여 사용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여러 번 보아왔는데, 그동안 이 기계장치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 의아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드라토쿠스의 대답은 간단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내가 듣기로 마력환원장치는 기계문명에서도 엄청 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
-단순히 자연 마력을 뽑아다 쓰는 기존의 방식보다, 훨씬 더 효율이 좋다더군.
“……!”
-아마 못 봤다면 그런 이유 때문이지 싶군.
드라토쿠스의 말을 듣던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이유라면 이해가 되었으니 말이다.
하여 이안은 이제 그에게 가장 중요한 마지막 질문을 하였다.
“어쨌든 그럼…… 봉인을 해제하기 위해선 그걸 파괴하면 되는 건가?”
-그건 아니다. 아주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군.
“……?”
-그걸 잘못 건드렸다간, 아예 생명의 성소가 망가져 버리는 수가 있어.
“컥…… 그럼 봉인은 어떻게 해제해?”
-그건…… 나도 모른다.
“허얼.”
-다만 어둠의 기계공학자 ‘지르딘’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어둠의 기계공학자? 지르딘?”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은 순간.
띠링-!
이안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들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새로운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어둠의 기계공학자 지르딘(에픽)(연계)(히든)’ 퀘스트를 수령하였습니다.
……후략…….
이어서 이안은 반사적으로 눈앞에 반짝이는 퀘스트 정보 창을 빠르게 오픈하였다.
* * *
띠링-!
-퀘스트의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핏빛 달 처치(히든)(에픽)’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셨습니다.
-명성(초월)을 3만 만큼 획득하였습니다.
-‘피의 보석’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중략……
-연계된 새로운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새까만 바탕에 얇은 금실이 수놓인 고급스런 두건과 망토.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 안에 드러난 짙은 군청빛의 견갑이 바깥으로 드러난다.
“이것으로 거래는 완료되었군.”
“그렇소.”
“그렇다면 물건은 준비해 뒀겠지?”
“물론이오. 잠시만 기다리시길.”
화려한 장식으로 수놓인 멋들어진 갑주가 등불 아래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얼굴은 어둠 속에 감춰져 있었다.
머리에 쓰고 있는 두건도 두건이었지만, 그 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기운이 남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검은 두건의 사내.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미국 서버의 암살자 랭커, ‘조나단’이었다.
‘이번 퀘스트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 거점으로 돌아가면 루토에게 잔소리 좀 듣겠군.’
오래 전부터 길드의 총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루토’를 떠올린 조나단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지금 그가 퀘스트를 진행 중인 곳이 어딘지 루토가 알았더라면, 더 어마어마한(?) 잔소리를 들어야 할 테니 말이었다.
‘나도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뭐 어쩌겠어. 히든 퀘스트가 더 중요하지.’
지금 조나단이 위치한 곳은 다름 아닌 라카토리움.
그 안에서도 가장 번화한 도시인, 대도시 ‘루탄’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잔소리의 원인이 되는 이유는 무척이나 간단하였다.
만약 조나단이 마계 진영의 유저였다면 루탄에 있는 것이 아무런 문제 될 게 없었지만, 그는 어엿한 인간 진영의 랭커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마계와 정령계의 전면전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루탄의 위험도는 과거보다도 훨씬 높아졌다고 할 수 있었다.
이안이 멀쩡히 루탄을 활보하던 그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경계가 삼엄해진 것이다.
하지만 조나단은 결코 퀘스트가 끝나기 전까지, 이 라카토리움을 빠져나갈 생각이 없었다.
‘사나이가 퀘스트를 시작했으면 끝은 봐야 하는 법.’
리스크가 엄청난 만큼, 퀘스트의 보상도 그에 비례하게 짭짤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암살자 클래스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가진 그는 어지간히 위험한 상황에서도 제 몸 하나 뺄 자신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이 정도 리스크는 그에게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연계 퀘스트를 중간에 포기하는 일은 있을 수 없지. 암, 그렇고말고.’
그리고 조나단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바깥에서부터 작은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잠시 후, 그와 모종의 거래(?)를 하던 NPC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끼이익-!
“여깄습니다, 조나단 님.”
조나단의 앞에 다가온 NPC가 조심스레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그에게 건네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낡은 양피지 조각이었다.
“물건은 확실하겠지?”
“물론입니다.”
“좋아. 깔끔해서 좋군.”
이어서 그 양피지를 받아 든 조나단은 기분 좋은 표정이 되어 씨익 웃었다.
겉보기엔 별것 없어 보이는 이 양피지 조각을 얻기 위해, 지난 보름 동안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 가며 퀘스트를 클리어해 온 것이었으니 말이다.
띠링-!
-‘어둠의 요새 비밀 지도(전설)’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고대 연성술의 비밀(히든)(에픽)(연계)’ 퀘스트를 획득하셨습니다.
‘좋아. 드디어 마지막 퀘스트야……! 이것만 클리어하면……!’
새로 획득한 퀘스트 정보 창을 읽어 내려가며, 조나단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앞에 서 있던 NPC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나단 님. 주인님께서 기다리셔서…….”
“그래. 수고했다.”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이어서 그에게 인사를 마친 NPC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자, 조나단은 구석에 놓여 있는 소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이곳은 그 외엔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 공간(?)이었고, 때문에 안전한 이곳에서 퀘스트 공략 계획을 좀 더 고민해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
조나단은 두 눈을 부릅뜨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던 소파에 누군가가 턱 하니 걸터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이곳을 알고 있는 이가 또 있었다니!’
한차례 마른침을 집어삼킨 조나단이 허리에 꽂혀 있던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스르릉-!
이어서 앞으로 한 걸음 더 옮긴 그는 어둠 속의 존재를 향해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넌, 누구냐.”
“…….”
“이곳에 나타난 목적이 뭐지?”
그리고 다음 순간, 조나단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휴, 찾느라 힘들었네.”
“……?”
“하마터면 퀘스트를 스틸당할 뻔했잖아?”
“그게 무슨 말이냐!”
어둠 속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온 의문의 사내가 그의 손에 들린 양피지를 정확히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목적이라면…… 흠, 지금 네 손에 들려 있는 그거?”
“……?”
“그거 어둠의 요새 비밀 지도지?”
“그, 그걸 어떻게……!”
조나단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는 씨익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놔.”
“뭐?”
“싫으면 맞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