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7화 4. 전쟁의 시작 (2) >
* * *
이안의 손에 닿은 에메랄드 빛덩어리가 강하게 사방으로 폭사되며, 그 자리에 두루마리 양피지 한 장이 두둥실 떠오른다.
한눈에 보아도 특별한 힘이 담겨 있는, 황금빛의 두루마리 종이.
그것을 집어 들자,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주르륵 하고 떠올랐다.
<트로웰의 지원 요청(에픽)(연계)>
-정령계의 진정한 힘은 모든 원소의 근원이 되는 사대 속성의 힘이 전부 모였을 때 비로소 발현된다.
그 때문에 정령계의 각지에 뿌리내리고 있는 사대 속성의 부족들을 한자리에 전부 모을 수만 있다면, 강력한 기계 군단에 충분히 맞설 수 있을 것이다.
대지 속성의 부족들은 트로웰의 권능하에 전부 모였으니, 이제 불과 물, 그리고 바람의 부족들을 규합하여야 하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당신은 근원의 숲에서 불과 바람의 권능을 찾아 돌아왔다.
……중략……
직접 비터스텔라의 중심에 있는 ‘정령의 제단’으로 가서 불과 바람의 권능을 발현하자.
그것으로 각지에 숨어 있는 불과 바람의 전사들을 전장으로 불러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제단의 신탁을 통해, 물의 군대를 규합할 수 있을 방법을 알아보자.
정령왕도, 권능도 없는 이상 물의 부족들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해내야만 한다.
*다음 조건을 충족할 시 퀘스트가 클리어되며, 연계 퀘스트를 수령할 수 있습니다.
A. ‘정령의 제단’에 무사히 도착하여, 불과 바람의 권능 발현(제한 시간 : 100분)
B. ‘제단의 시험’ 통과
-퀘스트 난이도 : S+
-퀘스트 조건
‘정령왕의 대리인’ 자격 보유
‘사대 속성의 근원’ 중 하나 이상 보유
‘사대 속성의 대리인’ 칭호 중 하나 보유
*A 조건의 제한 시간을 한 번이라도 초과할 시, 다시는 도전할 수 없는 퀘스트입니다.
-보상 : 명성(초월) 10만, ‘물의 부족을 찾아서(에픽)(연계)’ 퀘스트 수령
퀘스트 내용을 빠르게 확인한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그냥 되는 건 아니었어.’
대략적인 스토리의 진행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 불과 바람의 근원을 어떻게 사용해야 권능을 발현할 수 있는지는 감이 오질 않았었으니 말이다.
속성의 근원이라는 것이 사용하거나 소모할 수 있는 방식의 아이템이 아니었으니, 이것으로 어떻게 불과 바람의 군대를 규합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것.
‘제한 시간이 100분이라…… 퀘스트 난이도가 높진 않지만, 그래도 빠르게 움직이는 게 좋겠지.’
대지의 요람에서 정령의 제단까지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30분 정도.
그 때문에 이안은 제단까지의 이동 과정에 분명 기계문명의 방해가 있을 것이라 짐작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제한 시간을 100분이나 줄 리 없었으니 말이다.
비교적 낮은(?) 난이도를 감안해도 말이었다.
타탓-!
빠르게 요람을 빠져나온 이안이 오랜만에 아이언을 소환하였다.
청랑같이 무서운 친구들이 있는 근원의 숲과 달리, 정령계는 이안의 나와바리(?)였고, 여기서는 아이언을 타고 직활강을 해도 누구도 이안을 막을 수 없었으니까.
“가자, 아이언.”
캬아아오오-!
이어서 이안을 태운 아이언이 커다란 날개를 쫙 펼친 뒤, 빠른 속도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기 시작하였다.
* * *
카일란에는 서버별 레벨 랭킹을 제외한다면, 따로 공식적인 랭킹 목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유저들이 이야기하는 랭커들의 랭킹은 사실상 여러 데이터를 규합해서 대중에 의해 만들어진 랭킹인 것이다.
