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9화 5. 정령의 신 네트라 >
-정령왕의 대리인이여…… 그대는 이 대자연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예?”
-첫째, 푸르른 아름다움.
“……?”
-둘째, 넘치는 생명력.
“객……관식이었어요?”
-셋째, 평화와 여유.
“음…….”
-정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모든 가치는 분명 대자연이 가진 중요한 가치들이니까요.
“그……럼요?”
-다만 그대의 생각을 솔직하게 선택해 주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안은 고민에 빠졌다.
정령신의 시험이라기에 어떤 전투나 타임어택 미션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그의 눈앞에 떠오른 것은, 고등학생 때 이후로 풀어 본 역사가 없는 객관식 문제였으니 말이다.
조금 특이한 것은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객관식이라는 정도.
‘정답이 없을지언정 오답은 분명 있을 텐데…….’
이안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가 아니라면, 그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뿐이리라.
‘저 NPC의 마음에 드는 답을 주면, 그게 곧 정답이겠지.’
객관식 문제이기는 하지만, NPC와 친밀도를 올린다는 마인드로 접근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
하여 이안은 답을 하는 대신 슬쩍 그녀의 의중을 떠보기로 했다.
이 문제의 답을 떠보려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아무리 NPC의 AI라 해도, 그 정도까지 단순하게 당해 주지는 않을 테니까.
다만 그녀와 대화하면서 생겼던 한 가지 의문점을 풀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심리 상태(?)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뭐라도 대화를 하다 보면, 답을 찾을 수 있겠지.’
하지만 네트라와의 대화를 시작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안의 머릿속은 더욱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의 대화는, 점점 더 산으로 가기 시작했으니 말이었다.
“네트라 님.”
-말씀하세요, 대리인이여.
“신께서는 혹시, 제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 정령계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셨던 겁니까?”
-네, 맞아요.
“어…… 저, 정말요?”
-제가 왜 그러한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야 당연히, 정령계를 관장하시는 정령의 신이시니까…….”
이안의 동공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얘 뭐지?’
지금껏 이런 종류의 NPC는 이안조차도 처음 보는 타입 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녀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신은 차원계에서 생기는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답니다.
“그런데요?”
-제가 미리 알고 있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건 없다는 말이지요.
“……?”
-즉, 제 일이 아니란 얘깁니다.
“켁?”
이안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뭐 신이 이래?’
물론 신이 차원계에 관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안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마계 대전의 콘텐츠를 주도적으로 진행하면서, NPC들로부터 여러 번 들었던 이야기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계를 관장하던 다섯 신들은 적어도 이런 태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이 직접 할 수 없다면 대리인을 통해서라도, 어떻게든 차원계를 지켜 내려 노력했었으니 말이다.
유저들에게 주는 퀘스트들이 다 그런 맥락이었으니까.
‘신박한 콘셉트네.’
그런 지상계의 신들과 비교하면, 눈앞의 네트라는 거의 직무유기 수준으로 보였던 것.
그 때문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다시 반문하였다.
정말 순수한(?) 궁금증으로 말이다.
“그럼 네트라 님의 일은 어떤 건가요?”
-제 일…… 말입니까?
“네. 정령계의 위기도 네트라 님의 일과 연관이 없다면…… 어떤 것이 네트라 님의 일인지 궁금해서요.”
무표정했던 네트라의 얼굴에 조금씩 ‘감정’이라는 것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안의 눈에 비친 그 감정은 분명 ‘귀찮음’과 비슷한 성질의 것이었다.
-그것이 제 일이 아닌 것은 맞지만, 제 일과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방금 관련이 생긴 셈이지요.
“……?”
-그대가 이렇게 내게 찾아와, 그것과 관련된 일을 제게 주었으니까요.
“그게 무슨……?”
잠시 뜸을 들인 네트라가,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 일이라…… 그것의 정의는 간단히 내릴 수 있겠네요.
“……?”
-기도나 신단을 통해 이뤄지는 정령계의 모든 민원들.
“미, 민원요?”
-그것들을 들어주거나 해결해 주는 것……이랄까요?
“컥.”
-뭐, 근원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당신의 민원이라든가, 방금 전까지 제게 기도했던 정령들의 작은 고민들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들어주는 것이 제 일이라고 할 수 있죠.
“일이…… 많으시네요.”
-그렇죠. 아주 많죠.
“…….”
-그러니 빨리 제 질문에 답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그리고 조금 날카로워진 듯한 네트라의 말투에, 이안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마치…….’
정확히 어떻게 형용하기는 힘들지만, 빨리 대답하고 자리를 비켜 줘야 할 것만 같은 이 기분!
언어 자체는 친절하지만, 가시방석에 올라선 것만 같은 이 불편한 기분이 이안은 왠지 낯설지 않았다.
‘동사무소에 온 것만 같아…….’
1년 전쯤 하린과 함께 살 새 아파트를 계약하고 전입신고를 위해 동사무소에 갔을 때.
정확히 이 기분을 느꼈던 것 같았으니 말이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안은 네트라의 외모에서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였다.
