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7화 1. 불과 바람의 권능 >
청랑은 기분이 무척이나 언짢았다.
한가로이 숲속에서 낮잠을 즐길 시간에 뜬금없이 나타난 침입자가 단잠을 방해했으니 말이었다.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이 근원의 숲에 들여서는 안 될 이질적인 기운을 가진 침입자.
그래서 청랑은 자신의 권능을 이용해 침입자를 곧바로 쫓아내 버리려고 했었다.
방금 전, 건방진 마법 공격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었다.
퍼엉-!
‘뭐야, 초월자가 아니었어?’
침입자의 공격을 방호로 막아 낸 청랑은 그들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상식으로 이 근원의 숲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중간자의 위격을 넘어 ‘초월자’의 위격을 가져야만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방호 넘어에서 느껴진 기운은 분명 중간자의 위격을 가진 영혼들이었고, 그래서 그녀의 생각은 조금 달라졌다.
물론 자신의 숲에서 쫓아낼 생각이야 변함없었지만.
그 전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인지 알아보고 싶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초월의 위격을 갖지도 못한 침입자라면,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도 없었으니.
청랑에게 이 선택은 그저 유희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위이잉-!
손짓 한 번으로 축지술(縮地術)을 펼친 청랑은 이안의 바로 앞까지 순식간에 다가갔다.
스르륵-.
그런데 다음 순간, 이안과 눈이 마주친 청랑은 어이없는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건방지고 못생긴 인간은 또 뭐야?”
청랑의 미적 기준에 상당히 못 미치는 못생긴 인간과, 그 옆에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더 못생긴 거북이.
가까이서 확인한 둘의 비주얼은 완벽한 조화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녀에게 제법 충격적인 것이었으니 말이다.
특히 요상한 거북이의 조화롭지 못한 머리 크기는 청랑으로서 참기 힘든(?) 것이었다.
‘그냥 쫓아내 버릴까.’
궁금증이고 나발이고 이 조화롭지 못한 존재들을 자신의 아름다운 숲에서 당장이라도 쫓아내 버리고 싶어진 것.
“감히 내 숲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하지만 그 못생긴 인간의 입이 열린 순간, 청랑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가 불쑥 튀어나왔으니 말이었다.
“여기…… 이리엘 님의 숲이 아니었나요?”
* * *
이안이 청랑을 공격한 것은 결과적으로 봤을 때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대상이 숲지기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상황에서, 무모한 공격을 감행한 셈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같은 상황에 딱히 다른 방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분명 청랑은 최초에 나타났을 때부터 이안을 공격하려 하고 있었고, 숲지기에게 발견된 이상, 딱히 도망칠 방법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안이 선공을 함으로서 NPC와의 친밀도가 떨어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정도.
오히려 이안이 이곳에서 잘못 선택한 것이 있다면, 사랑의 숲과 비슷하다 하여 너무 섣불리 움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분명히 근원의 숲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진 곳이었음에도 말이다.
‘후우, 뿍뿍이 말을 너무 믿었나.’
하지만 이제 와 후회해 봐야, 달라질 것도 없는 일.
이안은 최대한 침착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호랑이 굴에서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아나갈 수 있는 법.
어찌 된 일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숲지기는 더 이상 이안을 공격하지 않고 있었고.
그렇다면 뭔가 대화의 여지가 생긴 것이었으니까.
찰나간의 정적을 깨고 다시 입을 연 것은 숲지기 청랑이었다.
“이리엘……? 네가 이리엘을 어떻게 알지?”
그리고 청랑의 말을 들은 이안은 곧바로 확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당장 이 숲에서 쫓겨나지 않을 방법 정도는 생긴 것이라고 말이다.
이안의 대답이 재빨리 이어졌다.
“이리엘 님은 제 오랜 친구예요.”
“친……구?”
“네, 친구요.”
그의 대답을 들은 청랑이 이번에는 뿍뿍이를 응시하며 다시 물었다.
“거북이, 설마 너도?”
그리고 그녀의 그 물음에, 뿍뿍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그렇뿍.”
사랑의 숲에서 처음 만났던 이리엘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간 이안과 함께 다니며 제법 친해진 것도 맞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뿍뿍이의 대답까지 들은 이안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다시 청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청랑이 다시 적대감을 드러내기 전에, 최대한 다시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말이다.
“예. 혹시 이리엘 님을 알고 계신가요?”
이안의 그 물음에 다시 입을 다무는 청랑.
하지만 대답이 없을 뿐, 사실 이것은 무언의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이리엘을 알지 못한다면, 이러한 반응이 나올 리 없었으니 말이다.
이안은 긴장된 표정으로 청랑의 다음 말을 기다렸고, 곧 그녀의 입이 다시 천천히 열렸다.
“이리엘의 친구라…….”
“……?”
“그녀가 이렇게 못생긴 친구들을 사귈 리 없는데.”
빠직-!
“뿌뿍-!”
청랑의 말을 들은 뿍뿍이가 발끈했지만, 이안이 재빨리 제지하였다.
지금은 뿍뿍이의 분노보다, 청랑의 분노가 더 무서운 상황.
상처받은(?) 뿍뿍이를 달래 주는 것은 불과 바람의 권능을 얻은 뒤에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압도적인 청랑의 외모를 보고 있자면, 그녀의 발언에 대해 딱히 할 말이 없기도 하였다.
전설 속의 구미호가 있다면 이런 외모일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운 수인(獸人)의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진위 여부는 이리엘 님께 직접 물어보셔도 되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 흐으음…….”