그 때문에 최근 공식 커뮤니티에 올라온 랭킹 표는 사실상 가장 최근에 있었던 ‘기사 대전’ 콘텐츠의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이번 기사 대전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저평가된 이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최상위권의 랭커들 중에서도 말이다.
“마스터, 이거 공식 커뮤니티에 올라온 랭킹 표, 좀 이상하네요.”
“왜?”
“마스터께서 랭킹 70위권이시라니…… 이건 좀 너무한 것 같은데요.”
최상위권 소속의 길드가 아니거나, 자신의 능력치보다 수준 낮은 길드에 소속된 랭커들이라면, 기사 대전에서 제대로 된 활약상을 펼쳐 볼 기회도 없었으니, 대중의 인지도를 기준으로 밀려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
“글쎄, 난 당연하다고 보는데.”
“예?”
“내가 최근에 대외적으로 뭐 보여 준 게 없잖아.”
“그건 그렇죠.”
“100위권 안에 붙어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인 거지.”
그리고 미국 서버의 암살자 클래스 랭커인 ‘조나단’이 바로, 그 대표적인 케이스의 랭커라고 할 수 있었다.
한때 대전사 카이와 비등한 PVP 실력을 보여 주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었지만, 워낙 은둔형 게이머다 보니 어느새 대중들에게서 잊혀 버린 것이다.
게다가 과거 림롱의 천살 길드처럼(이제는 호왕과 합병되었지만) 영지조차 없는 소규모의 길드 하나만을 운영하고 있었으니, 그 길드의 멤버들이 아무리 뛰어난 실력자라 해도 존재감은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 다음 기사 대전은 언제랍니까?”
“그건 왜?”
“다음 기사 대전 때는 나가서, 한번 본때를 보여 주셔야죠.”
“우리가 무슨 수로?”
“당장 길드원 모집 공지 올리겠습니다.”
“후후.”
“저희도 충분히 칼데라스처럼, 최상위권으로 올라갈 수 있는 포텐이 있다니까요?”
“아서라. 귀찮으니까.”
“마스터……!”
“그럴 거였으면 예전에, 올리버 녀석 제안을 받아들였겠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마스터.”
“싫어.”
조나단이 처음 유명해진 것은 아주 오래 전 미국 서버의 마계 대전 에피소드 때였다.
당시만 해도 완전히 무명이던 그는 마계와의 전쟁에서 카이를 마크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PVP 실력을 보여 주었고, 때문에 순식간에 미국 서버 팬들의 인지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뒤로 그가 더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서버 최고의 마법사인 ‘마크 올리버’의 친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였다.
지금까지도 미국 서버의 팬들 대부분이, 그를 올리버의 친구라고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아…… 요르간드 같은 허접한 놈이 글로벌 암살자 랭킹 1위에 박혀 있는데…… 억울하지도 않으십니까?”
“걔가 허접은 아니잖아?”
“무, 물론 저는 이길 자신 없지만…… 마스터라면 충분히 상대하실 수 있잖습니까?”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길드원 ‘루토’와 투덕거리며 대화를 나누던 조나단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루토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물었다.
“갑자기 어디 가십니까?”
“갑자기 아니다. 원래 볼일이 있었어.”
“오후에 길드 퀘 일정, 잊으신 건 아니죠?”
“음, 까먹고 있긴 했는데, 어차피 그 전엔 돌아와. 괜찮아.”
“마스터!”
“네가 알아서 준비하고 있어. 3시 전엔 돌아올 테니까.”
이어서 멍한 표정이 된 루토를 두고 길드 거점에서 나온 조나단은 피식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요르간드라…… 루토 녀석 말이 아주 틀리지도 않네. 그런 허접한 놈이 암살자 세계 랭킹 1위라니.”
저벅- 저벅-.
조나단은 까맣게 무두질 된 가죽 장화를 사뿐사뿐 내딛으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의 여유로운 움직임과 별개로 엄청나게 빠른 그의 이동속도였다.
마치 허공에서 미끄러지기라도 하듯,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지는 조나단.