‘저 미묘하게 찌들어 있는 표정. 만사가 귀찮은 듯한 눈빛…….’
덕분에 이안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 대충 어떤 답을 주면 될지 알 수 있겠군.’
이어서 이안의 입이 다시 천천히 떼어졌다.
그의 말투는 이전과 달리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알겠습니다, 네트라 님. 시간 끌어서 죄송합니다.”
-뭐, 죄송할 것까지야…….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도록 하지요.”
-좋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대자연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평화와 여유로움입니다.”
그리고 이안의 대답을 들은 네트라의 표정에, 은은하고 희미한 미소가 퍼지기 시작하였다.
-평화와 여유…… 그것은 정말로 중요한 가치죠. 좋습니다. 그럼 다음 질문을 하도록 하죠.
조금 더 부드러워진 말투로, 네트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정령왕의 대리인이여…… 그대는 정령과 정령술사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를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번에도 선택지는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네트라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천천히 말하였다.
-첫째. 주종관계.
-둘째. 절친한 벗.
-셋째. 부모와 자식.
선택지를 전부 들은 이안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흠, 가장 노멀한 답변은 두 번째 선택지일 것 같긴 한데…….’
이 문제는 오히려 첫 번째 질문보다 답을 고르기 쉬웠지만, 네트라의 성향을 알고 나니 그 어떤 선택지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이안은, 조금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어차피 답이 정해진 문제가 아니라면…….’
네트라의 질문에 대한 접근법을 완전히 다르게 생각키로 한 것이다.
“네트라 님.”
-말씀하세요.
“꼭 저 선택지 중에서만 골라야 하는 겁니까?”
-어째서 그것이 궁금하시죠?
마른침을 한 차례 꿀꺽 삼킨 이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저 세 가지의 선택지와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네……?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하, 한번 들어나 보지요.
이번엔 역으로 당황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네트라.
그런 그녀를 향해, 이안이 조심스레 말을 꺼내었다.
“정령과 정령술사의 이상적인 관계…… 그것은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정확히 보상한 만큼만 시키고, 받은 만큼만 일하는 관계.”
-그, 그런!
“마치 이런 겁니다.”
-……?
“제 소환수 뿍뿍이는 미트볼 한 알당 정확히 50칼로리만큼만 일하거든요.”
이안은 옆에 가만히 서 있던 뿍뿍이를 향해 슬쩍 눈치를 주었고, 제법 눈치가 빨라진 뿍뿍이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의 말에 호응하였다.
“뿍, 뿌뿍! 그렇뿍!”
“이것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정령과 정령술사의 관계 아니겠습니까.”
이안의 말이 끝나자, 그와 네트라의 사이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이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먹혔다!’
지금 네트라의 두 동공은, 분명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거짓된 답변(?)을 강요받은 뿍뿍이는 조금 심기가 불편해 보였지만, 그 정도는 보상으로 해결해 주면 될 일.
이안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네트라의 말을 기다렸고, 잠시 후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이것은…… 확실히 정령과 정령술사의 관계론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군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무척이나 이상적이에요.
“당연하죠.”
-좋습니다! 그대의 답변.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안이 기대하고 있던 시스템 메시지가, 그의 눈앞에 스륵 떠올랐다.
띠링-!
-당신의 답변에 정령의 신 네트라가 만족합니다.
-정령의 신 ‘네트라’와의 친밀도가 2만큼 상승하였습니다.
이어서 네트라의 질문이 또다시 이어졌다.
-그럼 이제 그대의 자격을 확인하기 위한…… 마지막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씀하세요, 네트라 님.”
이안과 네트라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네트라의 눈빛에서, 이안은 이제 확실한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정령왕의 대리인이여…… 그대는 정령술사가 정령에게 요구해서는 안 될 일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네트라의 질문을 들은 이안은 그녀의 선택지를 기다리는 척하며 또다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동안 네트라는 다시 세 가지의 선택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자연을 해치는 일.
-둘째, 평화를 해치는 일.
하지만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셋째…….
네트라가 세 번째 선택지를 말하기도 전.
이안이 완벽한(?) 답을 내놓았으니 말이었다.
“초과근무.”
-……?
“정령술사가 정령에게, 절대로 요구해서는 안 될 일. 그것은 바로 초과근무입니다.”
-그런……!
“그것이야말로 자연을 해치는 일임과 동시에, 평화를 해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이안의 마지막 답을 들은 네트라는,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지금껏 억겁의 세월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며 민원을 받아왔지만, 이런 이상적인 민원인(?)은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이안. 진리에 도달한 자여…….
급기야 감격으로 인한 것인지, 말을 잇지 못하는 네트라.
그런 그녀의 말 대신, 이안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띠링-!
-당신의 답변에, 정령의 신 네트라가 만족합니다.
-정령의 신 ‘네트라’와의 친밀도가 추가로 10만큼 상승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정령의 신 ‘네트라’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였습니다!
이어서 정령의 제단에 올려져 있던 불과 대지의 근원이 다시 하얀 빛에 휘감기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