턱을 만지작거리며 이안을 잠시 응시하던 청랑이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표정은 확실히, 처음보다 훨씬 누그러진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이리엘의 친구라 해도 함부로 나의 숲에 들일 순 없어.”
“그……렇습니까?”
“하지만 얘기 정돈 들어 봐 줄 수 있지.”
“……!”
청랑의 말을 들은 이안의 표정이 확연히 밝아졌다.
퀘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가능성이 배 이상 올라간 것이었으니 말이다.
“어쩌다 내 숲에 오게 됐는지, 그것부터 한번 얘기해 봐.”
“감사합니다……!”
청랑과 이안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이어서 이야기를 꺼내려는 이안을 향해, 청랑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한 번 더 경고하였다.
“이야기를 잘해야 할 거야.”
“……!”
“만약 그 이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아무리 이리엘의 친구라 해도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서슬 퍼런 청랑의 경고에 마른침을 집어삼키는 이안.
꿀꺽-.
잠시 뜸을 들인 이안이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하였다.
* * *
청랑과 이리엘의 관계.
그것은 그리 복잡한 것은 아니었다.
이안과 뿍뿍이가 갔었던 사랑의 숲 또한 결국 청랑의 숲에서 떨어져 나온 ‘근원’의 숲 중 하나였고.
그곳의 숲지기인 이리엘은 청랑에게 ‘자매’와 같은 존재였으니 말이었다.
물론 영혼의 위격이야 청랑이 훨씬 더 높았지만, 그것은 별개의 문제.
여하튼 그러한 이유로 이안은 퀘스트 실패의 위기를 가까스로 넘길 수 있었다.
‘역시 세상 살아가는 데, 인맥만큼 중요한 게 없군.’
오늘도 게임 인생에 한 가지 커다란 교훈을 얻은 이안!
모든 이야기를 마친 이안은 조금 더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불과 바람의 근원을 얻기 위한 이 퀘스트에서, 청랑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욕심 말이다.
‘분명 트로웰은 이 근원의 숲이 정령계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라 했었어. 그렇다면 청랑 또한 모르쇠로 방관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청랑은 그렇게 녹록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거였군.”
“그렇습니다, 청랑 님.”
“트로웰…… 이 친구, 이제 막가네.”
“예?”
“아무리 상황이 급하다 해도 그렇지. 이런 월권이라니.”
“……?”
“어차피 소멸될 운명……이라는 건가?”
트로웰은 중간계에서 가장 영혼의 위격이 높은 정령왕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신격을 가지고 있는 초월자는 아니었다.
그 때문에 중간자에 불과한 이안으로 하여금 성운을 밟을 수 있게 도와준 것은 신격체인 청랑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당연히 건방진 행위.
하여 청랑은 고민을 시작하였다.
순리를 따르자면 지금 당장 이안을 근원의 숲에서 쫓아내야 했지만, 정령계의 상황을 들으니 마음 한편이 찝찝해진 것이다.
사실 천성이 게으른 데다, 근원의 숲 안에서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청랑에겐 정령계가 어찌 되든 알 바가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 정령계가 소멸한다 해도 다시 새로운 정령계가 창조될 것이고.
그러면 결국 순리는 제자리를 되찾을 테니까.
그저 그녀의 입장에서는 조금 ‘마음이 쓰이는 것’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인간. 그러니까 결국…… 네가 이곳에 온 이유는 불과 바람의 근원을 얻기 위함이겠지?”
“근원이 정령왕의 권능과 같은 것이라면, 맞습니다.”
이안의 대답을 들은 청랑은 복잡한 표정이 되어 다시 말을 이었다.
“마음대로 대리인을 이곳까지 보낸 트로웰이 괘씸하지만……. 이리엘의 얼굴을 봐서라도, 완전히 모른 척할 수는 없겠지.”
“그럼, 도와주시는 겁니까……?”
청랑의 말에 이안은 반색하며 다시 되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안의 기대와 달리,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였다.
“내 힘이 중간계에 개입되는 것은 차원의 순리를 거스르는 일.”
“…….”
“그대를 내가 도울 수는 없다. 대신 ‘기회’는 한번 주도록 하지.”
“기회라면……?”
“불과 바람의 근원. 그것들을 찾을 ‘시간’을 주도록 하겠다.”
“……!”
“내가 허락해 준 시간 내에 원하는 것을 얻어 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대와 정령계의 운명이겠지.”
청랑의 마지막 말을 들은 이안의 얼굴에 아쉬움과 안도의 감정이 동시에 떠올랐다.
청랑이라는 초월적인 힘을 지닌 NPC의 도움을 받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적어도 퀘스트를 이어 갈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는 얻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안이 그러한 생각을 떠올림과 동시에.
띠링-!
이안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새로운 퀘스트가 부여됩니다.
-‘불과 바람의 근원을 찾아서(에픽)(연계)(히든)’ 퀘스트를 수령하셨습니다.
-제한 시간 : 300분
-기존의 퀘스트, ‘근원의 숲 (에픽)(히든)(연계)’이 해당 퀘스트로 치환됩니다.
-퀘스트 난이도가 상향 조정되었습니다.
-난이도 상향에 따라 퀘스트 보상이 상향됩니다.
……후략…….
시스템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던 이안의 두 눈이 살짝 확대되었다.
퀘스트가 치환되어 새로운 퀘스트가 생성되는 방식은 무척이나 희귀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게 좋아해야 할 일인지…….’
하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이안은 새로 생성된 퀘스트 창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퀘스트의 목적이 같더라도 그 내용이 달라진다면 그 안에서 분명 새로운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 테니 말이었다.
그리고 퀘스트 창을 읽어 내려가는 이안의 두 눈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하였다.