소르피스 내성의 수많은 인파들을 빠르게 뚫고 나온 조나단이 향한 곳은 광장 북쪽에 있는 ‘차원의 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통해 그가 향한 곳은…….
띠링-!
-‘정령계’ 차원을 선택하셨습니다. 맞습니까?
“맞아.”
-‘차원의 열쇠’를 하나 소모합니다.
-잠시 후, ‘정령계’로 이동됩니다.
우우웅-!
기사 대전 이후, 현재 중간계에서 가장 핫한 차원계.
한참 기계 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정령계’였다.
* * *
이안의 예상은 정확했다.
전력으로 비행한 아이언 덕에 제단에 도착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단순히 이동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잉- 기잉-!
-숲의 대전사다.
-찰리스님의 말 대로군.
-녀석이 나타났다. 삐리릭-!
이안이 제단에 도착함과 동시에 셀 수 없이 많은 기계 괴수들이 제단의 주변으로 소환되었고, 그를 둘러싼 뒤 집단 공격을 퍼부었던 것.
하지만 초월 100레벨도 채 되지 않는 기계 괴수들이 이안의 상대가 될 리는 없었고, 때문에 전투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치익- 치이이잉-!
-역시 숲의 대전사…… 강력하군……!
이안의 대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어김없이 한 기 이상의 기계 괴수가 파괴되었으니 말이다.
퍼어엉-!
다만 이안에게 그래도 S등급의 난이도가 책정된 이유는 100분이라는 제한 시간 때문.
‘숫자가 많으니까 까다롭긴 하네.’
퀘스트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이안이 처치해야 하는 기계 괴수는 분당 두 마리 이상이었고, 이런 조건이라면 이안 또한 쉽게만 생각할 수 는 없었으니 말이었다.
빠각-
까아앙-!
-놈이 제단으로 가려 한다!
-어떻게든 놈을 막아!
하지만 결국 이안은 거의 10~15분 정도를 남긴 채로 퀘스트를 전부 클리어할 수 있었다.
만약 기계 괴수들 중에 피켄로 같은 보스급의 몬스터가 있었다면 더 고전했겠지만.
그저 100레벨 언저리의 평범한(?) 기계 괴수들을 상대하는 데에는 별다른 변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심판의 번개’만 잘 활용해도, 머릿수 줄이는 것은 손쉬웠던 것.
오히려 이렇게 떼로 몰려든 기계 괴수들에게, 이안은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 덕분에 이번에 진화한 ‘마그리파’의 레벨을 순식간에 올릴 수 있었으니 말이었다.
-불의 최상급 정령 ‘마그리파’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마그리파’의 레벨이 7레벨이 되었습니다.
-불의 최상급 정령 ‘마그리파’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마그리파’의 레벨이 11레벨이 되었습니다.
-‘마그리파’의 레벨이 13레벨이 되었습니다.
-‘마그리파’의 레벨이 14레벨이 되었습니다.
……중략……
-‘마그리파’의 레벨이 32레벨이 되었습니다.
1레벨이었던 마그리파의 레벨이 이 전투 한 번으로 32레벨까지 올라 버린 것이다.
‘역시 저레벨 키우는 맛은 언제나 쏠쏠하단 말이지.’
하여 기분 좋게 기계 괴수들을 쓸어 담은 이안은 능숙하게 아이언의 등에서 뛰어내려 제단으로 올라섰다.
타탓-!
100분 내로 제단에 도착이라는 첫 번째 조건은 이제 충족하였지만, ‘제단의 시험’이라는 미지의 영역이 아직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위이잉-!
-‘정령의 제단’에 도착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불의 근원’ 아이템과, ‘바람의 근원’ 아이템을 제단 위에 올려놓으십시오.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은 망설임 없이 인벤토리에서 두 속성의 근원을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제단에 올려놓았다.
‘자, 이제 시험이라는 게…… 시작되려나?’
이어서 다음 순간.
우우웅-!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던 제단의 상단부에, 붉은 빛과 금빛 기운이 동시에 휘몰아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